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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ㄱ. 서울사람은 책을 읽어 무얼 하나?

 

 여러 달에 걸쳐 《탐라기행》(학고재,1998)이라는 책 하나를 읽어 냅니다. 책을 다 읽을 무렵, 이 책을 쓴 일본사람 시바 료타로 님 다른 책 《한나라 기행》이 함께 우리 말로 옮겨져 있음을 알아챕니다. 아침저녁 전철길로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가운데 《탐라기행》과 더불어 《까마귀의 죽음》(소나무,1988)을 겹쳐서 읽었습니다.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아르고스,2005)하고 《문명의 산책자》(산책자,2009) 또한 겹쳐서 읽고 있습니다. 어느 책이든 한달음에 읽어치우기에 너무 아깝기 때문입니다.

 

 서른 쪽을 읽어도 '이런! 오늘 너무 많이 읽었잖아?'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무 쪽 안팎만 조금조금 읽고 다음 책을 읽어 주고 싶은데, 사람들이 낑기고 찡기고 밟히고 밀리는 지옥철에서는 가방에서 다른 책을 꺼낼 수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쉰 쪽도 읽고 백 쪽도 읽습니다. 그러다가 읽기를 멈추고 책 앞뒤 빈자리에 글월 몇 줄을 짤막하게 적바림하기도 합니다.

 

 책을 읽고 나서 느낌글 쓰기를 즐겨하고 있다 보니, 이 책들 말고도 요 한 달 남짓 전철길에서 '읽어치운' 책들이 살림집 책상맡에 잔뜩 쌓여 있습니다. 읽기는 끝없이 읽어댈 수 있는데, 느긋하게 책상맡에 앉아서 느낌글을 갈무리할 겨를이 없습니다. 옆사람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는 고단한 전철길에서는 책이라도 쥐고 있어야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 책은 자꾸자꾸 읽는데, 어쩌면 이렇게 읽기만 되풀이하면서 외려 내 마음을 제대로 못 다스리지는 않느냐 싶습니다.

 

 오늘은 아침길에 모처럼 자리를 하나 얻어서 앉는데, 제 옆에 앉은 젊은 사내가 팔짱을 굳게 끼고 당신 옆으로 몸을 부풀리며 혼자만 넓게 가려고 합니다. 이런 불쌍한 사람한테 한 마디를 할까 하다가 괜히 짜증 묻은 말이 나올까 싶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선 채로 갑니다. 그렇지만 옆사람을 들볶는 이 젊은 사내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어차피 서서 가더라도 말 한 마디라도 해 주고 일어서야 했구나' 하고 뒤늦게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아침저녁 출퇴근 또는 통학에 나서는 사람들은 사람을 사람 아닌 짐짝으로 여길 수밖에 없도록 시달리고 억눌리면서 사람사랑이나 사람믿음을 조금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새삼 느낍니다.

 

 그런데 이런 악다구니 같은 도시에, 더구나 서울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북적 모여 있습니다. 한손에 '진보'를 들든 '보수'를 들든 '중도'를 들든(요사이는 거짓 '진보-보수-중도'를 드는 사람이 퍽 늘었습니다), 저마다 좋아하거나 바라는 옳은 생각을 따르자면 도시 아닌 시골에 살 노릇이요, 평화와 안정과 민주와 복지와 통일을 헤아린다면 이 또한 도시 아닌 시골일 텐데, 아니면 도시살림을 시골살림처럼 가꾸어야 할 텐데, 아니 도시이고 시골이고를 떠나 두레를 하는 매무새와 어깨동무를 하는 마음가짐이어야 할 텐데, 왼쪽에서고 오른쪽에서고 넉넉함이나 느긋함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저부터 서울에 매인 주제에 이런 말을 늘어놓을 구실이 없다고 하겠는데, 고향 인천 골목동네에서 조용히 이웃과 어울리면서 살고플 뿐이지만 인천시는 2025년 도시계획을 새로 내놓으며 저처럼 아파트에서 안 살거나 못 살 사람은 다 내쫓으려 합니다. 이제는 아예 수도권에서 떠나 버릴 꿈을 꿈 아닌 삶으로 이루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20년을 안심하고 산다는 아파트'가 아닌 '200년을 걱정없이 살 작은 집'이 그립습니다.

 

 ㄴ. 일하는 사람은 책을 읽는가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거나 덜 읽는다는 소리가 높으면서도 새로운 책은 꾸준하게 쏟아집니다.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면 새로운 책을 쏟아낸다 한들 책을 팔기 어려울 텐데, 크고작은 출판사에서는 새로운 책 빚어내는 일을 그치지 않습니다. 바쁘고 힘들고 돈이 없다는 여러 가지 까닭으로 책을 안 읽거나 덜 읽는 요즈음 사람들인데, 새로 쏟아지는 책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더없이 싱그럽고 훌륭한 책이 있는 가운데 돈맛을 노리고 있는 얄딱구리하고 얕은 책이 있습니다. 어린이책 만드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선배가 '얼마 앞서 나온 새책'이라면서 한 권을 선물로 줍니다. 고맙게 받아들이며 전철길에 읽어 봅니다. 줄거리는 괜찮고 짜임새 또한 알뜰하다 싶으면서도 '이쯤 되는 눈높이 책을 굳이 한국말로 옮겨야 했는가?' 싶어 안타깝습니다. 지난날 우리 나라에는 '읽을 만하거나 읽힐 만한 어린이책이 드물었다'고 하겠으나, 오늘날 우리 나라에는 '나라밖 훌륭한 작품이 거의 빠짐없이 옮겨지기도 했으나, 나라밖 고만고만한 작품마다 거의 훑어가면서 옮겨내고' 있기도 합니다.

 

 바쁜 틈을 내어 헌책방마실을 합니다. 고작 이삽심 분밖에 둘러보지 못하는데,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책이 눈에 뜨입니다. 몇 달쯤 앞서 '가벼운 입놀림과 몸놀림' 때문에 적잖이 말썽거리가 된 황석영 님이 1993년에 낸 책입니다. 예전에 이 책을 읽은 적이 있으나, 잘 들고 다니며 읽다가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걸고는 그만 놓고 나와서 잃어버려 없기에 이참에 새로 장만합니다. 이분 책을 다시 읽고픈 마음은 없었으나, 문득 궁금했습니다. 열 몇 해 앞서 황석영 님은 어떤 말마디로 우리 앞에서 기나긴 이야기를 풀어 놓았을까 하고. 이분 삶은 예전과 오늘이 얼마나 다른가 하고. 어쩌면 먼 지난날부터 속없는 짓을 일삼았는데 우리들이 제대로 느끼거나 깨우치지 못한 대목이 있지 않은가 하고.

 

  만화쟁이 박희정 님 '첫 번째 짧은만화 모음'인 《만화가네 강아지》(1996)를 읽고, 어린이놀이를 살피는 편해문 님 '첫 번째 사진작품 모음'인 《소꿉》(2009)을 읽습니다. 만화도 읽고 사진도 읽습니다. 저로서는 그림도 읽고 글도 읽습니다. 글만 읽지 않습니다. 만화도 읽어내야 한다고 느끼고 사진도 읽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이 아니라 속에 담아 놓은 속말과 속삶과 속알맹이를 차근차근 읽어내야 비로소 책읽기다운 책읽기를 하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엊저녁 사진잡지 일꾼과 어린이책 출판사 일꾼하고 어울리며 술을 한잔 걸치고 느즈막하게 집으로 돌아옵니다. 거의 막차라 사람이 엄청나게 붐볐는데, 사람물결에 휩쓸리다가 그만 엉뚱한 역에서 내려야 하고 맙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차가 끊어질까 걱정입니다. 집에서 홀로 아기를 보는 옆지기가 근심입니다. 아주 고단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옵니다. 두 식구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습니다. 옷을 훌렁 벗습니다. 씻을 기운은 없으나 이튿날 아기와 옆지기가 먹을 죽을 끓일 쌀을 씻어서 불립니다. 가을날이 쌀쌀하다지만 저는 알몸이 되어 이부자리로 파고듭니다. 밤나절 아기가 퍼뜩 깨어 아빠 머리를 붙잡고 옹알이를 오래오래 합니다. 한참 옹알이 주고받기를 하다가 스르르 잠이 듭니다. 집살림과 아기보기도 책읽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시민사회신문>에 함께 싣습니다.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까마귀의 죽음

김석범 지음, 김석희 옮김, 각(2015)


태그:#책읽기, #전철길, #책, #책이야기, #책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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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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