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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남겨져 있는 유적지를 찾아 걷는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가 주최한 역사기행 두 번째 코스로는 장충단과 남산일대다.

장충단공원 입구에서 시작을 했다. 지하철 동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오니 바로 공원과 연결되어 있다. '장충단 비'와 '장충단 터' 표지석은 공원입구에 세워져 있어서 그곳부터 답사가 시작되었다.

장충단은 조선 고종 32년(1895)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일본인을 물리치다 순사한 홍계훈, 이경직 및 여러 장병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고종이 1900년에 세운 사당이다.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는데 일제 강점 때 폐사되었다고 한다. 그 뒤 한국전쟁으로 사당은 소실되었고, 지금은 장충단비만 남아있다. 앞면에 '장충단'은 순종이 황태자시절에 쓴 글씨다. 황제가 쓴 글씨는 '어필'이라고 하나 이것은 순종이 황태자시절에 쓴 글씨라서 '예필'이라고 한단다.

순종이 황태자시절에 쓴 '장충단'이다.
▲ 장충단 비 순종이 황태자시절에 쓴 '장충단'이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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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단 터 바로 옆에 있는 수표교를 건넜다. 수표교가 장충단 공원 입구에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원래는 청계천 2가 근방에 있었는데 청계천 복개공사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다리를 받치고 있는 돌기둥들은 2단으로 되어 있었고, 튼튼해 보이면서도 아름다운 조각품 같았다. 세종 2년에 세웠고, 당시에는 다리 근처에 소와 말을 거래하는 시장이 있어서 '마전교'라고 불렀다 한다.

세종 23년에는 수표를 만들어 이 다리 옆에 세우고 청계천의 물높이를 재어 홍수를 대비 했다. 영조 36년에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경(庚) ·진(辰) ·지(地) ·평(平)'이라는 글씨를 새겨서 4단계로 물높이를 측정했다고 하는데, 세종 때 세운 수표는 지금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다리는 조선 500여 년 동안 여러 번의 보수를 거쳐 지금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다리를 받치고 있는 돌기둥은 물의 저항을 덜 받게 하기 위해 모서리지게 세워져 있었다.
▲ 수표교 다리를 받치고 있는 돌기둥은 물의 저항을 덜 받게 하기 위해 모서리지게 세워져 있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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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서 맞은편에 있는 장충체육관 쪽으로 걸었다. 동대입구역 5번 출구로 나오면 되는 길이지만 장충단비와 수표교를 보기 위해 길을 둘러 온 것이다. 길을 건너 직진으로 조금 걷다보면 오른 쪽에 성곽이 보이기 시작한다.

서울성곽은 태조가 조선 건국 후에 수도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쌓은 성곽이다. 그 중에 하나가 남산 쪽에 남아 있는 것이다. 성곽을 타고 오른 담쟁이덩굴에 단풍이 들기 시작해서 성곽의 옛 멋을 더 해준다.

서울성곽 중에 남산 일대를 두르고 있는 성곽이다. 오솔길이었고, 옆은 주택가였다.
▲ 서울성곽 서울성곽 중에 남산 일대를 두르고 있는 성곽이다. 오솔길이었고, 옆은 주택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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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세종, 숙종 시절의 축조방법이 다르게 쌓여 올라간 돌들에서 시대의 다른 역사를 만난다. 군데군데 보수를 한 흔적으로 흰 회색의 돌들도 보인다. 너무 새것이라 옛것과 어울려 보이지 않고 겉돌아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세월의 흔적이 쌓이면 옛것이 되어 어울려지겠지 싶었다. 서울성곽은 일제 때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많이 헐리고 훼손되었으며 그 뒤 한국전쟁으로 또 훼손되었다고 한다. 서울 성곽 구간마다 복원을 하는 곳도 있다.

성곽은 축조법에 따라 시대별로 모양이 달랐다.
▲ 성곽축조법 성곽은 축조법에 따라 시대별로 모양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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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길은 오솔길로 이어지다가 길이 좁아져 걸을 수 없으면 옆의 주택단지 쪽으로 난 도로를 걷다가 다시 성곽의 오솔길이 나오면 올랐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다보니 조금은 어수선한 느낌이 들었다.

성곽 왼쪽으로 내려앉아 있는 주택들이 보인다. 대문들 마다 할머니 한 두 분씩이 모여 얘기들을 하고 계신다. 성곽을 우루루 오르고 있는 우리들을 '왜 저리 몰려다닐까 몰라' 하는 눈빛으로 구경하신다. 여기가 어디쯤이냐고 물으니 '신당동'이라고 답하신다.

그렇게 성곽 오솔길과 주택 도로를 오가며 30여 분을 걸어서 성곽 안쪽으로 들어왔다. 호젓한 산길이 햇볕에 반사되어 하얗게 보였다. 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왼쪽으로 난 숲길로 접어들면 자유센터 건물이 나온다. 건물을 빠져 나와 길을 건너면 국립극장이다.

그 곳에서 남산으로 오르는 산책로가 있지만 셔틀버스를 타기로 한다. 2시간여로 잡혀있는 일정을 마치려면 차를 타야한다. 셔틀버스를 기다리며 국립극장 건너 편 근방 어딘가에 있었다는 '남소문 터'의 자리를 가늠해 보았다. 이 문은 일제 강점기 때 도로확장으로 철거되었단다.

남산 공원입구에서 차를 내려서 N 서울타워와 팔각정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왼쪽으로 성곽이 다시 보였다. 팔각정으로 오르는 입구 성곽 맞은편에 '봉수대 터'를 알리는 표지석도 있다.

남산 팔각정으로 오르는 입구에 왼쪽으로는 성곽이 이어졌고, 오른쪽에 봉수대 터 표지석이 있었다.
▲ 목멱산 봉수대 터 남산 팔각정으로 오르는 입구에 왼쪽으로는 성곽이 이어졌고, 오른쪽에 봉수대 터 표지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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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견학 온 학생들, 연인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산책에 나선 것 같은 넥타이맨 직장인들, 외국인들, 그리고 수문장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북소리와 우리 같은 아줌마들이 엉켜서 호젓한 마음으로 성곽과 옛터들을 돌아보는 것은 좀 전의 시간으로 끝난 것 같다.

남산 팔각정 앞에는 '국사당 터' 표지석이 있다. 국사당 터는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남산 산신(목멱대왕)에게 제를 지내기 위한 곳이었단다. 남산의 옛 이름이 목멱산이다. 그 뒤 건물이 남아 있었는데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우면서 지금의 자리인 인왕산 서쪽 기슭 선바위 아래로 옮겼단다.

남산 팔각정 계단에 앉으니 바로 앞에 보였다. 그 옆이 봉수대다.
▲ 국사당 터 남산 팔각정 계단에 앉으니 바로 앞에 보였다. 그 옆이 봉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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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옆에 시 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된 봉수대가 있다. 봉수란 횃불이나 연기를 사용하여 국경지대 및 국내 각 지방의 비상사태를 왕궁이 있는 서울까지 빠른 속도로 알릴 수 있게 한 경보망인데, 남산 봉수대는 전국의 봉수가 최종적으로 집결되던 중앙봉수대라고 한다. 태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 500여 년간 있었다고 하는데 그 뒤에는 소실이 된 모양으로 1993년 현 위치에 복원된 것이다. 봉수대 뒤편으로 또 성곽길이 이어진다.

봉수대 뒤쪽이다. 앞쪽에는 수문장의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 남산 봉수대 봉수대 뒤쪽이다. 앞쪽에는 수문장의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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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길이다. 계단을 펄쩍펄쩍 뛰어 내려가는 아이들 세대와 계단을 한 발 내리고 다음 발을 내려 모은 뒤에 다시 한 발 씩을 내 딛는 세대와 그 중간쯤의 이 쪽 저쪽에 속해 있는 세대들이 모여 오르내린다. 왁자한 사람들 물결 속을 함께 걷다보니 옛 유적지를 돌아보는 데에 대한 되새김질을 한 시간이 아니라 떠밀려 들여다보고 쑥 빠져 나와 버린 느낌이다. 성곽숲길을 따라 계단과 평지를 번갈아 가며 내려오다 보니 갈림길이다. 남산공원관리사업소 팻말 쪽을 따라 걷다가 또 갈림길이 나오면 남산케이블카 쪽으로 방향을 잡아서 내려오면 '북측순환로B코스'가 나온다.

성곽숲길은 계단과 평지가 번갈아 나왔는데, 아이들은 계단을 펄쩍펄쩍 뛰면서 두세 개를 뛰어 내려갔다.
▲ 남산성곽숲길 성곽숲길은 계단과 평지가 번갈아 나왔는데, 아이들은 계단을 펄쩍펄쩍 뛰면서 두세 개를 뛰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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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순환로'로 잠시 걸어 오르니 왼쪽으로 '와룡묘'가 있다. 지방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었다. '와룡'은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 제갈량의 호다. 그 곳에는 우리나라 시조인 단군을 기리는 사당도 함께 있다. 참배를 하는 객들도 보인다. 참배객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조용한 발걸음과 눈길만을 주고 나왔다.

북측순환로 쪽에 있었는데, 왜인지는 모르지만 사진촬영을 못한다고 했다.
▲ 와룡묘 입구 북측순환로 쪽에 있었는데, 왜인지는 모르지만 사진촬영을 못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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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처음의 북측순환로 입구로 되짚어 내려오면 계단 샛길이 나온다. 명동역이나 충무로역으로 나가는 길이다. 난간을 따라 계단을 내려오는데 설탕을 졸이는 듯한 달콤한 냄새가 풍긴다. 난간 옆 숲길이 온통 계수나무들이다. 일행 중의 한 사람이 "생긴 것도 이쁜 것이 향기도 좋다"고 말한다. 계수나무 잎은 하트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케이블카를 타는 쪽으로 내려오는 숲길에는 온통 계수나무였다. 설탕을 졸일 때 나는 달콤한 냄새가 났다.
▲ 계수나무 케이블카를 타는 쪽으로 내려오는 숲길에는 온통 계수나무였다. 설탕을 졸일 때 나는 달콤한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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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예정 시간은 2시간여였지만, 일부러도 온다는 남산공원인지라 사람들의 발걸음이 자꾸 느려져서 약 3시간이 걸렸다. 남산과 그 주변에 있던 유적지들은 모두 일제 강점기로 인해 몸살을 앓은 흔적들을 갖고 있어서 안타까움이 느껴진 답사 길이었다.


태그:#여성문화유산연구회, #서울성곽 남산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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