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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했던 도자기, 아마 그것은 분청사기를 위한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탄생은 청자가마의 몰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만, 이후 역사적 격변 속에서 세상의 주인공으로 우뚝 섰기 때문입니다. 분청사기에겐 어떤 행운이 함께 했던 것일까요?

도자기로 보는 역사, <도자기를 손에 쥔 자 세상을 얻으리라>의 다섯번째 이야기입니다.

새로운 방법, 새로운 정신, 새로운 시대

분청사기는 상감청자를 만드는 방법과 똑같습니다만 청자가 아니라 분청사기라고 부릅니다. 청자와 같지만 청자가 아니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상감청자의 형식을 그대로 간직한 채 분청사기로 이행하고 있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청자의 조형을 가지고 있으나 그림은 자유분방하고, 색또한 엄격한 절제된 청자의 규격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 분청사기 상감연모단당초문병 상감청자의 형식을 그대로 간직한 채 분청사기로 이행하고 있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청자의 조형을 가지고 있으나 그림은 자유분방하고, 색또한 엄격한 절제된 청자의 규격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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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는 상감청자와 거의 같은 방법으로 만듭니다. 청자를 만드는 흙을 쓰고 상감기법에 쓰인 '백토'로 무늬를 낸 뒤 유약을 발라 구워 냅니다. 말 그대로 백토로 분장한 청자란 뜻입니다. (백토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니 여기에선 넘어가겠습니다. 하얀 분가루 같은 흙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분청사기라는 말도 1940년대에 고유섭이라는 분이 붙인 이름으로 당시에는 쓰지 않던 말입니다. 그러니 그냥 청자라고 해도 될 것을 굳이 분청사기라고 부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시에는 그냥 사기그릇이라고 했습니다. '사기'란 돌가루로 만든 그릇이란 뜻으로 진흙으로 구운 도기나 질그릇과 구분하여 고급 그릇이란 뜻이기도 했습니다.)

청자는 최고의 흙과 최고의 유약을 가지고 최고의 조건에서 만들었습니다. 불도 물도 흙도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규격을 따라야 합니다. 엄격한 관리 아래 최고의 전문가들만이 만들어냈기 때문에 청자는 고려사회에서 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분청사기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도자기를 구워야 했던 도공들은 흙을 가릴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유약의 질도 나빴고 땔감도 풍족하지 못하고 가마도 번듯하게 만들 형편이 아니라 도자기는 제멋대로 구워졌습니다. 그래서 분청사기는 규칙도 없고 마을에 따라 도공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고 자유롭습니다.

그러다보니 청자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색도 회청색이라 청자라고 우길 수도 없었지요. 청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도자기를 사들일 상인이나 고관대작은 없었으니 도공들은 밥 벌어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도자기를 사려는 새로운 사람들(신진사대부 또는 성리학자)의 눈에 들도록 하기 위해 있는 재주를 다 쏟았던 것이지요.

노력 끝에 그들은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었습니다. 질이 떨어지는 흙과 유약으로 설비가 훌륭하지 못한 가마에서 구워야 하는 현실을 충분히 이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다양하고 자유로운 무늬를 만들어 흙과 유약이 지닌 단점을 보완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도공들은 분청사기의 흙이나 유약을 개발하기보다 그림과 무늬로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분청사기는 규칙이 없이 자유롭게 만들어진 무늬가 조화를 이루며 현대미술품 같은 멋을 자아내게 됩니다.

현실적인 도자기

무엇보다 청자와 분청사기는 추구하는 정신세계도 다릅니다. 청자는 고려시대 귀족들이 갖고 싶은 고요한 진리의 세계를 표현했습니다. 면도날 같은 긴장감이 흐른다고 해야 할까요?

그에 비해 분청사기는 마치 저잣거리에서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을 보는 듯이 살아 숨 쉬면서 왁자지껄한 느낌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그 자체를 나타낸 것이지요.

분청사기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신진사대부들인 성리학자들의 도자기입니다. 성리학자들은 고려의 전통귀족들과 달리 오래 살기 위해서나 죽은 뒤에 천당에 태어나는 일을 빌기 위해 도자기를 만드는 일을 비웃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일을 매우 바보 같은 일이라고 여기는 철두철미한 현실주의자인 유학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신정권시대에 만들어진 상감청자 중에는 천(天)이나 천당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이 많습니다. 나라가 어지럽고 앞일을 알 수 없자 사람들은 내세에 대해 집착했습니다. 
그래서 죽어서 천당에서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새긴 글자입니다. 불교에서는 극락세계라고도 하고 서방정토라고도 합니다만 우리민족은 그냥 하늘나라 또는 천당이라는 표현으로 이 모든 것을 아울러 불러왔습니다
▲ 天자가 새겨진 청자 무신정권시대에 만들어진 상감청자 중에는 천(天)이나 천당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이 많습니다. 나라가 어지럽고 앞일을 알 수 없자 사람들은 내세에 대해 집착했습니다. 그래서 죽어서 천당에서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새긴 글자입니다. 불교에서는 극락세계라고도 하고 서방정토라고도 합니다만 우리민족은 그냥 하늘나라 또는 천당이라는 표현으로 이 모든 것을 아울러 불러왔습니다
ⓒ 청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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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의 유학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유학을 선택했지만 정신을 다스리는 방법은 불교적이었습니다. 수양을 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지혜를 깨달은 해탈의 경지이고 죽어서는 극락세계에 다시 태어나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고려 말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이라는 유학의 한 갈래를 들여와 공부한 사람들입니다. 성리학은 죽은 뒤의 세계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았고 세상에 설명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여긴 합리주의였습니다. 그러니 이들에게 정신적 가치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분청사기가 지극히 삶의 모습을 담아내게 된 것은 그런 그들의 도자기였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기법은 새로운 정신을 드러낸 것이며 그것은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성리학
성리학은 중국 송나라(정확하게는 남송시대) 사람인 주자가 정리하였기 때문에 '주자학'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한나라시대에 정립되었기 때문에 '한학'이라 불리는 유학과 비교하기 위해 '송학'이라고도 하고, 새로운 유학이라는 뜻으로 '신유학'이라고도 합니다.

주희가 집대성하기 전까지 유학은 현실적인 법률이나 처세 위주였기 때문에 정신세계나 우주에 대해서는 불교나 도교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주희를 비롯한 송나라 신유학자들은 외국에서 들여온 불교나 현실적인 세계를 외면하는 도교로는 위기에 빠진 중국인을 구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당시는 북송이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와 같은 북방민족에게 계속 영토를 침탈당해 결국 남쪽으로 내려와 피난 왕국이랄 수 있는 남송을 세웠던 때였으니 위기의식은 더욱 컸습니다.

주희는 패배감에 빠진 중국인들에게 중국인인 공자와 맹자가 만든 '유학'이야 말로 가장 우수한 학문이자 종교란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우주와 인간의 정신도 유학에 의해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는데요, 이것을 일컬어 그리스세계와 기독교세계를 접목시킨 서양의 토마스 아퀴나스에 비견하는 동양사학자도 있습니다. 유불선의 통합을 유교적 입장에서 해낸 이 학문을 '성리학'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성리학은 우주에 대한 답을 해내기 위해 노력했고, 인간의 마음의 근원에 대해서도 답했으며 궁극적으로는 유교적 수행을 통해 진리의 세계로 다가갈 수 있다는 인식론적 낙관주의도 탄생시켰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동양과학이 지체되기도 했습니다.

이전의 유학은 과학과 분리되어 발전 가능했습니다. 주희 이전까지의 과학은 동양이 서양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까닭입니다. 특히 유학과의 긴장감 없이 도교의 술사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존재하는 세계에 도전할 수 있었고, 그것은 의도하지 않게 많은 새로운 발견과 발명을 이뤘습니다.

성리학은 북방민족이 가진 야만성에서 중국인을 구원하기 위해 '예의'를 중심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경전의 하나였던 '예기'는 다시 재해석되어서 '대학'과 '중용'으로 분리 독립하고 발전해서 4서체계로 재편성됩니다. 법률이나 과학의 발전을 도왔던 경전체계는 말 그대로 하위체계가 되어 연구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성리학의 시대는 동양과학사적으로 보면 진정한 '중세 암흑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과학은 폄하되었습니다. 자연을 파괴하여 인간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는 야만의 산물로. 인간의 심성은 자연과 같아서 자연을 파괴하면 심성도 파괴되기 때문에 자연을 가꾸고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이 곧 '수양'이었던 것이지요.

조선건국과 분청사기의 발전

공민왕의 노력도 기울어가는 고려를 일으켜 세우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몇몇 권문세족이 몰락한 자리는 다른 권력가가 꿰찼습니다. 아래로는 왜구가 위로는 홍건적이 도적질을 하고 국경을 넘어왔기 때문에 이를 막아내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대농장을 가진 사람들은 야금야금 더 넓은 토지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고려왕실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백성들은 아우성쳤고 생각 있는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었지요. 공민왕 이후로도 세 임금이 더 있었으나 모두 꼭두각시였습니다. 권력은 힘 있는 신하들이 번갈아 차지하였습니다. 신진사대부의 일부는 홍건적과 왜구와의 싸움을 통해 영웅으로 부상한 이성계와 손을 잡고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웠습니다.

조선을 세운 성리학자들의 꿈은 '정전법(井田法)'으로 표현됩니다. 세상을 정의롭게 하는 것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왕도정치'라는 중요한 통치철학을 만들어냄으로써 공자의 '예치' 개념을 확대발전하고 완성시킨 맹자에 의해서 '정전법'은 정리되었습니다.

정전법은 한자의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땅을 아홉 등분하였다고 해서 나온 방법입니다. 8개의 밭에서 나온 수확물은 농사짓는데 참가한 농민들이 공평하게 나눠 가지고 나머지 하나의 밭에서 나오는 수확물은 세금으로 내는 것입니다. 세금은 다스림에 대한 보답이고 관리는 그 대가로 백성을 보살펴야 하는 것이지요.

이런 이상사회를 꿈꾸며 조선은 철저하게 유교 국가를 표방하고 탄생했습니다. 때마침 중국도 명나라가 중국을 장악하면서 홍건적은 사라졌고, 왜구도 최무선에 의해 화약과 화약무기가 만들어진 뒤로는 날뛰지 못하게 되면서 조선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인구도 늘고 생활도 나아졌습니다. 그런 시대니만큼 도자기에 힘이 넘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418년에 왕위에 오른 세종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출발했습니다. 세종과 당시 성리학자들은, 관리는 백성을 보살피는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의사이며 과학자이며 또한 예술가여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토록 문화와 의학과 과학에 힘을 쏟은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이제 도자기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세종시대의 도자기

꽃무늬 도장 문양이 선명하며 흐드러지게 꽃이 핀 봄날 같이 보일만큼 화려합니다.
▲ 분청사기 인화문 장군 꽃무늬 도장 문양이 선명하며 흐드러지게 꽃이 핀 봄날 같이 보일만큼 화려합니다.
ⓒ 광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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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청사기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요? 그렇습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난 뒤 안정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만들어졌던 바로 그 도장무늬토기를 닮았습니다.(제1화 참조)

골호란 불교에서 시신을 화장한 후 유골을 매장하는데 사용된 통일신라시대 뼈 항아리입니다. 도장을 찍듯 점선과, 꽃무늬를 찍어서 가득 채웠습니다.
▲ 인화문 녹유 골호 골호란 불교에서 시신을 화장한 후 유골을 매장하는데 사용된 통일신라시대 뼈 항아리입니다. 도장을 찍듯 점선과, 꽃무늬를 찍어서 가득 채웠습니다.
ⓒ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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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에 새겨진 무늬는 도장을 새겨 꾹꾹 눌러 만든 것이지요. 그래서 이것을 도장무늬라는 뜻으로 '인화문 분청사기'라고 부릅니다.

도장무늬토기가 만들어진 때와 같이 인화문 분청사기도 평화롭고 자유롭던 시절에 만들어졌습니다. 통일신라 최고의 문화황금기였던 신문왕 때와 조선 최고의 문화황금시대인 세종시대에 만들어진 두 그릇에서 같은 무늬수법이 나타난 것이 우연일까요?

통일신라에서 도장무늬토기는 귀족의 숫자가 많아졌기 때문에 늘어나는 토기수요를 맞추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인화문 분청사기도 비슷한 이유 때문에 만들어졌습니다. 도자기를 쓰려는 사람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지요.

고려시대 말 신진사대부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분청사기는 불과 100년도 못 되어 온 나라의 도자기가 되었습니다. 고려시대에 불과 41개에 불과하던 자기소는 폭발적으로 늘어나 세종시대에는 무려 324개나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도자기의 전성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고려시대 청자가마터가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에 설치된 국가 국영 도자소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과 비교해 보면 분청사기 가마터의 분포도가 얼마나 전국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지색이 뚜렷한 독특한 도자기가 만들어진 것은 이 때문입니다.
▲ 분청사기 가마터분포도 고려시대 청자가마터가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에 설치된 국가 국영 도자소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과 비교해 보면 분청사기 가마터의 분포도가 얼마나 전국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지색이 뚜렷한 독특한 도자기가 만들어진 것은 이 때문입니다.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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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필이면 세종시대에 이 인화문 분청자기를 만들기 시작했을까요? 이 물음은 왜 한글을 만들었고, 왜 자주적인 달력인 '칠성산내편'을 만들었느냐 하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왜 측우기를 만들고 수표를 만들고 해시계를 만들고 물시계를 만들고 농사직설을 만들었느냐 묻는 것과 같습니다. 대답은 하나입니다. 우리 민족의 삶의 질을 높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세종은 왕위에 오른 뒤 얼마 되지 않아 만드는 장인의 이름을 도자기에 새겨 넣도록 합니다. 이렇게 되자 최고급 도자기를 만들지 않으면 도공들도 살아남기 힘들어졌습니다. 고려청자는 철저하게 주문 제작이라 비용이야 얼마가 들든 원하는 명품만 만들어내면 되었지만 분청자기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무려 324개나 되는 자기소들은 무한경쟁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600년 전인 세종시대에 시장이 발달하고 자본주의가 성숙한 지금에서야 가능한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자기소들로서는 목숨을 걸고 고급 분청사기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도공들로서는 고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물론 운이 좋은 곳도 있었습니다. 질이 매우 좋은 흙이 나는 경상도 상주와 하동 그리고 경기도 광주는 그래서 최상급 분청사기를 만들어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런 운 좋은 몇몇 지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주어진 흙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손재주가 좋기로 우리 민족이 세계 최고 아니겠습니까? 지금 보아도 최고 명품으로 꼽힐 만한 분청사기들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이때쯤부터입니다. 이름을 걸고 만드는 것이니 최선을 다했던 것이지요. 그야말로 혼신을 다한 그릇은 그릇이 아니라 예술품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바로 '인화문' 기법이 등장합니다. 같은 무늬를 자유로우면서도 규칙적으로 빼곡하게 만들어내면 흙이나 유약이 가진 단점은 장점으로 변합니다. 이런 수법을 쓰면 아무리 질 낮은 도자기라도 제법 멋지게 변합니다.

이렇게 해서 분청사기는 한 단계 뛰어올랐습니다. 백성들 모두가 예술적 가치를 가진 도자기를 쓸 수 있게 되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도자기의 민주주의라고 불러야 할까요?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아도 우리글과 말을 쓰고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글과 분청사기는 같은 정신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 가지 분청사기

토기는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면 어디서든 만들어지고 어디서든 발견됩니다. 저장을 하지 않으면 굶어 죽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토기는 처음 모두에게 공평했습니다. (물론 청동무기가 만들어지기 전까지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만)

청자는 처음부터 그렇지 못했습니다. 청자는 신분의 상징으로 출현했습니다. 청자를 손에 쥔 사람은 세상을 얻은 사람들이고 그들을 위한 가마는 특별한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청사기는 다릅니다. 분청사기는 처음 토기가 그러했듯이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만들어졌습니다.

해마다 도자기 축제가 열립니다만 분청사기 축제가 열리는 곳은 청자나 백자보다 훨씬 많습니다. 분청사기는 마을 사람들과 숨 쉬고 마을 사람들의 생각을 담아 만들어져 그 어떤 도자기보다 서민적이고 마을색이 강합니다.(대략, 전라도의 상징은 덤벙분청자, 조화 박지 분청자, 충청도 분청사기는 철화분청자, 경상도의 상징 인화분청자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찮은 마을이 질 좋은 흙으로 분청사기를 만들기는 점점 어렵고, 설령 질 좋은 흙이 있더라도 공물로 바치고 나면 결국은 다시 질이 떨어지는 것들만 남게 됩니다. 특산품으로 나라에 내는 세금을 공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에서 쓰는 분청사기는 더욱 더 흙이 좋지 않았습니다. 절묘한 기법이 만들어진 것은 이런 마을에서입니다.

귀얄이라는 붓이 있는데 이것을 백토를 갠 물에 담갔다가 만들어 놓은 도자기에 쓱쓱 발라 구우면 빗질 자국이 멋지게 남은 분청사기가 됩니다. 이것을 '귀얄문 분청사기'라고 합니다.

귀얄무늬는 돼지털이나 말총을 넓적하게 묶어 만든 귀얄이라는 넓은 붓에 백토를 묻혀 그릇 표면에 백토분장한 분청사기입니다. 칠할 때의 속도감을 그대로 간직한 귀얄자국이 운동감있게 남아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도 같은 모양으로 만들 수 없는 자유로움 그 자체인 도자기입니다.
▲ 귀얄무늬분청사기대접 귀얄무늬는 돼지털이나 말총을 넓적하게 묶어 만든 귀얄이라는 넓은 붓에 백토를 묻혀 그릇 표면에 백토분장한 분청사기입니다. 칠할 때의 속도감을 그대로 간직한 귀얄자국이 운동감있게 남아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도 같은 모양으로 만들 수 없는 자유로움 그 자체인 도자기입니다.
ⓒ 서울시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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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아예 백토 물에 덤벙 담갔다가 꺼내면 불규칙하게 흘러내린 모양 그대로 구워지게 되는데 이것을 '덤벙 분청사기'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는 ‘분장무늬라고도 합니다. 백토가 절묘하게 흘러내린 자국까지 남아 있는 모습이 아슬아슬하기까지 한 절정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는 분청사기입니다.
▲ 분청사기 덤벙무늬 사발 다른 말로는 ‘분장무늬라고도 합니다. 백토가 절묘하게 흘러내린 자국까지 남아 있는 모습이 아슬아슬하기까지 한 절정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는 분청사기입니다.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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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초기에 이런 자유로운 생각을 했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흙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멋지게 변신할 수 있었습니다. 토기를 처음 만들 때 우리 인류의 마음은 이런 것이었겠지요?

분청사기 속에서 우리 민족은 적어도 조선시대가 아직은 자유로운 시대였던 때를 보여줍니다.

이 분청자들은 오늘날 보아도 전혀 예스럽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분청자가 오늘날의 정신세계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현대는 각자 개인의 가치가 존중되는 시대입니다. 분청자들은 청자처럼 자로 잰 듯한 규격을 갖추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흙의 상태, 유약의 상태 장인의 붓자국 하나까지도 전부 우연하게 만들어졌습니다. 모든 분청자는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시대는 우리들 모두가 하나하나 차이가 있고 그 차이가 존중받는 개성시대입니다. 분청자가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런 개성을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인화분청자

미리 만들어 놓은 도장을 그릇 표면에다 꾹 하고 누르면 모양이 새겨집니다. 그 부분을 파낸 뒤 백토를 채워 넣으면 인화문 분청사기가 만들어집니다. 꽃과 나비를 그린 꽃그림이 많았습니다. 왕실과 관청에서 주로 썼습니다.
▲ 분청사기 인화문 접시 미리 만들어 놓은 도장을 그릇 표면에다 꾹 하고 누르면 모양이 새겨집니다. 그 부분을 파낸 뒤 백토를 채워 넣으면 인화문 분청사기가 만들어집니다. 꽃과 나비를 그린 꽃그림이 많았습니다. 왕실과 관청에서 주로 썼습니다.
ⓒ 국립문화재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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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분청자

고급스러운 재료를 구하기 어렵게 되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예 백토로 전체를 뒤집어 씌워 못난 흙을 가린 뒤 날카로운 도구로 무늬를 만듭니다. 무늬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을 긁어내면 선명하게 도드라진 색의 대비가 멋스럽게 나타납니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병으로 야외에서 술, 물을 담을 때 사용하던 용기로, 자라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어 자라병이라 불립니다.검은색을 내기 위해 백토를 깍은 후 검은색 안료를 칠을 했는데, 재료는 철입니다.
▲ 분청사기박지모란문철채자라병 조선시대 만들어진 병으로 야외에서 술, 물을 담을 때 사용하던 용기로, 자라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어 자라병이라 불립니다.검은색을 내기 위해 백토를 깍은 후 검은색 안료를 칠을 했는데, 재료는 철입니다.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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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화분청자

철화백자의 경우는 고려시대 청자에서 구상화중심의 문양에서 벗어나 지극히 추상적인 그림이 많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도자기인데도 현대적인 느낌이 납니다.

도자기 표면을 백토로 뒤집어 씌운 후에 철분이 있는 안료로 그림을 그립니다.철분은 흑갈색으로 변하여 백색과 쥐색의 바탕과 어우려져 새로운 느낌을 자아냅니다.
▲ 분청사기 철화당초문항아리 도자기 표면을 백토로 뒤집어 씌운 후에 철분이 있는 안료로 그림을 그립니다.철분은 흑갈색으로 변하여 백색과 쥐색의 바탕과 어우려져 새로운 느낌을 자아냅니다.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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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도자기, #분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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