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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MB) 대통령과 그 참모들이 태평양 상공을 나는 전용기 안에서 G20 개최국 결정을 자축하는 만세삼창을 불렀던 추억이 뇌리에 오래 남은 탓일까? MB와 청와대 참모들은 11월을 자화자찬(自畵自讚)의 달로 설정한 모양이다.

 

11월의 첫 주를 여는 2일 아침, 이명박 대통령은 제27차 라디오 연설을 했다. 국정운영의 방향을 설명하는 대국민 연설이다. 이어 오전 국회에서는 정운찬 총리를 내세워 '2010년도 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안 제출에 즈음한 시정연설'을 대독케 했다. 국민에게 내년 예산안의 운용기조를 설명하고, 국회의 예산안 심의 협조를 구하는 연설이다.

 

두 연설을 관통하는 일관된 메시지는 '자화자찬'이다. 라디오연설의 경우, 국민이 불안해하는 신종인플루엔자에 대해서는 단 네 줄을 언급했을 뿐이다. 나머지는 최근 해외순방에서 만났던 외국 대통령들과의 추억담이다. 이를테면 "누구와 형동생을 맺었고, 누구와 사이좋게 지냈고, 앙코르와트 사원에 가서 어떻게 놀았고 하는 내용이다"(우상호 민주당 대변인).

 

MB 라디오연설은 자화자찬의 극치

 

그러니 "자화자찬으로 일관하는 대통령의 라디오연설, 이제는 정말 신물이 난다"(박선영 선진당 대변인)거나 "들으면 들을수록 질리는 자기자랑 아니면 자기최면으로 가득찬 연설"(우위영 민노당 대변인)이라는 독기 서린 논평이 나올 법하다. 굳이 야당의 논평을 빌리지 않더라도 '역대 라디오 연설 중에 최악의 연설'이다.

 

MB의 라디오연설은 1930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노변정담'(爐邊情談)이라는 라디오연설을 통해 국민과 함께 경제 대공황을 극복한 것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 10월 19일 MB의 라디오연설 1주년을 맞이해 "라디오연설을 통해 국민의 뜻이 하나씩 성취되어가고, 대통령과 국민의 소통을 통해 화롯가처럼 따뜻하고 훈훈한 노변정담이 꽃 피길 기대한다"(조해진 한나라당 대변인)고 한 논평은 지난 1년 동안 전파만 낭비한 일방적 라디오연설과 상충된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4대강, 세종시, 신종플루, 용산 참사, 전세대란, 실업난 등 국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도 MB는 이런 현안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한가하게 외국에 가서 정상들과 나눴던 뒷담화와 자화자찬으로 노변을 가득 채웠다. 국정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국민들의 협조가 왜 필요한지에 관한 진정성 있는 정담은 귀를 씻고 들어도 찾을 수 없다.

 

그뿐이 아니다. '2010년도 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안 제출에 즈음한 시정연설'은 제목 그대로 대통령이 내년도 예산을 국회에 보내면서 그 예산을 '이렇게 쓰겠다' 하는 계획을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에게 밝히는 행위이다. 그러나 시정연설 역시 아무리 낯에 철판을 깔아도 차마 국회의원들 면전에서 자기 입으로 하기는 쑥스러워서 총리가 대독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자화자찬의 극치다.

 

 

'총알받이 방탄총리' 뒤에 숨은 비겁한 대통령

 

우선 형식이 문제다. 대통령이 해외에 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요즘 유행하는 신종플루에 걸린 것도 아닌데, 더구나 경제위기 속에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면서도 국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대통령 이름으로 된 연설을 국무총리에게 대신 읽도록 한 것은 쌍방향의 대화나 토론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라디오연설처럼 일방적이고 국민을 우습게 아는 행위다.

 

내용은 더 문제다. 지금 정치권의 최대 쟁점은 세종시 문제이다. 2일 발표된 한겨레-리서치플러스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절반이 세종시를 원안대로 또는 확대해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일 만큼 찬반 여론이 팽팽한 사안이다. 그런데도 글자수 8825자에 1952개의 낱말을 사용한 원고지 50매 분량의 시정연설에서 정작 세종시 문제에 대한 언급은 세종시의 '세' 자도 찾을 수 없다.

 

이런 형식과 내용을 종합하면, 결국 대통령은 '국가 백년대계'를 앞세워 고상한 척하면서 '총알받이 방탄총리'를 내세워 자신은 그 뒤에 숨는 비겁한 행위이다. 이는 MB가 세종시가 들어서는 충남 공주-연기 국회의원인 심대평 전 자유선진당 대표를 총리로 기용하려다가 여의치 않자 역시 같은 지역 출신인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총리로 기용한 의도가 세종시 문제 돌파를 위한 꼼수였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정국 최대 현안에 대해 전면에 나서지 않고 국무총리를 시켜 세종시 원안의 백지화 또는 대폭 수정을 획책하는 대통령의 비겁한 모습은 의원들의 연설 방해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시정연설을 마치는 '허수아비 방탄총리'의 모습만큼이나 꼴불견이다. 국정감사 때는 관행임을 내세워 국정감사 출석을 거부하고 여기저기 인사를 다녔던 총리이기에 그의 꿋꿋함은 자조적이다.

 

대통령의 국회 기피와 대독총리는 독재시대의 관행

 

사실 총리가 국회의 국감 출석을 거부하고, 대통령이 의회 시정연설을 거부하고 대독총리를 내세운 것은 모두 독재시대의 관행이다. 새로운 정치의 시대를 열겠다면서 의회를 경원시하는 독재시대의 관행을 고집하는 것은 국민을 무시하는 독재자의 길을 가겠다는 오만과 독선의 발로일 뿐이다.

 

탱크와 총칼로 의회를 짓밟아야만 독재자인 것은 아니다. 전두환 장군은 탱크를 앞세워 국회를 해산했지만,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유신헌법으로 꼭두각시 유정회를 만들어 의회를 무력화시켰다. 독일에서 일당독재를 실현한 아돌프 히틀러도 합법적인 운동으로 민주공화제를 붕괴시켰다.

 

독재자인 이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국민의 대표인 의회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는 거추장스런 필요악일 뿐이다. 그래서 의회 출석이 불가피할 때도 대학총장 출신의 대독총리나 방탄총리를 내세워 의회를 멀리하고 국민의 쓴소리를 듣지 않았다.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독재시대의 관행을 고집하지 말고 전면에 나서야 한다. 더는 '백년대계'의 고상함 뒤에 숨지 말고, 국민을 설득할 자신이 있으면 국민투표에 붙여서라도 세종시 문제의 혼란에 아퀴를 지어야 한다. 국민은 방탄총리 뒤에 숨는 비겁한 대통령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태그:#자화자찬, #라디오연설, #시정연설, #방탄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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