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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둘레길이니 올레길이니 하며 고장의 길을 걸어서 둘러보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문화유산연구회'가 10회에 걸쳐 서울지역 곳곳을 걸어서 탐방해 보기로 했다. 여성이 배재된 역사시간 속을 여성의 눈으로 들여다보기란 쉽지는 않다. 그래도 역사의 현장이 담겨 있는 길을 '여성의 눈으로' 규모 있게 걸어보자는 것에 많은 사람들의 호응이 있었다.

돌담길이 어찌 덕수궁에만 있으랴. 지난 8일 경복궁의 서문, 즉 영추문 돌담길에서부터 걷기는 시작되었다. '가을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쓰였다는 영추문, 그 돌담길을 가을에 걸으니 호젓한 맛이 안성맞춤이었다.

청와대 입구까지 뻗어있는 돌담길은 한적했다.
▲ 영추문 돌담길 청와대 입구까지 뻗어있는 돌담길은 한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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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선 거리는 한산했다. 돌담길을 끼고 청와대 쪽으로 걸어 올라가니 백악산을 뒤로 한 청와대의 영빈관과 너른 광장이 나타난다. 영빈관 옆에 칠궁이 고즈넉하게 숨겨져 보인다. 칠궁은 조선의 왕들을 낳은 일곱 분의 후궁들을 모신 사당이다. 칠궁은 청와대와 담을 같이 하고 있어서 그곳만을 별도로 볼 수는 없다. 청와대를 거쳐서 둘러보아야 한다. 그래서 칠궁은 바라만보고 광장을 지나 직진을 하여 걸어갔다.

청와대 영빈관 담 끝에 붉은 색의 대문으로 보이는 곳이 칠궁이다.
▲ 칠궁 청와대 영빈관 담 끝에 붉은 색의 대문으로 보이는 곳이 칠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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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진 사거리에서 길을 건너면 신교동 선희궁길이다. 그곳에 있는 '국립서울농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본관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니 '선희궁터'가 있다.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신위를 모셨던 사당인데, 지금은 칠궁으로 옮겨졌지만 사당이었던 건물 외관은 남아 있다. 그 당시 흔적으로 은행나무, 느티나무, 선희궁을 받치고 있었을 기단인 석축도 눈에 들어온다.

서울농학교 안에 있는 선희궁 터. 건물의 본체만 남아있다.
▲ 선희궁 터 서울농학교 안에 있는 선희궁 터. 건물의 본체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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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나와 농학교 담을 끼고 조금 올라가니 오른쪽으로 옥인동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이 하늘에 닿을 듯 걸쳐져 있다. 좁은 골목이다. 서울 중심 거리 한복판에 이런 곳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옥인 5길 골목으로 들어서니 그 끝자락에 주민들을 위한 작은 공원이 있다. 그 곳은 광해군 때 짓다가 인조반정으로 중단된 궁궐터인 '인경궁터'란다. 그 때 쓰였던 재목과 기와는 인조 26년에 홍제원에 청나라 사신들의 숙소 등을 짓는 데 사용했다니, 할 말을 잊게 한다. 곧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연결되어 있다.

인왕산의 산기슭 길은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 인왕산 산기슭 인왕산의 산기슭 길은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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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기슭을 따라 가볍게 산책할 수 있도록 된 숲길을 걷다보니 청계천 발원지라는 샘물과 옥인아파트가 나왔다. 옥인 아파트는 옥류동(옥인동)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인왕산 기슭의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골짜기를 옆에 끼고 있는 아파트였다. 그러나 철거에 들어가 있는 아파트는 흉물스럽게 서 있었는데, 군데군데 아직 사람이 살고 있었다.

집은 사람이 함께 해야 한다. 사람이 살고 있는 몇 곳은 화분에 꽃이 피어 있고, 장독이 놓여 있고, 을씨년스럽지 않았고, 사람이 나와 말을 걸었다. 이 아파트를 헐어 공원화를 시킨다는데 주민들과 해결이 아직 덜 난 상태인데도 마구잡이로 밀고 들어온다고 한다. 아름다운 계곡을 끼고 서 있는 아파트는 지난날 영화를 잊고 역사의 집터가 되려 하고 있었다.

공원이 되면 인왕산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직 해결을 못보고 남아 있는 저들의 신산한 삶이 느껴져 아름다운 경관 앞에서 걱정이 먼저 앞섰다. 청계천 발원지라 해도 청계천으로 들어가는 지천들은 이미 마르고 물길이 끊겨 있으니 그 또한 안타깝다.

계곡을 끼고 서 있는 옥인아파트는 철거에 들어갔지만 아직 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 옥인아파트 계곡을 끼고 서 있는 옥인아파트는 철거에 들어갔지만 아직 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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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기슭의 경치 좋고 물 맑기로 유명한 계곡이었던 이곳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에 나와 있는 곳이고, 조선 후기 중인계층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여항문학의 중심지로서 송석원 시회로도 유명한 곳이었으며, 옥인아파트 일대는 효령대군, 안평대군 집터였단다.

옥인아파트를 벗어나 걸어 내려오는 골목은 넓었고 부유해 보였다. 양 옆으로 들어서 있는 주택가는 주인들 취향을 소박하게 혹은 화려하게 밖으로 드러내고 있어서 그 또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옥인동 송석원 3길로 접어드니 순종의 황태자비인 '순정효황후 생가'였다고 하는 기와집이 있다. 집은 이미 옛날의 영화를 잊은 지 오래인 듯 낡아 있었다. 남산한옥마을을 조성할 때 옮기려고 했지만 너무 낡고 소유주가 분분하여 결국 원형만을 본 따 새로 지었다고 한다. 남산한옥마을에 가면 원형을 볼 수 있다.

순정효황후 생가라는 곳인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너무 낡아서 옛 영화를 무색하게 했다.
 순정효황후 생가라는 곳인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너무 낡아서 옛 영화를 무색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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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가 골목길들을 걸어서 나오니  길가에 '송석원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놓여 있다. 도로 건너 맞은편에는 군인아파트 담벼락 앞에 '자수궁터' 표지석도 보인다. 농학교 맞은 편 길을 따라 올라오면 5분여 정도 거리에 있지만, 우리는 인왕산 기슭 계곡의 인경궁터와 안평대군 집터, 순정효황후 생가를 보기 위해 둘레 길을 걸은 것이다. 길들은 조용하고 한적했다.

송석원 터 길 건너에는 군인아파트가 있고 그 담벼락에 자수궁 터 표지석이 서있다.
▲ 송석원 터 송석원 터 길 건너에는 군인아파트가 있고 그 담벼락에 자수궁 터 표지석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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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군인아파트를 끼고 옆 골목으로 내려오면 큰 도로가 나온다. 거기서 경복궁역 쪽으로 걸었다. 인도에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사람들과 부딪치며 지나오다 보니 오른 쪽에 재래시장인 통인시장이 보인다. 그곳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찻길 쪽으로 '세종대왕 나신 곳'이란 표지석을 만난다. 지금까지 보았던 표지석과 다른 한글체다. 한글창제를 하신 분에 대한 후손들의 감사인 듯하다.

표지석이 순 한글로 되어 있다. 길 건너 맞은편에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창의궁 터가 나온다.
▲ 세종대왕 나신 곳 표지석이 순 한글로 되어 있다. 길 건너 맞은편에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창의궁 터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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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바로 길을 건너면 통의동이고 도로변에 영조의 잠저였던 '창의궁터'와 '김정희 선생 집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이 있는 앞 골목으로 50미터쯤 들어가 오른 쪽 좁은 길로 들어가자마자 천연기념물이었던 백송이 나온다. 지금은 고사되어 밑둥만 남아 있다. 그 곳이 창의궁터였고 김정희 선생이 살았던 집터다. 고사된 백송의 주변에는 어린 백송 몇 그루가 뜻있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대를 이으면서 자라고 있었다. 우리들의 '터'를 찾아 떠난 길은 2시간여가 걸려 여기서 마무리 되었다.

창의궁 터였던 곳이다. 천연기념물이었던 백송은 고사되어 밑둥만 남아있고 지금은 주위에 몇 그루의 어린 백송이 자라고 있다.
▲ 백송 터 창의궁 터였던 곳이다. 천연기념물이었던 백송은 고사되어 밑둥만 남아있고 지금은 주위에 몇 그루의 어린 백송이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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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터였든 슬픔이 서려 있는 터였던 '터'는 그 시대의 사람과 함께 일어나고 스러진다. 그리고 역사가 되어 우리들 앞에 있다. 옥인아파트가 헐리고 나면 서민 다수들의 삶이 어울려 있었던 집터는 역사가 되지 못하고 소리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 이전 시대에 이름을 남긴 사람 소수의 집터로만 기억되어 역사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같은 시대를 사는 서민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미리 들었다.

길을 찾아 걸으며 역사가 덧입혀져 있는 터들의, 소리 없는 무게감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태그:#여성문화유산연구회, #경복궁 영추문 돌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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