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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자전거는 원래 값비싼 오락거리였다. 1890년대 세이프티(Safty) 자전거 가격은 당시 노동자 평균임금보다 10배 정도나 많았다. 그 당시 일본에서도 자전거는 초등학교 교사 연봉보다 비쌌다. 자전거를 탄다는 것은 상류층이라는 상징이었다.

자전거수요가 늘면서 당연히 공급이 늘었다. 가격은 떨어졌다. 1890년대 자전거 대유행기를 거치며 자전거 가격은 이전에 비해 5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자전거는 이제 누구나 탈 수 있는 물건이 됐다.

자전거는 생활수단이 됐다. 자전거로 편지를 배달하고, 쌀을 실어나르며, 장에 가고 출퇴근했다. 물론 자동차시대가 되면서 이 또한 옛날 얘기가 됐지만. 지금 자전거는 생활수단이라기보다는 오락거리로 더 인기다.

20대 여성자전거 애호가가 쓴 <하이힐 신은 자전거>
 20대 여성자전거 애호가가 쓴 <하이힐 신은 자전거>
ⓒ 뮤진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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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을 신은 자전거>는 "여성들이여, 정장에 하이힐 신고 자전거를 타자"고 권하는 책이다. 제목만 놓고 보면 100여년 전 명품자전거 시대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는 오해다. 여기서 하이힐은 일상을 뜻한다.

"나는 한강변 자전거도로를 달릴 때면 하얀색 스니커즈에 간단한 트레이닝복, 그리고 물병과 손수건, 티슈, 머리끈, 캡 모자 등을 넣은 손바닥 두 배 크기의 백팩을 메고 집을 나선다.… 친구들과 약속이 있는 날이면, 간편한 흰색 티셔츠에 라인이 살짝 드러나는 청바지를 입고 7센티미터 굽의 하이힐을 신는다. 그리고 크로스백에 손수건과 기름종이, 파우더와 립스틱을 넣어 어깨에 둘러메고 미니벨로를 타는데, 스니커즈에도 하이힐에도 썩 잘 어울리는 것 같다."-p68

20대인 저자 장치선씨는 H라인 스커트와 하이힐을 즐긴다. 자전거도 좋지만 그렇다고 하이힐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저자는 하이힐 신고 다니는 일상을 그대로 자전거에 포갰다. 일상과 자전거의 만남, 그게 '하이힐 신은 자전거'다.

'하이힐 신은 자전거'는 복장 때문에 차마 자전거에 다가서지 못하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괜찮아'라고 말하는 책이다. 몸에 '쫙' 달라붙는 기능성 옷은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그런 옷을 입지 않으면 왠지 자전거를 못 탈 것 같은 느낌. 글쓴이는 멋을 다 내면서도 자전거를 탈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저기서 '정말?'이라며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자전거대국 중국에선 거의 대부분이 일상 복장으로 자전거를 탄다. 일본에선 양복차림이나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자전거가 생활인 유럽에서도 마찬가지. 우리나라만 유별날 뿐이다. 그러나 자전거가 레저인 우리나라에선 장치선씨가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오히려 도드라진다.

"H라인 스커트를 입고 페달링을 하다가 스커트의 좁은 폭을 잊어버린 채 나도 모르게 허벅지를 쩍쩍 벌려 귀한 치마를 찢어버리곤 한다. 이렇게 찢어진 H라인 스커트를 들고 가면 세탁소 아저씨는 '아가씨, 만날 왜 치마를 찢어 와, 도대체 직업이 뭐야?'라며 나를 놀리곤 한다."-p108

<하이힐 신은 자전거>
 <하이힐 신은 자전거>
ⓒ 뮤진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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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대목을 보고 누군가는 난처한 표정을 지을지 모르겠다. '나는 그럴 수 없어'라면서. 일본 영화 <메신저>를 본 이라면 이 장면이 아주 생생하게 떠오를 것이다.

여성자전거인이 극히 적은 우리나라에서 저자가 20대 여성인 점은 강점이다. 그만 느낄 수 있는 경험과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금껏 자전거책이 거의 모두 남성들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는 땀과 화장이라는 관문 앞에서 주저하는 여성들에게 말한다. 씻는 방법과 자전거에 맞는 메이크업 요령, 옷을 어떻게 준비하면 되는지까지. 요즘 유행하는 스키니진(달라붙는 청바지)이야말로 헐렁거리지 않고 밑단이 길게 내려오지 않아 페달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자전거 타기에 어울린다는 설명까지. 덧붙여 여름엔 땀 흘리면서까지 무리하게 자전거를 타진 않는다고 강조해 읽는 이들을 안심시킨다.

가장 큰 유혹은 몸무게가 줄었다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글쓴이는 자전거를 탄 이후 53킬로그램에서 49킬로그램으로 줄었다고 고백한다. 몸매는 더욱 예뻐졌고, 밥을 먹은 뒤에도 더부룩하지 않다고.

"자전거를 타면 운동 부족으로 흐물흐물해진 허리와 복부,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근육이 골고루 움직이면서 탄력 있는 몸매가 된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움직이면서 지방이 연소되고 근육이 생기기 때문에, 군살이 빠지고 탄탄한 몸매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히프업 효과도 뛰어나다."-p88

생리와 임신기간에 자전거를 타면 되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는 오로지 여성이기 때문에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다. 답은 물론 '된다'이다.

글쓴이는 MBC 원주방송국 리포터를 거쳐 지금은 사내방송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로 일한다. 중앙일보에서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며 자전거 기사 100여개를 썼다.

아쉬운 점은 '하이힐과 스커트'라는 관점에 좀 더 충실했으면 하는 점이다. 자전거용어, 자전거종류, 자전거관련사이트, MTB 해설, 자전거 정비 등은 이미 숱한 자전거책에서 다 다뤄진 내용들이다. 오히려 이 책이 지닌 개성을 갉아먹는다. 이 책에서만이라도 이런 기본정보는 빼고, 주제에 맞는 내용을 좀 더 넣었으면 좋았겠다.

[인터뷰] "제 자전거 명품 아니에요"

자전거에 오른 장치선씨.
 자전거에 오른 장치선씨.
ⓒ 장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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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타는 자전거는? 근사한 명품 자전거?
"아니예요.(웃음) 책을 보고 오해하시는 분들 있는데, 13만 원짜리 자전거예요. '하이힐 신은 자전거'라는 것은 자기 멋을 살리면서 타자는 것이지 명품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 하이힐 신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본 적 있나요?

"중국에 갔을 때인데 자전거를 정말 많이 타더라구요. 놀라운 점은 모두 평상복이라는 것. 멋있진 않았어요.(웃음) 단 일상에서 입는 모습 그대로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무척 편안하게 보였거든요."

-국내에선 없었나요?
"장안평-왕십리 구간을 출퇴근하는 분이 있었어요. 여자분이었는데, 정장에 하이힐 신고 아주 멋을 내고 타시더라구요. 어떤 날엔 메신저백에다 옷이랑 신발 챙겨서 타시구요. 자전거 타면서도 자기 멋을 지키는 분이었어요."

-하이힐 신고 타는 게 정말 불편하진 않은가요?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불편하진 않아요. 도로만 잘 돼 있으면 타는 데 부담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익숙해지면 하이힐 신고 걸어다니는 게 불편하지 않잖아요."

-주변 분들 반응은 어땠나요.
"대놓고 말하는 분들은 '각 잡고 타냐' 그래요. 제가 보기엔 '쫄쫄이'(기능성 옷)를 입고 타는 게 더 각 잡고 타는 느낌이었어요. 저는 일상과 자전거가 자연스럽게 만났으면 좋겠어요. 특히 여성분들이 멋을 포기해야 한다면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자전거를 타려면 꼭 '쫄쫄이'를 입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없애주고 싶었어요."

-여성분들이 좀 더 자전거를 많이 타기 위해서 뭐가 필요할까요.
"도로로 나가기가 굉장히 무서워요. 꼭 전용도로가 아니더라도 안전하다고 느끼게 만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또한 자전거를 타면 아무래도 땀이 나게 되니까 탈의실이나 샤워시설이 있어야겠죠."

-다루고 싶었지만 빠진 내용이 있겠죠?
"그럼요. 정책 얘긴 뺐어요. 워낙 요즘 자전거정책들이 많이 쏟아져나오고 많이 빠지니까 책이 나갈 때쯤이면 또 달라져있을 거 아니예요. 자전거 타면서 듣기 좋은 노래, 메이크업 도구, 자전거 타는 연예인 등도 다루려고 했는데 빠졌어요. 너무 '소녀틱'하다는 반응이었어요. 아쉽죠."

-꼭 강조하고 싶은 말은?
"언론에서 자전거라 하면 꼭 '환경'을 강조하는데, 제 주변에서 자전거 타면서 '야, 오늘도 지구 구했다' 하시는 분들 한 분도 못 봤어요. 환경 생각해서 타시는 분들은 없다는 거죠. 즐기다 보면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고 봐요. 너무 그렇게 강조하면 부담이죠. 즐겁게 자전거 타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 - 스타일리시한 라이딩을 위한 자전거 에세이

장치선 지음, 뮤진트리(2009)


태그:#자전거, #하이힐, #장치선, #스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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