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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지난 6월 아버지가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외출하셨다. 저녁 무렵 돌아올 쯤에는 한손에는 태극기, 다른 한 손엔 유인물이 들려 있었다.

 

"어디 다녀오세요?"

"MBC 앞에."

"거긴 왜요?"

"어…, 엄기영 사장 물러나라 데모하는 데 갔었지!"

"아버지가 왜요?"

"***협회 지회장이 밥 산다길래 나갔는데, 거기더라고."

"네에?"

 

이날 ***협회 모 지역 지회장은 어디에선가 사람을 모아달라는 당부를 받았다는 게다. 그래서 평소 알고 지내던 회원들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철역에서 만나 20~30명의 회원들을 규합한 뒤에 이들을 이끌고 서울 여의도 MBC 앞에 가서 데모를 했던 것이다.

 

지회장은 약속대로 어르신들께 점심을 샀다. 저녁도 샀다. 아버지는 출출할 무렵 지회장이 산 삼계탕에 소주까지 잘 얻어 드셨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께 즐거우셨냐고 물었다.

 

"야 말도 마라.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 꼭 우리 전쟁터 나갈 때와 비슷하더라. 김대중, 노무현 욕 하느라고 핏발이 서 있는데 입에 거품 물고 그 난리들이야. 무섭더라고. 내가 그 무리에서 제일 설치는 사람에게 물었어. 엄기영은 왜 물러나라고 하는 거냐. 무조건이래, 무조건. 말이 안 통하는 밥통 같은 위인들이라, 나는 더 말도 안 섞었다. 야, 참고로 나는 구경만 했다. 설마 니 애비가 그 사람들과 똑같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날 나는 밤잠을 설쳤다. 아버지가 왜 그런 데를 쫓아갔을까 속이 상했다. 밥 한 끼 사잡수실 돈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 왜 그런 데를 몰려갔을까 적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냥 심심하던 차에 "MBC에 구경 가자"는 말에 따라나섰다고 했다.

 

가보니 그런 데모 난장판이라니, 정말 재밌는 구경거리이긴 했다고 전하셨다. 다음번에 또 가시겠냐고 하니 "절대"라고 고개를 저으셨다. 그러나 요즘도 간혹 지회장은 전화하시는 것 같다. 아버지가 딸의 당부대로 안 가시는지, 가고도 안 갔노라 시치미를 떼시는지 모를 터지만, 나는 무작정 믿기로 했다.

 

 

소 귀에 경 읽기 수준의 노인들

 

갑자기 기자의 아버지 얘기를 꺼낸 것은 지난 19일 무산된 '희망과 대안' 출범식 때문이다. 시민운동의 새로운 정치운동을 표방한 이 행사는 이날 오후 3시에 열릴 계획이었지만, 30분만에 무산됐다. 느닷없이 나타난 100여 명의 노인들은 이날 행사장 안에 미리 자리하고 있다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의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이의 있습니다"라면서 행사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덮어놓고 야유와 욕설을 퍼부었다.

 

행사장 곳곳에 자리하고 있던 노인들은 "대한민국에서 행사를 하면서 애국가도 안 부르냐" "태극기도 안 거느냐" "너희가 6.25전쟁을 아느냐" "10년 속은 것도 억울한데 너희가 또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느냐" "배가 부른 모양이다" 등등 온갖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점잖게 앉아 있던 주최 측은 순간 당혹해 얼굴이 붉어졌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앞으로 몰려든 노인들은 금방 따귀라도 한 대 후려칠 듯한 기세로 당장 이 행사를 중단하라고 악을 썼다.

 

노인들은 만세를 부르며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퍼부었다. 노인들의 행패를 막는 젊은 실무자들과는 자연스럽게 멱살잡이가 이어졌다. 단상까지 점거한 노인들에게 주최 측이 행사장 밖으로 나가달라고 수십 차례 안내방송을 했지만 우이독경이었다. 나가고 버티는 것은 내 자유라며 강짜를 부렸다. 마치 이 광경은 이승만정권 시절 '고무신, 막걸리 민주주의'를 다룬 무성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끝내 말로는 소통할 수 없다고 판단한 주최 측은 행사를 중단했다. 행사장 밖으로 노인들보다 먼저 나온 게다. 주최 측이 행사장에서 빠져나오니 이번엔 노인들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겼다!" "만세!"

 

노인들은 박수를 쳤고, 애국가를 불렀다. 이날 이 노인들이 부르는 애국가는 마치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완전히 무찌르고 승리한 뒤에 부르는 승전가처럼 들렸다. 그런데 과연 이 노인들이 이긴 걸까.

 

 

어버이연합회 노인들... 김대중 전 대통령 묘 파헤치기 퍼포먼스

 

서울 종로경찰서는 이날 홍아무개(86) 노인을 비롯 12명의 노인들을 현장에서 붙잡아 업무방해 혐의로 조사를 벌였다. 혐의가 입증되는 대로 사법처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이 노인들은 서울 탑골공원에 모여 있다가 어디서 무슨 행사가 열린다 하면 쫓아가 바라보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훼방을 놓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 2일 열린 퍼포먼스였다. 서울 동작경찰서는 지난 6일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를 이장하라고 요구하며 불법집회에 참가한 혐의로 대한민국어버이연합회 회원 3명을 연행해 조사한 바 있다.

 

이들은 대한민국어버이연합회 등 보수단체 회원 200여 명과 함께 지난 2일 오후 2시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정문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묘 이장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다 도로로 들어가 교통을 방해하고 불법집회를 한 혐의로 입건됐다.

 

이들은 기자회견 도중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를 상징하는 흙무덤을 쌓고 이를 파헤치는 퍼포먼스를 시도했다.

 

오랜 유교적 전통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죽은 자에 대해 '묘를 파헤치는 퍼포먼스'를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경이다. 그런데도 이 노인들은 한다. 

 

 

정연주 퇴진부터 삼성특검 중단 요구까지

 

이뿐 아니다. 대한민국어버이연합회는 지난해 7월 28일 반핵반김국민협의회 등과 함께 정연주 KBS 사장 자택 앞으로 몰려갔다. 정연주 사장을 구속 수사하라는 것이 이들의 요구였다.

 

이들은 "검찰은 정연주 사장 즉각 구속수사해 엄단하라", "공영방송 적자운영 KBS 특별감사 촉구한다", "촛불불법행진 선동하는 KBS 정연주 퇴진하라" 등의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작년 7월 4일부터 주 2회에 걸쳐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춰 정연주 사장 자택을 항의 방문했을 때 정연주 사장의 가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정 전 사장의 한 가족 일원은 지인을 통해 "테러를 당할까 겁이 난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이들의 그악한 시위에도 정연주 사장은 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이들로부터 시달렸던 끔찍한 일들에 대해서는 그 어떤 누구도 피해보상해주지 않는다. 아마도 정 전 사장의 가족은 지금까지도 이 집회 때문에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을지 모른다.

 

이들의 활약은 지난해 3월 삼성특검 때도 두드러졌다. 삼성특검이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해 3월부터 대한민국어버이연합회 회원들은 서울 용산구 한남동 삼성특검 사무실 앞으로 몰려와 삼성특검 중단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삼성특검의 발단이 됐던 김용철 변호사에 대한 인권무시와 욕설은 두 말 하면 잔소리일 정도로 심각하게 진행됐다. 그들은 "삼성특검 때문에 대한민국 경제가 파탄 나게 생겼다"면서 "삼성특검을 조기 종결하라고 강력 촉구했다".

 

촛불집회에서 40대 여성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폭력을 휘두른 건 이미 다 아는 사건이 됐고, 촛불1주년 평가토론 때 행사장에 와서 난장판을 만든 일도 있다. 서울대 교수들이 시국선언을 할 때도 현장에 가서 방해를 하는 통에 어렵사리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굵직한 현안들마다 나서서 훼방을 놓는 분들이 바로 2006년 봄 결성된 대한민국어버이연합회다. 경찰에 따르면, 요즘도 이들은 거의 매일 오후 1시가 되면 서울 종묘공원 시계탑 옆 공터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한 안보 토론회'라는 집회를 연다고 한다. 

 

이쯤 이르면 과연 이들이 자발적으로 이렇게 하는 걸까 의문이 든다. 혹자는 이들의 배후를 캐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 궁금하다. 누가 팔순노인들을 현장으로 끌어내고 있는 것인지,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인지 규명돼야 한다.

 

돈줄과 권력이 없고서야 팔순노인들을 현장으로 불러낼 수 있을까. 최소한 ***협회처럼 삼계탕 한 그릇씩은 사먹일 능력이 있어야 이들을 움직일 게 아닌가. 또 연좌제까지 적용해 '촛불'을 기소하려던 경찰은 이들의 그간 행태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궁금하다.

 

이날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침통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설적으로 이번 사태는 '희망과 대안'의 창립이 어떤 무게로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실감나게 하는 사건입니다. 민주주의는 본디 대화와 타협, 토론과 소통, 합의를 이끄는 절차를 본질적인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이 폭력적으로 중단됐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폭거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와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삼계탕 한 그릇과 맞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태그:#대한민국어버이연합회, #삼성특검, #촛불집회, #엄기영, #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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