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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동쪽 끝마을 종달교회

 

시골 바닷가 교회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다. 내 비록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도 십자가 앞에 잠시 기도를 드리고 싶다. 그 기도는 나의 구원과 행복을 비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의 평화가 이나마 계속 이어지기를, 이 세상의 아름다움이 이대로 보존되기를 간절히 빌고 싶다.

 

오래 전(2003년) 오마이뉴스 기자가 된 뒤, 이따금 제주 동쪽 끝마을 종달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는 김민수 목사님이 부친 '꽃을 찾아 떠난 여행'이라는 싱그러운 글을 복음처럼 읽으면서 남쪽 바닷가를 그리곤 했다.

 

제주는 내가 본 이 세상 어디보다 아름다운 고장이었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이탈리아 가곡을 배우면서 나폴리의 산타루치아나 소렌토를 지상 최대의 아름다운 곳으로 상상했지만 막상 가보니까 내 눈에는 우리나라 제주 바다보다 못해 보였다.

 

어느 작가(이봉구)가 그랬다.

 

제주 서귀포의 달빛은 혼자 바라보면 안 된다고. 자칫 달빛에 매혹된 나머지 바다에 뛰어들기 때문이라고.

 

그 아름다운 고장에서 보내준 그림(사진)과 이야기들을 김민수 목사님이 <달팽이는 느리고, 호박은 못생겼다?>라는 책으로 엮어 내가 사는 강원 산골에 보내왔다. 틈틈이 책장을 넘기면서 다시 한번 이 세상의 유토피아에 빠지는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겨울 수선화

 

겨울이 한창인 요즘 뜰에는 수선화가 한 아름씩 피었습니다. '그 좋은 계절을 다 두고, 국화마저도 말라비틀어진 추운 계절에 피어날 것은 무엇이람.'… 나비도 벌도 없는 계절에 피어난 수선화를 보니 그들에게는 기나긴 겨울밤의 별빛과 달빛이 어울리고, 겨울비가 그들을 촉촉하게 적셔줄 때의 조화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우리네 사람들의 사고방식 속에 자리 잡은 함정.

 

'이것 아니면 안 된다!'라는 고정관념,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도저히 용납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을 돌아보게 됩니다. 자기의 생각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아도 충분히 세상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 '추운 겨울에 피어나는 수선화'

 

시골목사님은 추운 겨울에 함초롬히 피어난 수선화를 보고 고정관념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들려준 말씀이다.

 

어두울수록 밝음을 더하는 등대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간혹 우리의 삶에 원치 않던 아픔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고, '왜 이런 삶의 풍랑이 나에게만 오는 것일까?'라는 자괴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남들은 다 잘 되는 것만 같은데, 자신의 삶만 억척같이 꼬이고 또 고이는 것만 같을 때, 겨울 등대를 바라보면 삶이란 그런 것이요, 그때 절망하지 않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면 등대의 불빛과도 같은 빛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등대에는 이런 애절함이 묻어 있습니다. 삶의 애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애절함과 애환 속에는 끝없는 희망이라는 파도가 있습니다.

- '제주의 겨울 바다를 지키는 등대'

 

삶에 지친, 경쟁의 대열에서 밀려난 이들에게 주는 향도등과 같은 목사님의 말씀이다.

 

느림의 미학

 

여행은 항공편을 이용하는 것보다 배편을 이용하는 것이 볼거리가 많고, 차편을 이용할 때보다는 도보로 여행할 때 더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천천히 도보로 여행하려고 작정을 하면 많은 짐을 가지고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여행길이 가벼워진다는 것이지요.

 

삶이란 여행길에서도 이러한 법칙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느릿느릿 가면 다 빼앗길 것만 같고, 낙오되는 것 같지만, 빨리빨리 가는 이들이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것들을 만나게 됩니다.

- '달팽이에게서 배우는 삶의 지혜'

 

시골목사님은 밀란 쿤테라가 되어 '느림의 미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얼마 전 나는 배를 타고, 열차를 타고, 안중근 장군의 유적지를 더듬은 적이 있었다. 특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까지는 열차로 40시간에 이르는 인내를 시험하는 먼 길이었다. 하지만 그 여행이 끝났을 때는 그분(안중근 장군)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간 듯한 뿌듯함이 있었다.

 

호박꽃의 아름다움

 

내가 만난 호박꽃은 항상 예뻤습니다. 꽃만 예쁜 것이 아니라 꽃이 지고 난 뒤의 애호박도 예뻤고, 노랗게 늙은 호박도 예뻤습니다. 숭숭 썰어 멍석에 말리던 애호박도 예뻤고, 떡에 넣으려고 빨랫줄에 길게 말리는 노란 호박도 예쁘고, 앙증맞게 생긴 호박씨의 모양새도 예뻤습니다.

 

장님은 앞을 보지 못해서 장님이 아니라 다른 한쪽을 보지 않으므로 장님이요, 벙어리는 말을 하지 못해서 벙어리가 아니라 옳은 것을 옳다, 그릇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못해서 벙어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 '달팽이는 느리고, 호박은 못생겼다?'

 

시골목사님은 객관적인 사실 여부를 떠나 그 본질이 왜곡된 현상을 경계하였다. 나도 강원 산골에서 5년 남짓 텃밭에서 호박을 길러본 바, 호박꽃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는데, 특히 호박 암꽃의 현명함에 감탄했다.

 

호박 암꽃은 이른 아침에 피었다가 수정이 끝나면 곧장 꽃잎을 닫았다. 이 꽃 저 꽃의 수정을 함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야 순결성이 유지되고, 집안이 시끄럽지 않는다는 교훈을 호박꽃에서 배운 바 있었다.

 

이 책에는 제1부 가족, 제2부 자연, 제3부 텃밭으로 모두 57꼭지의 글들이 아침이슬처럼 예쁘게 엮어져 있다. 책속에 담긴 사진들만 들춰도 상큼해진다.

 

이 겨울,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나는 다시 이 책을 펼쳐보리라.

  

덧붙이는 글 | 책이름: 달팽이는 느리고, 호박은 못생겼다?
펴낸곳: 만우와 장공
값: 12,000원 


달팽이는 느리고, 호박은 못생겼다? - 제주의 동쪽 끝 마을 종달리에서 쓴 편지, 개정판

김민수 지음, 만우와장공(2009)


태그:#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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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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