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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조선왕조에서 가장 효성스러운 왕을 꼽으라면 아마도 단연 정조 임금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기록과 남겨진 문화유산의 흔적을 통해서도 능히 정조대왕의 효성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적어도 한 두 해 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TV 드라마 사극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조선왕조 제 22대 임금이었던 정조대왕 <이산>의 지극한 효성을 알 수 있고 배울 수 있다.

 

정조는 불과 열 살의 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한 맺힌 죽음을 목도했다. 그것도 할아버지 영조 임금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무참히 죽어가는 아버지를 지켜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역적으로 몰려 참혹하게 죽은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자신이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고자 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역적으로 남아 있는 한 자신 또한 여전히 역적의 자식일 수밖에 없기에 아버지의 복권을 위해 눈물겨운 효심을 바쳤다.

 

정조는 즉위하면서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지금의 동대문구 휘경동) 기슭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현재의 화성으로 이장했고, 존호를 장조(蔣祖)로 바꾸며 의황제로 추존하였다. 이 후 한 해에도 몇 차례씩 아버지의 능참길에 오르며 갸륵히 눈물짓고 통곡하였다. 그리고 끝내 자신이 죽어서도 아버지 곁에 묻혔으니 정조의 효성은 깊고도 그윽하다.

 

지난 토요일 주말을 맞아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경의왕후)가 합장된 융릉, 정조와 그의 부인(효의왕후)이 합장된 건릉이 있는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화산 기슭으로 동네 꼬마 녀석들과 가을날 왕릉여행을 다녀왔다.

 

융건릉의 능역으로 들어서니 고고하게 뻗은 훤칠한 소나무 숲이 있고, 얼마 가지 않아 두 갈래 사이길이 나타났다. 왼쪽으로 가면 건릉, 오른쪽으로 가면 융릉이다. 아버지 선왕의 무덤을 먼저 찾아뵙는 것이 바른 예법이자 순서이니 우리는 융릉으로 향했다.

 

융릉으로 향하는 길에는 가을날의 처연하고 쓸쓸한 왕릉의 정취가 사무치게도 고스란히 자욱했다. 능역의 입구에 즐비하던 소나무 군락을 지나 걸어오며 느낄 수 있었던 청량함과 상쾌함과는 사뭇 다른 야릇함이 있었다. 굴참나무와 갈참나무, 상수리나무 등 참나무 형제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는 왕릉의 숲은 왠지 슬퍼 보이면서도 찬란히 아름다웠다.

 

참나무(도토리나무) 형제 중 가을날 단풍이 가장 아름답게 물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갈참나무(가을 참나무) 마른 이파리는 붉은색과 갈색의 중간색 정도로 절묘하게 물들어 숲의 허공을 날았으며, 나비의 날개처럼 새의 깃털처럼 추락하여 너른 바닥을 화려하고 두텁게 깔고 덮은 모습이었다.

 

융릉을 향해 걸어가면서 무심코 감상에 빠져 있을 무렵, 아이들은 누구랄 것 없이 낙엽이 수북한 왕릉의 숲으로 돌진하여 뛰어들었다. 아마도 가을 숲이 가진 깊고 화려하며 낭만적인 아름다움에 저절로 매료되었는지 꼬마 녀석들은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간신히 참고 있던 활력의 본능, 생동의 원기가 발동한 것처럼 얼굴에 희열의 미소를 지으며 괴성과 함께 숲의 품으로 안겼다.

 

우리는 모두 함께 낙엽의 숲에 온전히 몸을 맡겨보기로 했다. 왕릉에 왔으니 낙엽으로 덮인 무덤 속에 몸을 묻고 왕이 되어보고, 왕후가 되어보는, 이른바 참나무 숲에서의 무덤놀이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녀석들은 순간적으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집에서 나올 때 엄마가 깨끗이 입혀 보내주신 옷에 혹시 지저분한 무엇이 묻을까, 벌레가 몸속으로 기어 들어오진 않을까 하는 걱정과 우려를 하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녀석들이 보는 앞에서 고목나무가 넘어지듯 뒤로 벌러덩 쓰러졌다. 키 1미터 76에 몸무게 80킬로, 그만하면 작지 않은 덩치의 몸이 수북한 낙엽침대 위로 거리낌 없이 실감나게 쓰러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면 녀석들은 굳이 복잡한 설명을 길게 하지 않아도 다 알아 듣고, 이해 할 거라고 믿었다. 그런 다음 나는 낙엽 위에 쓰러져 누운 채로 아무 것도 부러울 것 없는 편안한 표정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애들아, 나는 낙엽의 무덤 속에 묻힐 테니 숲의 바닥에 깔린 나뭇잎을 마음껏 주워서 내 몸을 수북하게 덮어주겠니? 이제부터 나는 왕이 될 것이다."

 

녀석들은 그제 서야 깔깔거리며 주위의 낙엽을 가슴 한 아름씩 주워 바닥에 누어있는 내 몸 위로 일제히 뿌리기 시작했다. 나는 얼굴만 내민 채 그들이 가져다 덮어주는 낙엽을 포근한 이불 삼아 덮고서 가만히 눈을 감고 쉴 수 있었다. 녀석들은 신이 나서 주변의 낙엽을 모아다가 나를 점점 묻어가고 있었다. 나는 졸지에 낙엽의 무덤 속에 묻혀가고 있는 한 사람이자 초월적 자연에 스스럼없이 동화되어 가고 있는 작고 미천한 우주의 존재로 변해가고 있었다.

 

얼마 후 낙엽을 떨어내고 바닥에서 일어서자 녀석들은 정말 신나고 흥분된 목소리로 떠들며 재미있어 했다. 그리고 누군가 내게 이렇게 제안을 했다.

 

"선생님, 우리 무덤놀이를 제대로 한 번 해요. 그러니까 요즘 유행하는 눈치게임을 해서 걸리는 사람을 눕히고 낙엽으로 덮어 단릉, 쌍릉, 합장릉으로 무덤을 만드는 거예요. 어때요?"

 

"오호! 그래,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야~ 기막힌 생각인데!"

 

깊어가는 가을날 왕릉여행을 오니 아이들의 머리 속에도 평소 발휘되지 못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솟아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기발한 생각임에 틀림없었다. 나와 다른 녀석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들 선뜻 찬성했다. 그리고 곧바로 눈치게임을 시작했고, 술래로 걸린 녀석들은 머뭇거리던 처음과는 전혀 다르게 과감하고 확실한 자세로 낙엽침대 위에 자신의 몸을 눕혔다. 마치 잠자리에 들기 전에 볼 수 있는 편안한 표정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눈치게임이 계속되면서 녀석들은 서로들 자기가 먼저 누워보겠노라며 자원을 했다. 한 녀석이 누우니 다른 친구 녀석이 따라 누우며 합장릉을 만들어 달라고 능청을 떨기도 했다. 또 다른 녀석이 옆으로 따라 누우며 '삼연합장릉'을 만들어 달라고도 했다. 나와 아이들은 낙엽을 한 아름씩 주워서 누워있는 녀석들의 몸을 어머니의 젖무덤처럼 동그랗게 만들어 주었다.

 

왕릉의 숲은 평소 공부에 얽매인 채, 집에서 학교, 학교에서 학원으로 쳇바퀴처럼 도는 건조한 생활에 지친 아이들에게 감수성 놀이터와 다름없었다. 별도의 놀이기구도 하나 없고, '닌텐도' 게임기도 없었지만, 그들을 환호하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 그들을 포근하게 안아주는 화려한 나뭇잎이 수북하게 깔려 있었고, 고스란히 남아있는 우리 역사의 절절한 흔적이 있었으며, 게다가 다정한 친구들과의 아름다운 추억이 있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마음껏 누워 뒹굴고 구르며 뛰어 놀았다. 무덤 속의 왕과 왕비도 될 수 있었고, 자연을 일방적으로 누리기만 하는 객체로서 뿐이 아닌 자연과 내가 한 몸으로 서로 동화되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더불어 무덤놀이를 통해 역사의 흔적으로 남은 사연과 교훈을 자연스럽게 배우고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 흡족하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저물어 가는 해 그림자로 시간을 가늠하며 무덤놀이를 마쳤다. 그리고는 왕릉의 참나무 숲을 나서 비로소 사도세자의 융릉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융릉에 도착하여 홍살문을 지나 참도를 걸었고, 정자각을 둘러보며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장조)를 그리워하며 효심의 정성으로 조성해 놓은 무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화려한 병풍석과 꽃봉오리 인석(引石)을 두른 봉분은 특별한 예우를 받은 양 치장을 하고 있었고, 능 앞에 놓인 팔각장명등은 균형감과 안정감을 갖춘 채 한껏 조형미를 뽐내고 있었다. 추존왕 임에도 불구하고 무인석은 충성스런 모습으로 서 있었으며, 문인석은 금관을 쓰고 있으니 이는 모두 정조가 아버지를 생각함이 얼마나 극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무덤장식의 예술적 소산이라 할 것이다.

 

가을날 왕릉의 숲에 와서 꼬마 녀석들과 낙엽의 무덤 속에 묻혀보는 이색적인 체험을 했고, 정조임금의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사무치게 반영된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는 인상적인 여행을 했다. 겨울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차가워진 바람으로 체감할 수 있는 11월 중순 융건릉 참나무 숲에서의 추억이 오래도록 생생하게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1월 14일 융건릉에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태그:#융건릉, #정조임금, #사도세자, #낙엽, #왕릉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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