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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의 춘당지 일대를 둘러 본 다음 일행은 식물원의 대온실로 향했다. 동행했던 환경운동연합의 염형철 국장은 생각보다 "이곳 고궁에도 환경 파괴가 심한 것 같다"고 했다.

                   

철로 만든 대형 나무 지주대가 나무의 성장을 막고 있는 것은 물론 보기에도 흉했다. 또한 흔히 중국매미로 불리는 중국산 벌레도 나무 곳곳에 서식을 하며 나무를 괴롭히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많은 종의 나무가 있어 공부에는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산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백송을 보았고, 산수유, 떡갈나무와 극상의 숲에 자란다는 서어나무 등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식물원 대온실은 이름은 대온실이지만, 사실 규모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일본 동경의 신주쿠 교엥 대온실 같은 큰 규모에 익숙한 나에게 창경궁 대온실의 감흥은 크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많은 종류의 식물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화분이 많았고, 작고 귀여운 식물들이 각각의 이름표를 달고 모양을 뽐내고 있었다. 일반인들의 집에서도 2~3개 정도는 있는 작은 화분이 앙증맞고 좋았다. 온실 내부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기도 하고 외부 분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가을 단풍과 함께 하는 대온실을 바깥에서 보고 있자니, 어디 외국에 나와 산책을 하는 기분이다. 특히 분수대 주변 풍광은 유럽 어느 나라의 왕실정원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흔히 식물원은 식물자원의 보고라고 한다. 공원은 자연을 그대로 유지 보존하는 곳이지만, 식물원의 경우 식물을 발굴하고 유지 보존하는 곳이라 종의 다양성과 양적인 숫자에서 월등하다고 한다.

                

이곳 식물원도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을 볼 수 있는 즐거움을 주었다. 온실을 둘러 본 다음 뒤편 관덕정으로 갔다. 인조임금 때 지어진 정자로 활쏘기, 군사훈련과 무과시험을 치르던 곳이라고 한다.  

             

정자 뒤편 단풍이 장관이었다. 잠시 앉아서 쉬면서 정자 사방의 단풍을 감상했다. 사방의 단풍이 마치 액자 속에 들어 앉아 그림 속 단풍을 감상하는 듯 좋았다.

 

좀 더 뒤쪽으로 가면 문묘와 성균관으로 향하는 문인 집춘문이 있지만, 출입이 통제되어 갈 수는 없다. 이제 길을 돌아 뽕밭과 채소밭을 관리하던 관청이 있던 내농포 터를 지나 현재는 창경궁 관리소 문으로 쓰이는 월근문을 둘러본다.

 

정조임금이 현재의 서울대학병원 북쪽 박석고개에 부친인 사도세자를 추모하는 사당을 지은 다음 그곳 행차를 편리하게 하기 위해 월근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한 달에 한 번씩 부친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이 문을 넘었다고 전한다.

 

이제 일행들은 종묘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입구에서 보자면 홍화문을 통과하여 왼쪽으로 길을 잡아 먼저 궐내각사 터를 둘러본다. 왕실의 군사업무를 맡아 보던 도총부가 있던 곳으로 일제는 이곳에 동물원의 축사를 두기고 했었다.

                 

이어 요즘의 천문대라고 할 수 있는 관천대로 이동한다. 관천대 옆에 아주 오래된 고목이 기둥만을 남기고 죽어있는 모습이 애처롭기는 하지만, 이 지역은 세자인 동궁이 살던 곳이다.

 

원래 하나였던 관계로 창덕궁의 낙선재 일대와 이곳 관천대 주변은 동궁인 세자가 공부도 하고 거처하면서 정무를 보던 곳이다. 현재는 관천대가 남아있고, 담장 넘어 창덕궁에 낙선재가 남아 있다. 담장 넘어 낙선재에는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 이방자 여사 등이 기거하기도 했던 곳이다.

 

창경궁은 역사적으로 많은 아픔이 남아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등으로 화재를 당하기도 했고,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조임금 재위시기에 이미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이 경내에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조선이 망한 직후인 1911년 그 이름마저 창경원으로 격하당하여 놀이공원으로 바뀌었다.

             

아울러 종묘와 연결된 부분에 도로가 개설되어 그 맥이 끊겼다. 1983년부터 3년간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하여 어느 정도 정비가 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많은 전각이 복원되지 못한 상태이다.

 

최근 서울시가 종묘와 연결된 도로를 지하화하고, 상층부를 복원하여 종묘와 자연스러운 연결을 준비하고 있다니 기쁜 소식이다.

 

아무튼 창경궁은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조선왕실의 궁궐의 모습과 왕실의 생활상을 느낄 수 있는 체험장으로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일행은 종묘로 이어지는 화장실 앞에서 비를 만난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비가 시작되는가 보다. 이곳에서 기념촬영을 한 다음 종묘로 향한다.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왕실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에 반드시 국가의 수도에 세워야 했고, 그 위치나 형식 등도 따라 규정을 두고 정해져 있다.

 

현재는 종묘는 조선의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다음 지어진 것이다. '궁궐의 왼쪽에는 종묘를 오른 쪽엔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는 유교의 예법에 따라 경복궁을 기준으로 좌우측에 종묘와 사직단이 자리를 잡고 있다.

 

현재의 종묘는 임진왜란 이후인 1608년 중건된 것으로 임금이 승하는 하는 시점에서 수차례 건물 규모를 늘려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중심이 되는 건물은 정전과 영녕전이다. 정전 19칸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가 있고, 영녕전 16칸에는 34위가 모셔져 있다.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과 광해군의 신위는 이곳에 없다.

 

한편 종묘는 지난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종묘 제례 및 종묘 제례악은 2001년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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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창경궁, #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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