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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밭에 기세좋게 꽂아 놓은 개발의 붉은 깃발. 배추밭 바로 옆과 그 주변 산자락에 관정 뚫을 무렵 갑자기 벌레들이 사라졌다.
 배추밭에 기세좋게 꽂아 놓은 개발의 붉은 깃발. 배추밭 바로 옆과 그 주변 산자락에 관정 뚫을 무렵 갑자기 벌레들이 사라졌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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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우리 밭에서 나온 배추로 김장을 담갔습니다. 새터 구하러 다닌다는 핑계로 모종 시기를 놓쳐 여전히 고갱이가 제대로 박혀있지 않은 3백 포기 가까운 배추들이 초겨울 밭에서 푸르게 푸르게 널려 있습니다. 이 많은 배추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겨우내 배춧국을 끓여 먹고, 배춧국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죄 나눠주고 남으면 내년 봄에 겉절이며 시원한 배춧국을 끓여 먹을까 합니다.  

속이 차지 않아 김장 김치로는 부적격 판정이 나오는 씨를 받아 심은 쭉쟁이 배추들과 종묘상에서 사온 속이 꽉 들어찬 배추들이 뒤섞여 있는데 모두가 벌레들에게서 용케 살아난 녀석들입니다. 솔직히 고백컨대 절대로 농약 한 방울 치지 않겠다는 그동안의 금기를 깨고 올해는 몇 방울의 농약을 열댓 포기의 배추 모종에 뿌리고 말았습니다. 자연농한다고 동네 방네 떠들어댄 인간이 말입니다. 

"에이그, 그냥 심으면 뭘 해. 결국은 다 크기도 전에 벌레들이 다 갉아 먹어 농약 친 배추로 김장 담구게 될 거면서. 그냥 적당히 남들처럼 농약 치면 되잖아, 올해는 제발 좀 우리 밭에서 나오는 배추로 김장 좀 하자."

지난 몇 년 동안 매년 수백 포기의 배추 농사를 져 오면서 벌레에 헌납하거나 씨알머리 없는 배추로 이래저래 김장 한 번 제대로 담구지 못했던 얼치기 농사꾼인 나는 아내의 성화를 핑계 삼아 농약을 뿌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내는 내 사주를 받아 환경을 생각한다는 저농약을 사왔습니다(환경을 생각하는 농약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비타민 통처럼 생긴 농약병이었습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닐 만큼 작은 농약병 겉면에 '일정기간이 지나면 농약의 잔류성분이 땅에 남지 않는다'라는 식의 친절한 설명이 덧붙여 있었지만 도무지 믿기지 않았습니다. 우선 한 고랑 정도, 열댓 포기의 배추 모종에만 뿌렸습니다. 농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뿌리는 농약이었습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굳건히 지켜온 자존심이라는 성벽이 한꺼번에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했습니다.

지난해에는 벌레들이 배추 모종의 밑둥을 잘라 놓는 바람에 두 세차례에 걸쳐 모종을 옮겨 심어야 했다.
 지난해에는 벌레들이 배추 모종의 밑둥을 잘라 놓는 바람에 두 세차례에 걸쳐 모종을 옮겨 심어야 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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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올해는 제발 김장 좀 갈아 먹자'는 아내의 서릿발 같은 구호 아래 흙에서 금방 녹아 버린다는 저농약이라는 것에 큰 위안을 삼아 두 눈 딱 감고 뿌렸는데 후회막급이었습니다. 목초액을 비롯한 온갖 효소들이 먹히지 않았던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등껍질 검은 아주 작은 벌레들이 예년처럼 어린 배추 모종들을 작살 낼까봐 지레 겁먹고 뿌렸는데 굳이 농약을 치지 않아도 될 일이 생긴 것입니다.

"이 놈의 벌레들이 다들 어디로 간겨?"

그 많던 벌레들은 온데 간데 없고 몇 방울의 농약을 친 배추는 물론이고 예년처럼 농약을 전혀 치지 않은 3백 포기가 넘는 배추 모종들 역시 멀쩡했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더 참았으면 될 것을 억울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 도대체 그 많던 벌레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5년 넘게 농약은 물론이고 화학비료조차 넣지 않고 일군 자연농의 쾌거인가? (그래봤자 호남고속철도가 밭을 죄 까뭉개고 지나갈 터이지만) 해충들이 발붙이지 못할 정도로 땅 기운이 온전히 살아난 것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땅 기운이 왕성하다 해도 그 어떤 종류의 해충이든 밭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마련입니다. 해충이나 익충이나 똑같은 생명이 아닙니까? 벌레들이 보이지 않자 쥐약을 놓고 어느날 갑자기 단 한 마리의 쥐새끼들이 보이지 않았을 때처럼 공포심 같은 것이 몰려 왔습니다.

올해는 지질조사할 무렵 모종을 옮겼던 배추들이 잘 자랐다. 벌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올해는 지질조사할 무렵 모종을 옮겼던 배추들이 잘 자랐다. 벌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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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 모종을 죄 갉아먹곤 하던 벌레들이 사라진 것은 밭 주변 지질을 조사한다며 관정을 뚫고부터였습니다. 배추 모종을 심을 무렵 호남고속철도를 위한 지질 조사니 뭐니 하는 본격적인 지질조사 작업이 한창이었습니다. 지질 조사원들이 찾아와 집 뒤 배추밭을 중심으로 철로가 깔릴 예정이라며 여기저기에 리본을 달아놓고 관정을 뚫어야 한다며 양해를 구해왔습니다. 씨 뿌려 놓은 밭에 여기 저기 등산화 발자국을 팍팍 낙인찍어 놓고 말입니다. 밭고랑으로 댕기라며 머리끝까지 솟아오른 화 기운을 버럭 버럭 내질러 댔지만 소용없는 짓이었습니까?

"그류 어쩔 거여. 당신들도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디. 관정을 파겠다면 파야지 어쩔거여."

땅속을 후벼 파는 기계 소리가 이틀 하고도 반나절 동안 끊임없이 들려왔습니다. 거기까지는 참을 만했는데 또다시 며칠에 걸쳐 밭 주변 산자락 저만치쯤에서 예의 그 소리가 정신 사납게 들려왔습니다. 머리 속까지 후벼 파는 그 소리는 이른 아침부터 어둑어둑 해 떨어질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일주일 가까이 한 시도 쉬지 않고 골을 후벼 팠습니다.

그 소리가 잠잠해질 무렵 누군가가 밭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거기 밭 밟지 말고 고랑으로 댕기슈. 근디 뭔 일유?"
"지질조사 하러 왔는데요."
"또 뭔 놈의 지질조사를, 시도 때도 없이."
"여기로 호남고속철도가 지나간다는 거 아시죠? 그거 때문에..."

"그 소린 골백 번도 더 들었슈, 얼마 전에 지질 조사 한다고 관정까지 뚫었구먼, 그나저나 마침 잘 왔슈, 여기저기 관정 뚫겠다며 아무데나 쓰레기 버리고 똥 싸놓구선 제대로 정리도 안 해 놓고 말여, 당신들 이래도 되는 겨!"
"저는 다른 조사 팀에서 나왔는데요."

"다른 조사팀? 조사 다 해놓고 또 뭔 놈의 조사를 한다고."
"전에 왔던 팀하고 경쟁사인데요..."
"그람 얼마전에 관정 뚫은 바로 그 옆댕이에 또 파겠다고?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오는겨! 이 인간들이 개발하는데 아주 환장했구먼! 다들 힘들어 죽겠다는디, 여기저기 까부수는 자금은 팡팡 남아돌아가내벼!"

관정 뚫은 자리. 그 주변이 쓰레기에 똥까지 싸 놓고 가서 너저분했는데 내가 거칠게 항의 하자 나중에 소리소문 없이 다 치워놓고 갔다.또한  세 개 팀이 한 장소에서 따로 따로 관정을 뚫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답변을 내놓으라 했더니 더이상 관정을 뚫지 않았다.
 관정 뚫은 자리. 그 주변이 쓰레기에 똥까지 싸 놓고 가서 너저분했는데 내가 거칠게 항의 하자 나중에 소리소문 없이 다 치워놓고 갔다.또한 세 개 팀이 한 장소에서 따로 따로 관정을 뚫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답변을 내놓으라 했더니 더이상 관정을 뚫지 않았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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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찾아온 지질 조사팀 말고도 또 다른 경쟁사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빼빼 마른 조사원의 말에 의하면 모두 세 개 팀이 각각 관정을 뚫어 보고서를 제출해 입찰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 개 팀 모두가 한 장소에 또 다른 구멍을 뚫어 조사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말문이 딱 막혔습니다. 한 군데에서 관정을 뚫는 데만 이틀은 족히 걸리고 있으니 얼마나 많은 자금이 투입되겠습니까? 호남고속철도가 지나갈 구간 구간에 뚫어야 할 관정은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것도 세 배로 말입니다.

"당신들도 뚫겠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단 조건이 있슈, 저번 인간들처럼 쓰레기 따위를 함부로 버리지 말고 말끔히 청소해 놓고 가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할 것이고, 또 왜 무엇 때문에 세금 낭비해 가며 한 장소에서 세 개 팀이 번가라 가며 관정을 뚫어야 하는지에 대해 충분하게 설명해야 될 거유."
"알겠습니다."
"그러저나 이놈의 공사는 대체 언제 하는 거유, 지난봄인가, 공사를 앞당겨 9월쯤에 착공 한다고 지랄 덜 하더니 도대체 언제 시작한다는 거유, 사람 피 말리게 하고."
"4대강 개발에 자금을 쏟아 붓고 있어서 정확히 언제 착공할지 우리도 잘 모릅니다." 

개발지상주의, 이명박 정부도 개발 앞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날짜를 앞당겨 착공 하겠다고 난리 블루스를 치던 호남고속 철도 공사 때문에 이사 갈 터를 3년에 걸쳐 찾아 헤맨 끝에 겨우 잡아 놔더니 언제 착공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긴 4대강 개발에 미쳐 날뛰는 인간들이 더군다나 표도 안 나오는 호남고속철도를 서두를 이유가 뭐 있겠슈."

공사가 늦어지면 밭에서 살아가는 뭇 생명들과 더불어 당장 쫓겨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좋긴 했지만 새터를 잡아 놓고 이사를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뭔가 사기꾼들에게 된통 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사람살이가 왔다갔다 허는디. 이 이 인간쪼가리들을 그냥 확!"
"저희들이야 뭐 지질조사만 하면 되지만 난감하시겠네요."

두 번째 지질조사 팀이 난감한 표정으로 떠난 지 며칠 후 우리 식구가 출타한 사이에 누군가가 밭 주변에 너저분하게 널린 공사 흔적을 말끔하게 정리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지질 조사팀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세금 낭비해 가며 세 개 팀이 일정한 장소를 정해놓고 왜 무엇 때문에 뚫고 또 뚫고 또다시 뚫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될 거요'라고 했던 내 말에 답변을 내놓기 곤란했던 모양입니다.

어쩌다 보니 벌레 얘기에서 개발지상주의자들 얘기로 빠져버렸군요. 하여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지질 조사팀이 무지막지한 관정 장비를 동원해 땅 속을 뚫어대던 그 무렵부터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농약을 뿌린 배추 모종은 물론이고 농약을 전혀 주지 않은 모종들 또한 멀쩡했던 것입니다(농약을 친 배추 모종은 열댓 포기에 불과 했고 예년처럼 농약을 치지 않은 배추 모종은 3백 포기에 넘었다).

관정을 뚫은 지점하고 배추밭하고의 거리는 불과 10여 미터, 배추밭에는 이상하리만큼 벌레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년 같았으면 배추 모종이 다 크기도 전에 벌레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야 할 것이었는데 다들 멀쩡했던 것입니다(지질조사를 하고 나서 한참 지난후 배추들이 다 자랄 무렵는 배추벌레들이 더러 생기곤 했다).

뭔가 개운치 않았습니다. 찜찜했습니다. 며칠 내내 밭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관찰 해 보았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밭 옆에 파 놓은 둠벙을 지나칠 때마다 물속으로 첨벙첨벙 뛰어 들었던 개구리가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가실 정도로 밭 곳곳을 파헤쳐 놓던 두더지 구멍조차 쉽게 눈에 띄질 않았습니다. 거의 매일 같이 밭 주변에 출근 도장 찍어대듯 했던 고라니 발자국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당벌레도 눈에 띄질 않았습니다. 해충뿐만 아니라 익충조차 눈에 띄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무엇 때문에 사라진 것일까?

문득 스치는 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익충이건 해충이건 간에 그들이 배추밭에서 사라진 것은 일주일 가까이 들려왔던 개발의 전주곡, 관정 뚫는 기계음 소리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디고 무딘 인간인 나조차도 일주일 가까이 들려왔던 그 소리에 머리가 어질어질 하고 속이 울렁거려 도망치고 싶었을 정도였는데 나보다 수십 배, 수백 배나 예민한 곤충이며 동물들은 오죽했을까 싶었습니다. 녀석들은 거대한 해일이 몰려오면 미리 감지하고 자리를 뜬다는 동물들처럼 조만간 고속 철도 개발로 배추밭이 죄 까뭉개 질것을 감지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고속철도가 뚫리기도 전에 새터를 찾아 나섰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종묘상에서 나온 씨앗으로 모종을 내 몇년 만에 꼬갱이가 꽉찬 실한 배추로 김장을 담궜다.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종묘상에서 나온 씨앗으로 모종을 내 몇년 만에 꼬갱이가 꽉찬 실한 배추로 김장을 담궜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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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해충이 사라져 김장도 제대로 할 수 있었으니 잘 됐지 않았나'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지간한 농약에도 끄덕없이 버티는 그 독한 해충들이 사라졌을 정도였으니 그 환경조건이 어떠하겠습니까? 해충이든 익충이든 배추밭의 그들에게는 분명 천지를 집어 삼키는 소리,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배추밭 주변뿐만아니라 산자락 여기저기에서의 관정 뚫는 소리는 그들에게 죽음의 전주곡이나 다름없었을 것입니다. 지질조사는 시작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관정 몇 개 뚫는 소리도 그러한데 온갖 중장비가 동원되는 4대강 개발 현장은 오죽할까 싶습니다. 

누군가는 '농약 몇 방울 주고, 관정 몇 군데 뚫은 것 가지고 4대강까지 언급해 가며 뭔 놈의 호들갑을 그리 떠냐'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 말도 맞는 얘기입니다. 여기 저기 관정 뚫고 산을 죄 까뭉갠다고 못 살 것은 없습니다. 농약을 수없이 살포해도 살아갑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4대강을 죄 파헤쳐도, 그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렇습니다. 비이커 안에서 물이 조금씩 조금씩 뜨거워지는 것도 모르고 죽어가는 개구리는 호들갑을 떨지 않습니다. 비이커 안에서 서서히 죽어갈 뿐입니다.


태그:#사라진 벌레들, #개발지상주의, #호남고속철도, #4대강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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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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