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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일수없이 수 많은 밤을
내가슴 도려내는 아픔에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동백꽃잎에 새겨진 사연,
말못할 그 사연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기다리는 동백 아가씨
가 신님은 그 언제 그 어느날에
외로운 동백꽃 찾아 오려나
<동백꽃 아가씨>-이미자 노래
아가씨
▲ 동백 아가씨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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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그리고 벽 속의 여자

창을 열자 거기 바다가 있었다. 영숙은 살갗에 스며드는 찬공기를 느끼며 서 있었다. 깊은 숨을 들이쉬자, 해풍이 폐부 깊이 스며들었다. 가슴 속에 얼음 먼지가 와 박힌 듯 싸아 했다. 이제 봄이고 고작 첫 계절이 지나가고 있을 뿐인데, 한 해의 석달은 참 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래의 죽음으로 스산한 이 겨울이 가는 것을, 해안가에 뚝뚝 모가지 날리는 동백꽃의 낙화가 말해 주고 있는 듯 했다. 영숙은 근 3년만에 찾아온 유달희로 인해 기분이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영숙은 환기 시키기 위해 연 창문을 거칠게 닫았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려고 잔을 꺼내고 설탕 프림을 꺼냈다. 그런 영숙의 손놀림은 그러나 재빠르고 단정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피아노 치는 여자의 손가락을 연상시킬 만큼 길었다. 어린 시절부터 손이 예쁘다는 소리를 들어왔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하루도 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녀는 달그락 소리를 내며 커피 잔을 쟁반에 바쳐 들고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공간은 벽 속의 방이었다. 겉으로 보면 벽이었다. 그러나 싱크대 옆의 벽은 모두 칸칸이 가로 질러진 공간이었다.

그 벽속의 방은 레지들의 방이었다. 그 비어 있는 방 세개 중에 하나가 영숙의 공간이었다. 그녀의 방은 아무런 장식도 아무 것도 없는 빈방과 같았다. 입고 벗는 옷을 걸수 있는 행거 하나와 책상 위에 모니터가 큰 구형 컴퓨터 한대, 그리고 몇권의 책들과 공책...그게 다 였다. 그 책상 위에 액자 사진 속의 유달희와 그녀가 함께 나란히 어깨를 껴안고 웃고 있었다. 영숙은 그 액자 사진을 집어 책상 서랍에 넣었다. 그녀는 그 사진을 몇번이나 찢어버리려고 했던가. 그러나 영숙은 차마 그 사진을 찢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잔
▲ 바다의 잔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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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에 자크가 있다면 열어보이고 싶어요
내가 얼마나 그대를 사랑하고 있는지
만나면 할 말은 없어지고
내가 얼마나 그대를 그리워 해왔는지
이야기 할 수 없으므로
그 답답함처럼 그대 앞에서 일어나 돌아가버리지만,
그러나 그대 사랑이란
말로 표현 되지 않는 그 느낌
당신이 이 마음을 느끼기 바랄 뿐이에요.
-영숙의 일기 중

동백꽃 아가씨
▲ 인동의 동백꽃 아가씨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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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하늘 같다가도 만나면 백지 같은 여자

"우리 다시 시작하자. 난 너를 이대로 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할 수 없어....내가 결혼해도 너가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거니 ? 난 너의 솔직한 마음을 알고 싶어 오늘 이렇게 찾아 왔어. 지금이라도 너가 결혼하지 말라면 안할거야."
"...결혼 하세요. 난 당신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이 진심이야. 난 너를 모르겠어. 날 사랑하잖아 ? 왜 날 잡지 않지 ? 다른 여자들처럼 울면서 매달려보란 말이야."
"... 난 결혼에 자신이 없어요. 아니 난....난 누구하고도 결혼은 하지 않을 거에요."

"왜 ? 왜 나하고 결혼을 할 수 없다는 거지...또 동생 때문에 ? 동생들은 내가 책임진다고 했잖아 ?"
"내 동생을 왜 당신이 책임져요. 싫어요. 난 ...결혼 하세요. 당신에게 나보다 그 여자가 어울려요. 난 당신과 어울리지 않아요.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 정도는 당신 어머니 말씀처럼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우리 어머니 때문에 결혼을 안하겠다는 말이야 ? 우리 어머니와 결혼 하는 게 아니잖아 ? 원하다면 난 어머니를 버리고 너를 택할 수도 있어. 난 너를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어..."
"무슨 의무요 ?"

"그걸 내 입으로 꼭 말해야 하나 ? "
"그런 의무감으로 나와 결혼해서요. 우리가 행복할 수 있겠어요 ?"

"그래. 난 행복할 수 있어. 정말 너라는 애는 만나면 도대체 알 수가 없어. 헤어져 있으면 너를 가장 잘 알 거 같은데 막상 만나면 넌 항상 이런 식이야. 우리가 헤어진 것은 너의 이런 태도 때문이란 거 너는 알아 ? 날 원망하지 마. 나도 너에게 지쳤어."
"그러니까 찾아오지 마세요."

잔
▲ 바다의 잔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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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미스 정 ! 미스 정 ! 방에 있어 ?"

강마담이었다. 그녀의 음성은 여느날과 다르게 목소리가 탁했다. 그리고 그녀는 벽 속의 방, 그 잘 눈에 띄지 않는 방문고리를, 왈칵 잡아 당겼다. 그러나 영숙은 방문 여는 소리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아까 그대로 등을 진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수연아, 너 대체 어떻게 된 거니 ? 핸드폰도 받지 않고... 라면 사러 간다더니...정말 너는 다 좋은데 가끔 내 피를 말린다...말려...이런 널 왜 도선장이 그렇게 목을 매다는지...도대체 도선장 핸드폰은 왜 받지 않은 거니 ? 누굴 만났니 ? 너 도선장이 널 여기서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 자 이거 받아."

강마담은 3년 동안 한번도 부르지 않았던, 영숙의 진짜 이름을 무의식적으로 불렀다. 그러나 영숙은 유달희의 생각에 깊이 빠져서, 강마담이 자신이 꼭꼭 숨긴 이름을 부르는 것을 의식 하지 못했다. 강마담은 핸드백에서 흰봉투를 꺼내, 영숙 앞에 집어 던졌다. 영숙은 그제야 강마담이 던진 흰봉투를 희끗 쳐다 보며 말했다.

"이게 뭐에요 ?"
"뭐긴 뭐겠니 ?"

영숙은 마담이 건네 준 흰봉투를 열었다. 꺼내보니 10만원짜리 수표 열장이었다.

"아니 언니 ! 이건 돌려주라고 했잖아요. 왜 이걸 다시 받은 거에요."
"난 모르겠다. 니가 직접 돌려주어라. 아무리 줘도 안 받겠다는데 난들 어떻하니 ? 그건 그렇고 너 두 눈 감고 도선장 마음 좀 받아 줘라....티켓도 안 끊겠다. 그렇다고 너가 돈을 벌어 놓은 것도 아니고 계속 이렇게 돈을 빌려 동생들의 뒷바라지로...빚 갚다가 노파가 될 거야 ? 정말 한심하다. 한심해... 내가 오늘은 아침이지만 너에게 한 마디 해야 겠다. 도선장이 어디가 어때서 그래 ? 말없고 나이도 듬직하고 그만하면 널 고생시키지 않을 거다. 못 이기는 척 넘어가는 것도 여자 매력이야...이것아 !"

"언니, 제발 도선장 도선장...그만 하세요. 그리고 난 그 사람 싫어요. "
"싫으면 어쩌겠단 소리니 ? "

"제발... 언니...나 좀 내버려두시면 안돼요."
"야, 내가 다 너를 위해 하는 소리야. 도선장이 어디가 어때서 싫다는 거냐 ? 그 나이에 널 생각하는 마음 보면 모르겠니? 그렇게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남자 도시락 싸가지고 구하려 해도 구하기 힘들다... 넌 도선장이 불쌍하지도 않니 ? "

세상 눈치 빠른 강마담은 영숙의 방에 이부자리가 깔려 있지 않은 것을 보며,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너... 그 남자 만났니 ? 너...미쳤구나...그 사람 어머니한테 그렇게 당했으면 정신 차려야지...흥 ! 사랑 ! 이 맹추야, 너는 사랑 타령하다가 니 인생을 망칠거야..."
"언니...제발....제발.......흑흑흑..."
영숙의 입에서 봇물 같은 오열이 터졌다.

<계속>


태그:#바다의 잔,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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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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