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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추석을 앞두고 금강산에서는 두 차례의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습니다. 정봉주(49) 전 민주당 의원도 그 중 2차(9월 29일~10월 1일)상봉에서,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던 북의 사촌형 봉학(77세)씨를 만났습니다. 어머니 이계완(81)씨와 남측의 사촌형 봉석(66세)씨와 함께 2박 3일간 봉학씨를 만났던 정 전 의원이 '이산가족 상봉기'를 보내왔습니다. [편집자말]
위 부터 왼쪽으로 정봉석씨, 정봉주 전 의원, 북측의 정봉학씨, 정 전 의원의 모친 이계완씨.
 위 부터 왼쪽으로 정봉석씨, 정봉주 전 의원, 북측의 정봉학씨, 정 전 의원의 모친 이계완씨.
ⓒ 정봉주 전 의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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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성사되는 것인지 실감 안 나

"60년 만의 만남이었지만 그 긴 세월을 아주 짧은 한 순간에 넘어섰다. 부둥켜 안고, 핏줄을 확인하고, 형제를 확인하고, 쏟아 낸 눈물은 60년 단절의 그 깊은 골을 너무도 한 순간에 쓸어버렸다."

나는 추석을 맞이해 일시적으로 재개된 이산가족 상봉자 가족으로 선정됐다.

남북관계는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단절됐다. 남과 북이 정치적인 문제점으로 인해 극도로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모든 분야에서 갈등만 고조되었고 대립은 점차 격화되었다. 남북관계가 뒷걸음치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으로 금강산 관광도 중단되었으며 그나마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개성공단만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남과 북의 관계가 이렇다 보니 이산가족 상봉행사도 중대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런데 비록 일시적이긴 하지만 추석을 맞이한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이루어지게 됐고, 그 200명 가족 안에 우리 가족도 포함되었다. 여전히 이산의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60년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남아 있는 8만의 이산가족들에게는 너무나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이지만 적십자 측으로부터 선정되었다는 연락이 왔을 때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기쁜 마음조차 일지 않았던 것이다. 진짜 성사가 되는 것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0년 전쟁이 나자마자 바로 행방불명된 사촌형. 집안의 장손으로 18세 어린 청년때 소식이 끊긴 뒤 77세의 노인이 되어서야 남측의 가족을 찾겠다며 수소문한 사촌형을 만난다는 것은, 행방불명이 되고도 10여 년이 지난 뒤에 태어난 나로서는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조카를 그리워하던 아버지로부터 수도 없이 들어 왔기에, 꼭 한번은 생사를 확인하겠노라고 늘 마음에 담아두어 왔기에, 그리고 3년 전 북측에서 찾는다는 연락을 받았던 일이 있었기에 아주 서서히 만난다는 설렘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2차 상봉단에 속했는데 2차 상봉은 1차 때와는 달리(1차는 남측의 가족이 북측에 연락을 해서 찾게 된 상봉단이다) 북측에서 먼저 연락을 해 왔고 남측의 가족이 만나겠다고 응답을 해서 만나게 된 경우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적십자 관계자들에 따르면 2차 상봉을 하자며 북측에서 먼저 연락을 해 온 사람들은 북에서 어느 정도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상봉 전날 강원도의 한 콘도에서 북측 가족에게 전달할 선물들을 접수하는데 적잖이 놀랐다. 적십자 측으로부터 선물은 작은 간단한 가방이면 될 것이라는 안내를 받고 순진하게(?) 간단한 가방을 갖고 온 우리 가족들은 '바른 생활'을 한 것에 대해 후회했다. 대부분 이민을 가듯, 이민용 대형 가방에 바리바리 잔뜩 물건들을 준비해 왔던 것이다. 후회해도 이미 늦었지만 우리 선물을 받고는 실망스러워 할 사촌형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드디어 군사분계선... 막연한 두려움이 밀려오고

북의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남측 군사분계선을 넘고 휴전선을 넘어 드디어 북측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군인들의 복장이 달라졌다. 말로만 듣던 인민군 복장의 군인들이 눈앞에 나타나자 차안에 타고 있던 가족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함께 간 안내원은 이런 저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며 금기사항을 열거한다. 긴장감이 더욱 팽팽해진다. 싸늘하다.

분단세월 그 오랜 기간 동안 반공 교육의 영향도 있겠지만 왠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막연한 두려움이 끝 모르게 밀려온다. 이 순간은 형제 가족을 만난다는 설렘도 없다. 그저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싶을 뿐이다. 한 분이 괜히 왔다며 돌아갈 수 없느냐고 농을 던진다. 그 말에 괜히 호기 좋게 웃어보지만 여전히 얼굴들은 더욱 더 굳어간다. 

여섯 번 이어지는 상봉 중에 첫 번째 만남이다. 60년의 세월을 기다린 분들이다. 남측의 가족 450여명이 10분 먼저 공동 면회 장소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으면 잠시 뒤 북측의 가족들이 들어올 것이다.  모두 긴장하고 있다. 가족들을 만나기도 전에 이미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분들도 있다. 그 오랜 시절 가슴에 담아두었던 슬픔이 터지고 있는 것이다. 눈들이 벌겋게 충혈 되기 시작했다.

"북측의 가족들이 입장을 하고 있습니다."
안내 방송이 울리자 한 순간 멍해진다. 입구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누가 먼저인지도 모르게 통곡이 터졌다. 면회장은 일순 울음바다로 변했다. 아직 찾지 못하는 가족들은 우왕좌왕이다. 가족들 번호표를 찾으며 헤매기 시작했다.

함께 간 사촌형(봉석씨)이 외쳤다. 9살 때 헤어질 당시의 모습이 선하다며 만나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장담하던 부산의 사촌형이다. 정말 한 눈에 찾아냈다. 

"봉학아!" 형이고 뭐고 없다. 형이라고 부를 시간도 아깝다. 왔다. 우리 사촌형 봉학이 형이다. 사촌형을 만났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지난 20년 동안 제사를 지냈던 그 사촌형이 멀쩡하게 살아서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사촌형은 멍하다. 우리가 누군지 확인하기 시작한다. 너무도 담담하고 침착하다. 이내 작은 어머니, 사촌 동생들을 확인하고는 눈물이 고인다. 어깨들 들썩인다. 고맙다며,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있어서 고맙다며 사촌형의 손을 매만졌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 난리 통에 헤어져 행방이 끊겼는데, 꼭 죽은 줄만 알고 있었던 사촌형이 건강하게 살아서 우리 앞에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사촌형도 자신의 어머니며 할머니며 작은 아버지들이며 동생들의 소식을 물었다. 물론 살아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모두 다 돌아가셨다고 하니 너무도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양측의 가족을 확인하며 안부를 묻고 사진을 서로 보여준다. 이산 당사자인 할머니며 아버지는 이제는 모두 세상을 뜨셨다.

헤어져 있던 시간이 너무 길었다. 60년, 반세기도 훌쩍 넘어버린 탓에 이산 당사자인 1세대들은 이제 많이 돌아가셨다. 남아 있는 생도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1세대들은 사라지고 그들로부터 얘기를 전해 들으며 자라왔던 1.5세대나 2세대들이 근근이 그 만남의 당사자가 된 것이다. 이산의 당사자들에게 상봉의 기회를 주지 못한 것이 얼마나 죄스러운 일인가. 사라지는 1세대를 생각하며 서글픔과 죄스러움이 함께 밀려왔다. 

어제 아침 식사하고 나들이 갔다 오늘 다시 집에 온 듯한 형님

정봉주 전 의원과 북의 사촌형 봉학씨.
 정봉주 전 의원과 북의 사촌형 봉학씨.
ⓒ 정봉주 전 의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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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 상봉이었다. 너무나 짧으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그 오랜 이별의 시간을 떨쳐버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면회장도 이젠 울음이 그치고 기쁘고 반가운 웃음이 터져나온다. 핏줄이라는 것이 이렇게 놀라운 것이다. 오래 떨어져 있던 가족을 만났다는 느낌은 전혀 없고 어제 아침 식사를 하고 이웃 나들이를 하다 오늘 다시 집에 들어온 형님 같았다. 아무런 서먹함이 없다.

아! 이별의 기간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우리는 한 가족인 것이다. 한 형제 한 핏줄을 확인하는 것은 너무도 편안하게, 쉽게 다가왔다. 저녁 만찬 시간에 술 한 잔 기울였다. 편안하다. 행복하다. 가족이라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한 민족이라는 것이 이렇게 깊고 끈끈한 것이구나!

사촌형은 계속 말한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둘째 날 또 점심을 곁들인 세 차례의 만남을 가졌다. 남과 북의 이산가족 모두 행복하다. 남아 있던 일말의 긴장감도 모두 사라졌다. 야외 상봉장에서 낮술에 취해, 가족의 정에 취해 모두 흥겹다. 여기저기서 노랫소리가 들린다. 함께 일어나서 어깨춤을 추기도 한다. 목이 터져라 외치고 싶다.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더 이상 헤어지지 말자고! 흥분을 가눌 수 없다. 기쁨을 주체할 수 없다. 그래서 헤어져야 할 시간이 더욱 더 슬퍼지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날 아침 두 시간의 작별 상봉시간이다. 무엇 하나 더 줄 것이 없는지 안절부절못했다. 시계를 풀어주는 사람, 차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주는 사람, 3일 동안 찍었던 사진을 건네주는 사람,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까 조금이라도 더 깊게 가족의 흔적을 남기려고 한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 왔다. 처음 만날 때처럼 다시 흐느낌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서로 걱정 말라며 꼭 건강하게 살아있어야 다시 만난다고 건강하라고, 건강하라고 격려한다. 얼굴을 쓰다듬는다. 껴안고 볼을 매 만진다. 큰 절을 올린다. 무엇을 더 해야 이 이별을 뛰어 넘을 수 있을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북의 가족들이 면회장소를 먼저 떠났다. 꿈결 같던 3일의 시간이 망각의 뒷장으로 사라지며 다시 참았던 눈물이 터진다. 통곡의 바다다.  북측의 가족들이 모두 차에서 떠날 준비를 하고 우리는 차 밖에서 배웅을 했다. 차창 밖으로 손들을 내밀고 한번이라도 더 만지려고 안간힘을 쓴다.

사촌형은, 3일 내내 약간의 눈물만 보이고 그렇게 당당하던 그 사촌형은, 우리 가족을 찾는 눈빛으로 서두른다. 아마 이번 만남 뒤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다시 기약없는 작별... 그렇게 당당했던 사촌형도 한없이 흐느끼고

마지막으로 작은 어머니며 사촌 동생들의 손을 잡고는 이내 무너진다. 앞자리에 기대서는 흐느낀다. 3일 동안 그렇게 당당했던 형이다. 그 모습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어깨를 들먹이며 한없이 흐느낀다. 통곡한다. 어찌 이 슬픔을 다 이겨낼 수 있겠는가!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3일 동안의 혈육 상봉은 더 큰 숙제와 과제를 남겨 놓은 채 막을 내렸다.

모두가 떠난 뒤 점심을 기다리던 가족들은 허탈한 모습으로 삼삼오오 숙소 앞에서 모여 앉았다. 선물을 조금 더 싸오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는 가족, 돈이라도 조금 더 줬으면 하는 아쉬움에 한숨을 쉬는 가족들. 북에 퍼주었다고 늘 비판했다는 것이 너무 후회된다는 가족. 모든 것이 다 아쉬웠다. 그렇게 어려울 것이라고 봤던 상봉은 너무 쉽게 다가왔다. 체제도 이념도 정치적 차이도 넘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입을 모은다.

모두 적십자사에게 감사해 한다. 아마 이산가족을 만난 것에 대해 당국에도 감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북의 가족을 만나보니 이 상봉이 그렇게 어려웠던 일인 것인가 하는 의아심이 든다. 인간의 본성은, 가족과 혈육은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뛰어넘는 것을 경험했다. 체제의 차이로 인한 갈등과 대립, 조정의 과정은, 정치적인 측면의 과정을 늘 겪어나가야 할 것이다. 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산가족의 상봉 문제는, 인도주의적이라는 수사를 붙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무엇보다도 우선돼야 할 것이다. 당국에서 조금만 더 구체적인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이산가족 상봉정책은 당사자들의 눈높이에서 찾아야

정봉학씨가 보여준 훈장들.
 정봉학씨가 보여준 훈장들.
ⓒ 정봉주 전 의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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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들이 사라지기 전에 이산의 아픔, 단절의 슬픔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1세대들에게 슬픔과 원망을 주는 후손이 될지, 기쁨과 희망을 주는 후손이 될지는 우리 자신의 판단과 결단에 달려있다. 인간을 정치의 색깔로 덧칠하기에 정치라는 색은 너무 묽다. 덧칠할 수 없다. 그 구체적인 노력, 눈높이를 맞추면 된다. 이산의 정책은 당사자 가족의 눈높이에서 찾으면 모든 것이 보일 것이다.

상시 상봉을 한다든지, 정치·군사 문제와는 별개로 진행하는 정책을 취할 것인지 하는 것은 기교에 불과하다. 당국자의 눈에 이산가족의 눈을 통일시키려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슬픔이 기쁨으로 전환되는 날 민족의 잔치가 시작되는 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남으로 향하며 북의 농촌 들판을 가로질렀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 농사를 짓고 있는 농민들, 저들이 우리의 가족이라는 느낌을 갖기에, 그 깊은 애정을 확인하기에 3일은 충분했다. 심지어 들판의 콩 농사가 잘 안된 것을 보면서도,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소를 보면서도 이제는 가슴 깊은 곳에 슬픔이 밀려오는 것은 우리가 가족이라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못 만난 이산가족이 만남의 기쁨을 누리고, 상봉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편히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는 것이 이제는 그리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라는 바람은 나만이 가졌던 것은 아닐 것이다.

서쪽 하늘에 기울어가고 있는 아름다운 저녁노을은 남과 북을 가리지 않고 한반도 전체를 모두 비추고 있었다.


태그:#이산가족, #정봉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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