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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없었다'는 말보다 운이 좋았다는 말을 더 많이 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주정인씨가 그 주인공이다.
 


주정인씨는 공부보다 노는 게 더 좋았던 대학시절, 불의의 사고로 좋아하던 춤을 다시는 출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다시는 걸을 수 없을 거라는 의사들의 진단에도 결국 일어선 그는 웹프로그래머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주변에선 다들 기적이라고 말한다.

 

누구보다 짧았던 대학시절

 

재수로 들어온 학교에서 공부보다 사람 만나는 게 더 재밌던 그는 고교 동창 친구를 따라 대학교 동아리 춤패에 입단했다. 대학 2학년인 94년 8월에 그는 연세대에서 열린 범민족대회에 통일선봉대 문예일꾼으로 참가하게 된다. 당시 문민정부는 범민족대회 행사 자체를 허락하지 않아 행사 참가자들과 경찰과의 대치와 충돌이 반복되었다.

 

행사를 마치고 긴장이 풀린 탓을까. 친구들과 뒤풀이 도중에서 그의 기억은 끊겨 있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어느 숲 속이었다. 술에 취해 잠든 모양이라 여기고 몸을 일으켜 봤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몸을 일으켜 봐도 다시 쓰러지는 일이 반복됐다. 처음엔 한뎃잠을 잔 탓으로 여겼지만, 시간이 지나도 몸이 풀리지 않자 그제야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았다. 결국, 연대세브란스 응급실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다시 영동 세브란스로 후송됐다.

 

장남이었던 그는 "홀로 두 아들을 키워온 어머니께 가장 큰 불효를 저질렀다"고 말한다.

사고에 대해 무지했다는 그는 목뼈가 부러졌다는 말에 뼈가 다시 이어지면 정상적인 활동이 가능할 것으로 여겼다. 한 의사가 혀를 차며 결혼은 했느냐며 젊은 나이에 안됐다는 말을 듣고서야 심각한 상태임을 깨달았다. 의사들은 평생 휠체어에 탈 수 있으면 성공한 거라며 그마저도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는 진단을 내렸다.

 

다시 일어서기

 

회진을 돌 때마다 신경이 회복됐는지 알아보기 위해 꼬집어보거나 다리에 힘을 주는 테스트를 한다. 어느 날인가 감각은 없었지만, 힘을 주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물리치료와 재활치료에 들어갔다. 당시 세브란스 병원에서 만난 재활치료사의 노력 덕에 회복이 빨랐다. 그러나 병원의 퇴원종용으로 이듬해 1월경 목포로 내려왔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혼자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간은 감옥과도 같았다. 마음대로 침대에 오르내릴 수도 없었다. 퇴원 당시 다짐했던 재활운동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른 방안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보내는 두 달 동안 가족들의 신경도 날카로워졌다. 덩치 큰 아들을 안고 들어 올리고 내리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탓이다.

 

결국, 인천 근로복지 공단의 산업재활원을 찾아갔고 거기서 운 좋게 친구들을 사귀면서 활동이 늘어났다. 동향의 재활치료사가 또래 환자를 소개해줬고 그 친구의 방으로 놀러 가면서 활동이 많아졌고 친구들을 따라 병실 밖 나들이도 감행하면서 회복 속도가 빨라졌다. 재활치료사가 권한 목발이 익숙해지면서 간병인이 없어도 될 만큼 회복됐다.

 

새로 얻은 꿈

 

일정 수준으로 회복한 몸은 더는 좋아지는 게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좋기도 했고 더 이상 나아지지 않는다는 생각에 운동을 게을리하기 시작했다. 병원 친구들이 하나씩 떠나는 것을 보면서 나도 평생 병원에서 지낼 수 없다는 고민을 시작하게 됐다.

 

먼저 퇴원한 친구가 운전을 배우고 차를 샀다며 주씨를 데리고 드라이브 길에 나섰다. 친구가 데려간 곳은 서울의 면허시험장이었다. 사비를 들여 시험을 접수한 친구 녀석은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꼭 합격하라며 기운을 북돋워줬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2번의 낙방이 이어졌다. 눈이 매섭게 내리던 겨울 시험장으로 데려다 준 이가 "이번에도 떨어지면 한강에 가서 죽자!"는 농을 던지며 합격기운을 불어넣기도 했다.

 

주위의 도움으로 운전면허증을 손에 쥐게 됐다. 운전면허가 생기고 나자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운전면허증은 새로운 자격증에 도전할 수 있게 했다. 무료로 가르쳐준다는 장애인 직업학교를 찾게 됐고 그곳에서 정보처리학과를 다니면서 프로그래밍에 대해 처음 접하게 되었다.

 

 

기능사자격증을 땄지만 때맞춰 불어온 IMF의 바람 때문에 직장을 구할 수 없어 다시 담양에 있는 장애인 학교로 편입했다. 광주의 카드체크 회사 전산실에 취업했지만 결국 월급을 받지 못한 채 회사는 부도가 나기도 했다. 집에 1년 동안 지냈지만, 직장은 잘 구해지지 않았고 결국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대구에서 인쇄회사를 창업했다. 그러나 초보들이 꾸린 회사는 엉성하기만 했고 계속되는 경기 불황 탓에 회사는 문을 닫았다.

 

회사는 문을 닫았지만 새로운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인의 추천으로 지체장애인협회 대구지회에서 한 부서를 맡아 근무를 시작한 것이다. 열악한 근무조건에도 사회복지에 대한 전문성을 얻어야겠다는 욕심이 생겨 야간대학을 다니며 사회복지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그러나 협회 부조리에 대해 많은 고민과 이야기 속에서 협회 관계자들과의 불협화음은 계속됐다. 그는 대구를 떠나 가족이 있는 목포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와 막연하게 있을 거라 기대했던 일자리는 쉽사리 구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목포에 내려온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대학 선후배들이 그를 찾았다. 20대 초반에 헤어져 30대 후반에 다시 만난 것이다. 17년만의 만남이었다. 그 중 대학 선배인 강성호 사장의 권유로 현재 미래콘텐츠에 입사해 웹프로그램을 배우기 시작했다. 같은 회사 웹프로그래머 팀장으로 있는 대학동창인 김창훈씨의 도움도 컸다고 전한다.

 

시설보다 불편한 시선

 

"턱을 낮추고 경사로를 설치하는 것은 장애인을 위한 게 아니다. 유모차를 끌고 가는 주부에게도 턱이나 계단은 제약"이라는 그는 장애인을 위한 시설개선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개선이라고 말한다.

 

 

주정인씨는 "타인의 도움 없이는 힘들겠지만 어려운 점은 없다. 가장 불편한 건 시선"이라고 말한다. 그는 "장애 역시 안경과 같은 것이다. 하나의 개성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적선하듯 돕기보다 같이 사는 사람으로 인식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기회는 평등해야 한다. 어느 직업이건 장애인도 도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실력은 있지만 접근할 수 없다면 억울한 것이다. 그 사람이 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사회적 이익으로 돌아올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목포21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장애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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