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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스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인 김유신씨
 블루스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인 김유신씨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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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음악요?"
"블루스요."

그가 음악을 작곡하는 기타리스트라고 말했을 때 거침없는 말투에 꺼칠한 수염, 봉두난발한 머리채를 보면서 록커일 것이라 짐작했다. 있는 힘껏 고음을 내지르는 록 음악도 아니고, 그것이 글쎄, 블루스 음악이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황당했다.

"블루스라구유?"
"예, 블루스요. 춤추는 그 블루스가 아니고요..."
"그럼 어떤?"
"롹 음악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블루스요."
"아, 그 블루스요."

블루스를 잘 알고나 있다는 듯 대충 얼버무려 넘겼지만 찜찜했다.

"사실 블루스에 대해 잘 몰라요. 그냥 춤추는 블루스 줄 알았다니께요."
"대부분 그렇게 알고 있어요. 카바라에서 춤추는 블루스쯤으로요."
"신촌 블루스 할 때 그 블루스라는 거죠?"
"신촌 블루스 할 때 그 블루스가 맞긴 한데요, 본래 블루스는요..."

오래 전 <오마이뉴스>를 통해 블루스 음악에 대한 몇 편의 기사를 올리기도 했다는 김유신씨. 본래 블루스 음악은 흑인 노예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담아 노래하면서 시작된 것인데 그들의 희로애락이 잘 표현된 최초의 대중음악이라고 한다. 록 음악의 저항적인 기질 또한 바로 이 블루스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작년 이맘때 낯익음과 낯설음이 교차했던 그 이름, 블루스 음악과 함께 김유신씨(45세. 블루스 음악 작곡가. 기타리스트)를 처음 만났다. 내가 살고 있는 계룡산 갑사 부근으로 이사와 이웃사촌이 되었고 그가 작곡 작사한 노래와 현란한 전자기타 연주에 푹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는 보면 볼수록 대책 없는 인간이었다. 물질적으로 가진 게 쥐뿔도 없으면서 사는 것에 대해 겁이 없었다. 가진 게 없었지만 쩨쩨하게 살지 않았다. 배짱이 맞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나마 자신이 가진 재산이라 할 수 있는 전자기타도 아낌없이 내주었다.

현란한 전자기타 솜씨를 자랑하는 김유신씨. 일상을 노래하는 그는 가족과 이웃들 그리고 세상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현란한 전자기타 솜씨를 자랑하는 김유신씨. 일상을 노래하는 그는 가족과 이웃들 그리고 세상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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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게 사람과 음악적 배짱이 전부라 할 수 있는 김유신씨. 그 사내의 음악 블루스는 일상을 노래하고 있었다. 가족을 노래하고 이웃을 노래하고 싸가지 없는 정치꾼들을 뒤틀어 꼬집고 세상의 아픔을 노래 부르고 그 세상에 속해 있는 자신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었다. 고 김남주 시인의 시 '아이고! I Go!'에서 영감을 받아 그 일부를 인용해 만든 노래, '날마다 날마다'와 같은 노래가 그것이다.

1절-차에 깔려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날마다 날마다 죽음이다./ 공부못해 죽고 취직 못해 죽고/ 날마다 날마다 죽음이다/바른말해 죽고 빚더미에 죽고/날마다 날마다 죽음이다/시도 때도 없이 죽음이다 /세상은 온통 공동묘지//그런데 제살길만 찾아가는 내 인생도 죽음이다./

2절-꿈 때문에 살고 자식땜에 살고/ 날마다 날마다 살아간다./사람 믿고 살고 사랑믿고 살고/날마다 날마다 재미난다./ 꿈 때문에 살고 공부못해 죽고/자식땜에 살고 빚더미에 죽고/ 날마다 날마다 헤깔린다./ 시도 때도 없이 지랄이다./ 세상아 대체 왜 그러니/그런데 제 살길만 찾아가는 내 인생도 지랄이다 지랄이다./

그는 본래 민중운동의 방편으로 음악을 시작했다. 한때 문화운동가로서 노래패에서 활동하면서 파업이나 시위 현장을 찾아다니기도 했고 대전·충남 민예총 음악분과장을 맡아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그에게 음악은 즐기는 음악이라기보다 가치 있는 일이었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기에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그는 민중운동이 잦아들던 90년대 초반부터 새로운 음악에 대한 고민에 빠져 들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대전에는 '노래로 그리는 나라'라는 소리패가 있었는데 그게 해체되고 96년도에는 '느티나무'라는 공연 팀이 결성되면서 민중가요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지요."

그때 그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변했다는 따가운 눈총과 마주 대해야 했지만 나름대로 민중음악이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민중음악에서 비껴나와 대중음악 속으로 들어갔고, 민중음악에 가치를 두었던 활동가로서의 전문성을 갖춘 작곡가로 거듭나기를 원했다.

"새로운 형식의 음악을 하고 싶은 욕심에서 대중음악을 시작했는데 거기에 건강한 내면세계를 가진 음악, 블루스가 있었던 겁니다. 블루스 음악을 접하다보니 대중음악과 민중음악을 분류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블루스는 세상의 모든 민중음악, 대중음악을 품고 있으니까요."

그가 모델로 삼은 인물은 '밥 말리'라는 전설적인 레게 가수라고 한다.

"음악으로써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깨우치고 미래에 대해 듣게 할 수는 있다"고 말하면서 음악의 운동적 가치를 확신했던 밥 말리. 그의 노래는 자메이카의 국가가 되었고, 혼란의 시대에 이정표를 마련해준 범 아프리카 음악으로 널리 알려져 오고 있다.

그는 밥 말리와 같은 음악을 꿈꾸며 국악을 새롭게 만났고 한 때는 민족음악협회의 제안을 받아 가수 신대철,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 등과 함께 청소년 음악캠프를 꾸려 나가면서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힙합에 국악의 만남을 시도하기도 했다. 청소년 음악 캠프를 접고부터는 대전에서 몇몇 후배들과 함께 5인조 밴드를 구성해 녹음실을 운영하면서 술독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녹음실을 운영한답시고 술독에 빠져 지내다보니 몸이 상하게 되었고 거기다가 가족들과도 멀어지게 되고 생활이 엉망진창이 되더라구요. 작곡한 노래도 제대로 정리 못하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녹음실을 접어버리고 무작정 시골 빈집을 찾아 다녔죠."

작곡에만 전념하기 위해 1년여 동안 시골 빈집을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갑사 부근에서 다 쓰러져 가는 카페를 만난 것이었다. 지붕에서 빗물이 줄줄 샐 정도로 오랫동안 방치해 놓아 폐가나 다름 없었던 카페였다. 계약 기간 3년이 지나면 쫓겨날지도 모르는 판국인데 직접 망치를 들고 지붕에 기어 올라가 비바람 막고 때우고 덧대 2층에 살림방을 앉혔고 아래층은 블루스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근사한 카페로 꾸몄다.

빗물이 줄줄 새는 다 쓰러져가는 카페를 수리해 '나무 블루스'라는 간판을 내걸고 블루스 음악 작곡에 몰두하고 있는 김유신씨.
 빗물이 줄줄 새는 다 쓰러져가는 카페를 수리해 '나무 블루스'라는 간판을 내걸고 블루스 음악 작곡에 몰두하고 있는 김유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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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몇 개월에 걸쳐 가진 거 툴툴 털어 새롭게 꾸민 카페는 영업집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음악 작곡실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외진 곳이라 개업한 지 1년 가까이 된 지금도 여전히 손님이라고 해봤자 하루에 한두 사람 찾아올까 말까 한다. 어쩌다 손님들이 우르르 몰려들기도 하는데 평소 알고 지냈던 지인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는 손님이 있건 없건 거의 매일 같이 저녁 시간이 되면 전자기타를 연주해가며 자신의 노래를 만들고 있다.

"본래 음악 작곡에 몰두하려고 시골집 찾아 다녔으니까요.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와도 좋고 안 와도 좋아요. 손님이 찾아오면 살림에 보탬이 돼서 좋고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내 음악에 몰두해서 좋으니까요."

그에게는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 휘연이와 유치원에 다니는 딸 세연이가 있다. 복지사 일까지 접어두고 대책 없는 남편 따라 시골생활을 시작한 아내 최낭숙씨는 텃밭 일구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사회 복지사 일을 접어두고 음악하는 남편 따라 무작정 시골에 들어와 텃밭 가꾸는 일에 푹 빠져 지내는 최낭숙씨. 난생 처음 시작한 배추 농사를 망쳤다고 한다.
 사회 복지사 일을 접어두고 음악하는 남편 따라 무작정 시골에 들어와 텃밭 가꾸는 일에 푹 빠져 지내는 최낭숙씨. 난생 처음 시작한 배추 농사를 망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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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 뜸한 산골 외딴집 생활을 군소리 없이 받아들인 그녀는 음악에 빠져 사는 남편에게 돈 벌어 와라 닦달하지 않는 착한 아내다. 요리학원 문턱에도 가보지 않았지만 가족들에게내놓듯 정성 담긴 상차림으로 카페 주방장 일을 거뜬히 해내고 있다. 그녀에게 찾아오는 손님들이 별로 없어 생활이 어렵지 않냐 물었더니 그 대답이 부창부수다.

"차 마시러 오는 손님들이 없는 날이 더 많아요. 토요일 일요일에도 없는 날이 많아요. 월요일 금요일도 거의 없고, 그러고 보니까 화 수 목도 별로 없네요. 그래도 뭐 살만 해요."

손님 없는 날이 더 많은 카페지만 그렇다고 조바심 내지 않는다. 본래 비어 있던 카페가 아니었냐고 반문한다.

그에게 있어서 아내는 자신의 노래 가사처럼 '힘든 일 있어도 웃음으로 넘기는' 고맙고 미안한 아내다. '나무'라는 카페 이름이 그러하듯 가족들에게 아낌없는 주는 나무다. 그가 아내와 아들과 딸을 대상으로 만든 가족 노래 '너를 보고 있으면'에 잘 담겨 있다.

1절-너를보고 있으면 그냥 화가나/너를보고 있으면 정말 화가나/살겠다고 부대끼고 성실하게 살다보면 좋은날 있을거라고/소주한 잔 부딪히며 허허웃는 착한사람/
2절-너를보고 있으면 정말 미안해/너를보고 있으면 괜히 미안해/신호등은 안지켜도 당당하게 행복하게/살라고 공부하라고/사람없는 학교에다 처박아서 미안해/
3절-너를보고 있으면 그냥 고마워/너를보고 있으면 정말 고마워/하루에도 열두번씩 넘어지고 쓰러지는 /나에게 뽀뽀해주며 /생글생글 웃어주는니가 있어 고마워/생글생글 웃어주는 니가있어 다행이야/생글생글 웃어주는 니가있어 고마워 /

한동안 서울을 오가며 젊은 뮤지션들 즐겨찾는 홍대 앞 라이브 카페 '빵'에서 자신의 노래를 선보이기도 했던 블루스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인 김유신씨. 요즘은 그 일도 다 접어두고 새롭게 5인조 밴드' 나무 블루스'를 결성해 그동안 모아놓은 곡들을 다듬어 조만간 작은 공연을 열 예정이다.

그의 노래에 대한 평가는 듣는 사람들의 몫이겠지만 그는 내게 일상을 걸림 없이 노래하는 음유시인으로 다가온다. 그의 노래, 블루스는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그의 뛰어난 기타 솜씨 만큼이나 자유롭다. 직설적이고도 거침없는 그의 말투만큼이나 투박하고 통속적이다. 단순하다. 그 단순함 속에는 깊은 맛이 있다.

"노래에만 몰두할 수 있어 좋겠슈."
"노래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있죠."
"그게 뭔디유?"
"아들, 딸내미하고 노는 거요. 그게 더 재미있습니다."

하루에 한 두사람 올까 말까한 손님 발길 뜸한 산골 카페에서 텃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김유신씨네 가족.
 하루에 한 두사람 올까 말까한 손님 발길 뜸한 산골 카페에서 텃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김유신씨네 가족.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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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일상의 노래, 블루스를 노래할 수 있는 것은 힘든 산골생활 마다하지 않는 착한 아내와 아들딸이 있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는 가진 게 없지만 그런 사랑스러운 가족이 있고 블루스 음악이 있기에 생활이 두렵지 않은 것이다.

그 두려움 없는 일상의 노래 속에는 뼈아픈 세상이 담겨져 있다. 산 속에 틀어박혀 있지만 블루스 음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가고 있다. 불의에 항거하는 촛불 집회 현장은 물론이고 파업현장 속에서 노래하고 있다. 다만  호소력 짙은 민중가를 불렀던 예전과는 달리 일상의 노래 블루스를 부르고 있다.

그는 오늘도 손님 발길 뜸한 카페에서 노래하고 있다. 밭일을 하던 흙발로, 망치질 하던 손으로 혹은 장작을 패던 뭉뚝한 손으로 전자 기타를 현란하게 연주해 가며 노래하고 있다. 늘 그래왔듯이 고집스럽게 자신이 만든 노래를 부르고 있다. 몰상식이 상식이 되고 있는 팍팍한 세상살이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법한 그런 일상의 노래 블루스를.


태그:#블루스 음악, #블루스 작곡가 김유신, #기타리스트, #나무 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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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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