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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나름대로 준비한 아빠의 생일상입니다.
마음은 정말 푸짐합니다.
▲ 아주 소박한 생일상! 딸아이가 나름대로 준비한 아빠의 생일상입니다. 마음은 정말 푸짐합니다.
ⓒ 김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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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들녘이 노랗게 물들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마음이 그저 풍성하고 괜히 넉넉한 기분은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가을은 이렇게도 사람의 마음을 살찌우는지도 모르겠네요. 늘 힘들고 바쁘고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어 잠시 주위를 둘러볼 여유조차 갖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벌써 결혼생활이 십 여 년이 지났습니다. 남편을 만나 참으로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며 달려온 것 같은데 어느새 나이도 먹고, 겉모습도 어느새 중년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남편의 생일은 항상 이맘때입니다. 가을추수가 한창이거나 시작하는 시기, 가을과 항상 맞물러 어디에서나 얻는 풍성함이 함께하였지요. 하지만 남편의 마음은 늘 힘들었던 기억들로 가득했던 것 같은데 이제까지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고 그냥 대충 넘어가곤 했습니다.

남편의 생일은 애석하게도 저의 친정아버지 제삿날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은 없지만 이제까지 생일이라고 친정식구 그 누구한테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간단하게 아니면 대충 생일날보다 앞당겨 미역국을 해준 기억만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미안하기도 하고 씁쓸한 마음이 자꾸만 듭니다. 아무튼 이번만은 좀 챙긴다는 기분이 들게 해야 할 것 같아 하루 전 날 딸아이가 학원을 가기 전 잠시 불렀습니다. 전혀 모르고 있던 딸아이가 당황해 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더니 이내 오천 원만 달라고 했습니다. 오천 원으로 무엇을 할지 걱정은 되었지만 이번만은 딸아이에게 모든 걸 맡기기로 했습니다.

간단하게 미역국이나 끓여 먹자 싶었는데, 이래저래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오천 원을 받은 딸아이는 걱정하지 말라며 서둘러 학원을 향해 나갔습니다. 무심코 콩밥에 미역국 한 그릇으로 지내왔던 남편의 생일이 올해라고 특별한 건 아니지만 그동안 제대로 선물다운 선물 한번 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더 무거워졌습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사랑을 가득 담은 딸아이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 작은 카드 한 장이 행복한 아침입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사랑을 가득 담은 딸아이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 김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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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앞당겨 생일을 해먹을까 했는데 어찌하다 보니 찬거리 하나 준비되지 않아 그냥 생일날 아침으로 미루었습니다. 하루 전 날 저녁 무렵, 딸아이는 조용히 저를 끌고 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책상 밑에 놓인 까만 비닐봉지 안에 뭔가가 들어 있었습니다.

딸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조차 꺼려했습니다. 행여나 눈치 빠른 아빠가 이런 사소한 행동부터 의심해 우리의 이벤트를 알아차릴까 염려가 된 모양입니다. 둘이 눈빛으로 서로 사인을 주고받으니 어느덧 밤이 깊고, 생일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한 하루 일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전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일어나 팥 삶은 것을 넣어 밥을 하고, 소고기 대신 북어로 미역국을 끓였습니다.

버섯부침에 어묵조림, 시골에서 가져온 햇무를 채 썰어 무채를 하고, 조기 두 마리도 구웠습니다. 제가 아침 밥상을 준비하는 동안 딸아이는 작은 상 위에 접시를 놓고, 책상 밑에 있던 까만 비닐봉지를 꺼내왔습니다. 봉지 안에는 초코파이처럼 생긴 작은 빵 다섯 개가 있었고, 그것을 뜯어 가지런히 놓고 예전에 버리지 않고 보관해 둔 긴 초 하나를 꼽았습니다.

그러고는 얼른 어디선가 꺼내온 빨강 장미 한 송이를 상 위에다 올려놓았습니다. 알아서 준비해 보겠노라 환하게 웃던 그 모습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래도 키워보니 딸이 있어 전 행복한 엄마라는 걸 알았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작은 것이지만 함께 할 수 있는 자식이 항상 옆에 있다는 것이 그저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남편의 생일상에는 작은 빵과 초 하나, 빨간 장미 한 송이, 그리고 깨알 같은 글씨로 사랑을 담은 작은 카드 두 장이 나란히 준비되었습니다. 불을 끄고, 아직 자고 있는 남편 쪽으로 걸어가 남편을 불렀습니다. 자다 놀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남편 앞에 작은 생일상을 내려놓고, 딸아이와 전 노래를 불렀습니다. 참으로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말입니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어하는 남편의 얼굴 표정이 그대로 제 눈에 보였습니다.

올 가을엔 이 로션을 발라 남편의 얼굴이 더 맑아지면 좋겠습니다.
▲ 처음으로 준비한 남편의 생일선물! 올 가을엔 이 로션을 발라 남편의 얼굴이 더 맑아지면 좋겠습니다.
ⓒ 김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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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케이크가 아니어서 미안하고, 멋진 선물이 아니어서 더 마음 무거웠을 저와 딸아이를 위해 남편은 고맙다는 말을 연신 하였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가장 고맙고, 기분이 좋다고 말하는 남편의 모습 뒤로 이젠 정말 표현하지 않은 인색함을 좀 버리고 늘 환하게 작은 것 하나라도 표현하는 딸아이의 행동을 제가 좀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커가는 딸아이가 있어 더 돋보이고 화려했던 남편의 생일날 아침, 온 가족이 터질 듯한  풍선만큼이나 벅찬 행복을 느꼈습니다. 가진 게 넉넉하진 않지만 작은 것에 만족하고 행복해 할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가진 것보다 값진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녁 퇴근길에 남편의 로션을 하나 사야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제대로 된 로션 하나 없던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이 가을, 더 촉촉하고 뽀얀 남편의 얼굴을 위해 투자(?)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계절만큼이나 풍성하고 넉넉한 가을을 저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태그:#생일, #마음, #카드, #장미한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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