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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시대, 왕이 죽으면 그의 곁에 있던 여인들은 어찌 되었을까. 왕의 정비였던 여인은 그대로 궁에 남아 대비가 되거나 하겠지만, 후궁이나 승하한 왕과 인연이 되어 있던 여인들은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야 했다. 남편과 자식이 없는 궁의 여인들은 대부분 출가를 하게 되는데 그렇게 왕실의 여인들이 출가하여 머물던 곳이 '정업원'이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후궁뿐만 아니라 왕실의 친인척 여인들도 머물면서 여승이 되거나 신도가 되어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원래 정업원은 도성 안 궁궐 가까이에 두어 왕실의 여인들이 왕래하기 쉽게 했다고 한다.

 

정업원의 역사는 이미 고려 때부터였으며 첫 번째 주지는 공민왕의 후비인 혜비로 기록된다. 그런 '정업원'이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시대에 따라 궁 가까이에서 번영을 하기도 했고, 숭유억불의 정책으로 혁파되기도 하는 과정을 겪는다. 법이 그러했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한때 왕비였으나 궁을 나와 비구니의 생을 산 여인이 있다. 바로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다.

 

'서울주변의 역사유적지를 찾아 걷자'의 이번 주제는 '비구니가 된 왕실의 여성'들이다. 6호선 창신역 3번 출구로 나오면 오른 쪽으로 구불구불 하게 생긴 육교가 나온다. 그 육교를 오르면 끝머리에 '정업원 옛터 90미터'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맞은편에 있는 종로센트레빌 아파트 쪽으로 길을 건너 아파트와 연결된 돌담을 따라 걸어 오르면 바로 왼쪽에 아담한 붉은 비각이 나온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옆에 있는 청룡사를 통하거나 청룡사에 미리 연락을 해서 비각 문을 열어주기를 청해 놓아야 한다.

 

정업원은 세종 때 신하들의 계속되는 상소에 혁파되었다가 세조 때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의 해설에 따르면 세조는 과부나 고아들을 구제하는 차원에서도 정업원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때 이미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로 유배 간 상태였고, 단종 비 송씨도 동대문 밖에 초막을 짓고 살던 때라, 추측컨대 어린 조카를 내쫓고 왕이 된 세조는 흉흉해진 민심을 잡아보고자 여러 가지 방편을 마련하는 중에 정업원을 다시 세운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단다. 송씨는 나라에서 지어준 집에 들지 않고 끝까지 초막에서 살며 그곳을 정업원이라 하고 주지가 되었다.

 

82세 생을 다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래서 이곳 일대는 정순왕후 송씨와 관련된 유적지들이 더러 있다. 생계를 위해 염색을 업으로 했다는 자주동천, 정순왕후를 돕기 위해 근방의 여인들이 열었다는 금남의 여인시장, 단종과 헤어진 영도교, 영월로 유배를 간 단종을 그리며 통곡했다는 동망봉들이다.

 

정업원은 인조반정 이후 유교의 강화로 인해 결국은 완전히 혁파되어 흔적이 없어진다. 영조 때 와서 정순왕후의 후일담을 알게 된 영조가 정업원이 있던 자리에 비석을 세웠다. 비석의 '정업원 구기' 즉 정업원 옛터라는 글씨와 비각의 현판은 영조가 직접 쓴 글이다. 정업원 비각을 안고 있는 청룡사도 비구니 절이다. 왕실 여인들이 출가해서 머물던 정업원의 역할까지도 수행했던 절이란다.

 

정업원 비각을 나와 언덕길을 조금 오르면 사거리가 나온다. 오른 쪽으로 길을 건너 골목으로 조금 걷다보면 삼거리가 나오고 직진의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정순왕후가 매일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의 안녕과 명복을 빈, 동망봉 자리였다는 공원이 나온다. 공원으로 오르는 길 왼쪽으로 보문동 일대가 낮은 지붕을 하고 들어차 있다.

 

 

공원입구로 들자마자 오른쪽 길로 들어가면 '동망봉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보인다. 이곳도 여지없이 일제강점의 흔적이 보인다. 일제 때 이곳이 채석장이 되면서 영조가 직접 썼다는 '동망봉'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설명이다. 날마다 동망봉에 올라 영월이 어디인지 보이지도 않는 동쪽을 향해 안타까운 바라기를 했을 왕후의 심정을 그리며, 사람들은 동쪽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이 희뿌옇다.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처음의 사거리로 내려와 오른쪽으로 길을 따라 걷는다. 동네이름이 보문동이다. 동신초등학교를 지나서 직진으로 더 걸어 가다보면 왼쪽으로 동네 이름의 유래가 된 보문사가 나온다. 이 절 또한 비구니 절이다. 동양 유일의 비구니 종단이란다. 정업원의 자리였다는 설도 있단다.

 

조선조에는 궁을 나온 상궁들이 여생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상궁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곳에서 사무를 관찰하는 분에게 해설을 부탁했더니, 살다 갔을 궁녀들의 삶은 간 데가 없고 절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보여 지는 사물들만 설명을 해준다. 경주 석굴암을 그대로 본떠 만들었다는 석굴암 앞에 소원성취로 켜둔 촛불들이 바람과 사람들의 입김에 일렁인다.

 

 

보문사를 나와 직진을 해서 걷다보면 왼쪽으로 아파트와 연결된 골목이 나온다. 골목 끝에 미타사란 절이 있다. 보문사와 담을 같이 하고 있다. 탑골승방의 유래가 된 절이며 고려 때부터 있던 절이다. 낡고 헐었던 부분이 단종 비 정순왕후에 의해 중수되었다고 한다.

 

이 또한 여승들의 거처란다. 보문사 큰 절에 비해 규모가 매우 협소했지만 소박하고 정갈한 모습이 오히려 더 담백해 보였다. 이곳에는 시대를 달리하는 6층 석탑이 있다고 해서 들어갔는데 사람을 만날 수는 없었다. 매우 조용한 절이었다. 답사 일정은 여기까지였다.

 

정순왕후는 15세에 왕비가 되었다가 16세에 의덕왕대비로 봉해지고 18세 때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 되고, 세조에 의해 사사되자 노산군 부인이 되어 궁을 나오게 된다. 자신의 의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는 풍전등화 같았던 시절이었다. 궁을 나온 왕후는 82세 돌아가실 때까지 권력의 장에서 멀리 벗어나 백성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다.

 

그런 평범한 날들이 정순왕후로 하여금 장수를 할 수 있게 한 비결이 아니었을까 후손들은 헤아려 본다. 후세 사람들은 말하기 좋게 한 많은 생애라고만 단정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82세까지 장수할 수 있었던 이면을,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과 적극성에서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며 여성의 눈으로 재해석을 해 봐야 한다는 해설사의 말에 백배 공감이 되었다.

 

 

부인은 숙종 때 단종이 추복되면서 정순왕후가 되고 신위는 종묘에 들고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에 있는 능호도 사릉으로 추봉되었다. 한때 왕후였던 여인의 행적을 찾아서 길을 걸었다. 짧은 시간으로 역사의 터로 남겨진 곳을 돌아볼 수 있는 거리였다. 미타사를 나와 길 따라 내려오니 보문역 1번 출구가 나온다.


태그:#여성문화유산연구회, #단종비 정순왕후, #정업원 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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