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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샤 대협곡의 정화만 모아뒀다는 샤오싼샤 디취샤의 절경.
 싼샤 대협곡의 정화만 모아뒀다는 샤오싼샤 디취샤의 절경.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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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 제일 절경'으로 중국 위안(元)화에도 등장하는 취탕샤. 취탕샤의 물 흐름은 이미 정지되어 있다.
 '천하 제일 절경'으로 중국 위안(元)화에도 등장하는 취탕샤. 취탕샤의 물 흐름은 이미 정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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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에게 있어 양쯔강(長江)은 각별하다. 양쯔강은 황허(黃河)와 더불어 중화문명을 낳은 어머니의 강(母親河)으로 불린다. 중국인들은 총 길이 6397㎞의 양쯔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으로 싼샤(三峽)를 주저 없이 꼽는다.

싼샤는 충칭(重慶)시 펑제(奉節)현에서 후베이(湖北)성 이창(宜昌)시까지 전체 길이 192㎞에 달하는 대협곡 지대다. 서에서 동으로 이어지는 취탕샤(瞿唐峽), 우샤(巫峽), 시링샤(西陵峽) 3대 협곡을 총칭한다. 강 양쪽으로 해발 1000~1500m에 달하는 고산절벽이 마주보고 줄지어 펼쳐진다.

싼샤는 200만년 전 지구의 지각 변동으로 생겨났다. 싼샤 일대는 본래 고산 분지였다. 떨어져있던 아시아와 인도 대륙이 합쳐지면서 히말라야산맥이 솟아나고 티베트고원이 융기했다. 여기에 싼샤 지대도 지각이 뒤틀리면서 웅장한 협곡으로 터져나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현지 주민들은 싼샤가 신이 내린 산물이라 믿고 있다. 신이 중국의 젖줄인 양쯔강을 하류까지 흘러내려 보내기 위해 돌산맥을 칼로 내리쳐 싼샤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부터 이런 싼샤의 절경에 취해 수많은 문인들이 방문했다. 이백, 두보, 백거이, 구양수, 소식 등은 싼샤에 와서 고금에 길이 남을 명문을 남겼다.

싼샤는 위대한 시인 굴원과 천고의 미인 왕소군을 낳기도 했다. 굴원은 전국시대 초나라의 정치가이자 초사로 대표되는 중국 초기 시단을 확립했다. 망해가는 조국을 염려하던 애국시인은 시를 읊조리다 돌을 안고 양쯔강의 한 지류에 몸을 던졌다. 해마다 단오에 양쯔강에서 벌어지는 용선(龍船) 경기는 굴원의 혼을 위로하는 의식에서 비롯됐다.

우리에게 싼샤는 <삼국지>의 무대로 유명하다. 충칭과 청두(成都)를 근거지를 둔 유비의 촉(蜀)나라, 손권이 통치한 오(吳)나라의 영토였던 후베이성, 북쪽 조조의 위(魏)나라는 싼샤 일대를 두고 쟁탈전을 벌였다.

싼샤댐은 언제나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맑은 날에도 뿌연 안개가 끼어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
 싼샤댐은 언제나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맑은 날에도 뿌연 안개가 끼어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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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서부지역의 물류 혁명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되었던 싼샤댐의 갑문 및 선박 통항로.
 중국 서부지역의 물류 혁명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되었던 싼샤댐의 갑문 및 선박 통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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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싼샤가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은 것은 싼샤댐이 건설됐기 때문이다.

싼샤댐은 세계 최대의 수리공사다. 만리장성 이래 2300여년 만에 이뤄진 중국 최대 역사(役事)이기도 하다. 싼샤댐은 높이 185m, 길이 2309m, 너비 15m에 달한다. 높이 48m, 폭 900m로 웅장한 위용을 뽐낸다는 나이아가라폭포도 싼샤댐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다.

싼샤댐의 저수량은 엄청나다. 최고 수위 175m에 총 저수량 393억㎥로, 소양강댐의 15배에 달한다. 초당 방류량은 10만2500t인데 100m 이상의 낙차로 댐 아래에 설치된 26개의 수력발전기를 돌린다. 1기의 발전량만 70만㎾로 압록강 수풍발전소의 발전량과 맞먹는다. 하루 1820만㎾, 연간 847억㎾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세계 최대의 댐이라는 명성만큼이나 소요된 총 공사비는 약 300억 달러(한화 약 35조1000억원)에 달한다. 앞으로도 수몰지 이주민 정착과 양쯔강 수질 개선을 위해 수십억 달러가 더 필요하다.

양쯔강은 지난 2000년 동안 10년 단위로 200번 이상 큰 홍수가 일어났다. 홍수는 양쯔강 주변을 황폐화시키고 민심이 동요해 왕조의 운명까지 좌우했다.

홍수를 막기 위해 1919년 쑨원(孫文)은 처음으로 양쯔강에 댐을 건설하는 구상을 내비쳤다. 쑨원에 이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도 1932년 싼샤 일대를 측량하여 댐 건설에 위한 조사를 벌였다.

1954년 20세기 최대의 홍수가 양쯔강을 휩쓸었다. 수십만 명이 죽고 천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한 대참사였다. 이에 마오쩌둥(毛澤東)은 1956년 댐 건설을 정식으로 결정하고 양쯔강을 직접 시찰했다. 하지만 초대형 댐을 건설하기에는 당시 중국은 토목기술이 낮고 건설재원 확보가 어려웠다.

오랫동안 보류됐던 계획은 1980년 덩샤오핑(鄧小平)이 충칭에서 싼더우핑(三斗坪)까지 순시하면서 급물을 탔다. 개혁개방 후 급속한 경제 성장 속에 심화되는 전력난은 댐 건설의 당위성을 더해주었다.

새로이 지어진 펑제항구. 선착장에서 항구 청사까지 올라가려면 땀을 꽤나 빼야 한다.
 새로이 지어진 펑제항구. 선착장에서 항구 청사까지 올라가려면 땀을 꽤나 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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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산간 경사로에 들어선 펑제현 숙박거리. 펑제 사람들은 개선된 해상 교통조건 덕에 관광객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가파른 산간 경사로에 들어선 펑제현 숙박거리. 펑제 사람들은 개선된 해상 교통조건 덕에 관광객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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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부가 싼샤댐을 건설한 목적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양쯔강 중상류 일대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홍수의 위험으로부터 영원한 해방이었다. 둘째, 고질적인 전력난을 해소하여 산업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해서였다. 셋째, 선박의 운항 조건을 개선하여 낙후된 서부지역을 부흥시킬 물류혁명의 주춧돌을 세우려는 목적이었다.

장밋빛 미래와 비전을 제시했지만, 구체적인 계획안이 수립된 뒤 중국 사회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댐 건설능력에 대한 회의에다 싼샤댐이 가져올 수많은 재앙을 우려한 지식인과 전문가 그룹이 격렬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런 논란을 보여주듯, 싼샤댐 건설안이 통과된 1992년 4월 전국인민대표회의(全人大)에서는 많은 반대표와 기권표가 나왔다. 투표 참가자 2608명 가운데 1767명만이 찬성하고 33%에 달하는 841명이 반대하거나 기권했다. 중국 전인대 역사상 전무후무한 투표 결과였다.

1994년 12월 오랜 염원 끝에 싼샤댐 건설의 첫 삽을 부었다. 싼샤댐 건설사업은 네 단계로 나뉘어졌다.

1기 공정은 1994~1997년으로 기초 공사에 전념했다. 1998년부터 시작된 2기 공정은 댐 축조와 갑문 및 선박 통항로 건설, 물 채우기 작업이 2003년까지 이뤄졌다. 2006년에 끝난 3기 공정은 100여만 명에 달하는 수몰지 주민 이주, 175m까지 수위 올리기, 발전기 가동 등으로 구성됐다.

올해 말까지 진행되는 4기 공정에서는 모든 발전기의 가동, 환경보호 및 재해방지 공사, 이주 사업 등이 이루어져 마무리된다. 2~3기 공정에서 싼샤댐 공사의 핵심 사업이 완료되면서 중국정부는 2006년 5월 완공식을 가졌다.

댐이 완공되면서 싼샤는 옛 모습이 거의 남지 않게 됐다. 60m에 불과했던 강 수위가 175m까지 올라가면서 강폭은 최대 2㎞까지 넓어지고 수심은 깊어졌다. 깎아지는 듯한 절벽 봉우리는 이제 손에 잡을 수 있을 듯 낮아졌다.

이제 백제성은 섬으로 변했다. 천여년 된 성벽은 물에 잠긴 채 일부 건축물만 섬 정상에 남아있다.
 이제 백제성은 섬으로 변했다. 천여년 된 성벽은 물에 잠긴 채 일부 건축물만 섬 정상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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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가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는 유비탁고의 현장인 탁고당(託孤堂). 당시 인물들의 조각상에 명찰이 적혀 있다.
 유비가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는 유비탁고의 현장인 탁고당(託孤堂). 당시 인물들의 조각상에 명찰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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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싼샤가 662㎞에 달하는 거대한 저수지로 바뀌면서 주변 역사 유적은 대거 수난을 당했다. 높아진 강물로 1200여에 달하는 유적이 수몰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송나라 때 윈양(雲陽)현에 세워진 장비묘는 당초의 위치에서 32㎞ 떨어진 곳으로 옮겨졌다. 장비묘는 유비의 당부를 잊고 술을 마시다 부하들에게 살해당한 장비의 수급이 묻힌 곳이다. 돌산에 세워진 시바오자이(石寶塞)도 정문에 절반 가까이 물에 잠겨 건물 주위에 제방을 쌓아야만 했다. 시바오자이는 높이가 56m에 달하는 고대 목조 건축물로, 관우를 모시는 사당으로도 유명하다.

2008년 흉노왕 선우에게 강제로 시집을 보내졌던 한나라 미인 왕소군의 고향인 쌍시는 황톳물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굴원의 고향인 즈구이(秭歸)도 수몰되어 마을 전체가 싼샤댐 북쪽으로 옮겨졌다. 굴원사에 원래 자리에서 고지대로 이사해야만 했다.

싼샤가 시작되는 펑제(奉節)현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펑제는 싼샤댐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고지대로 옮겨졌다. 가파른 산비탈에 건설된 신도시는 지대가 물에 휩쓸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돌로 축대를 쌓아야만 했다.

현청에서 9㎞ 떨어진 백제성은 육지에서 떨어져 섬으로 변했다. 백제성은 오나라 정벌에 실패한 유비가 죽어가며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한 '유비탁고'(劉備託孤)로 유명한 곳이다. 현재 백제성은 천여년 된 성벽은 철거되거나 물에 잠겼고 일부 건축물만 섬 위에 남아있다.

사라진 것은 백제성벽만이 아니다. 백제성에서 바라볼 수 있는 쿠이먼(夔門)은 절반 가까이 물에 잠겨 협곡의 풍광을 잃어버렸다. 쿠이먼은 싼샤의 첫 번째 협곡인 취탕샤(瞿唐峽)의 시작점으로, 수려한 풍광과 깎아지는 듯한 절벽으로 이름 높았다. 이 때문에 취탕샤는 전장 8㎞에 불과했지만, 좁고 웅장한 협곡으로 싼샤를 대표했었다.

지반이 불안정한 토사 위에 건설된 우산의 고층 건물들. 경사가 급한 산비탈에 세워진 신도시는 보기에도 아찔하다.
 지반이 불안정한 토사 위에 건설된 우산의 고층 건물들. 경사가 급한 산비탈에 세워진 신도시는 보기에도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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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으로 변한 샤오싼샤의 한 농가. 2008년 현재 싼샤댐 수위는 165~175m를 오르내리고 있다.
 섬으로 변한 샤오싼샤의 한 농가. 2008년 현재 싼샤댐 수위는 165~175m를 오르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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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巫山)현은 싼샤댐 건설로 잠긴 수몰지의 고민을 보여주는 곳이다. 우산은 싼샤 192㎞ 구간에서 중간에 위치해 있다. 싼샤의 정수만 모아놓았다는 샤오(小)싼샤와 웅장한 우샤 12봉을 간직해 언제나 활력이 넘친다. 인구가 그리 많지 않지만(약 50여만 명) 그보다 5배가 넘는 관광객이 우산을 찾기 때문이다.

다른 수몰 도시와 마찬가지로 우산도 도시 전체가 고지대로 옮겨졌다. 가파른 비탈을 뒤덮은 건물들은 돌로 쌓은 축대 위에 세워져 보기에도 위태롭다. 토사 유실이 빈번하고 날림으로 지어진 건물이 많아 현지 주민들은 불안감을 지닌 채 살고 있다.

우산 주민들을 괴롭히는 또 다른 불청객은 지독한 안개와 높은 습도, 변화무쌍한 날씨다. 댐 건설 이후 싼샤는 유속이 거의 없는 거대한 호수로 변했다. 협곡에 둘러싸인 우산은 사시사철 심각한 연무(煙霧)가 발생하고 있다. 일기예보가 필요 없을 만큼 하루에도 여러 차례 변하는 날씨에 주민들은 항상 우산을 끼고 다닐 정도다.

샤오싼샤 일대는 수몰민의 한과 눈물이 서려 있다. 댐 건설로 싼샤 주변의 주요 도시 22개와 1700여개의 마을이 물에 잠겼다. 보상을 위해 공식적으로 파악된 이주민은 140여만 명. 통계에서 제외된 사람까지 포함해 200만 명에 가까운 수몰민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샤오싼샤 계곡 내 있는 다창(大昌)진도 이주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다. 다창진은 3세기부터 건설된 둔전(屯田)마을로 마을 전체가 국가문화재였다. 명·청대부터 축조된 성벽과 민가가 잘 보존되었기 때문. 2006년 10월 마을이 수몰되면서 중국정부는 다창진 주민들을 12㎞ 떨어진 신도시로 강제 이주시켰다. 마을은 물이 잠기고 가치 높은 몇몇 민가만 선별해 옮겨졌다.

정부의 이주사업은 끝났지만, 수몰민의 고난은 시작됐다. 중국정부는 옛 민가에 대한 소유권을 귀속하면서 낮은 보상비만을 지불했다. 이주민을 위한 마련한 아파트도 부실공사로 지어져 원성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농사짓던 수몰민들은 대체할 생계수단을 찾지 못해 정부 보조금에 기대어 살고 있다.

특이한 기암괴석과 동굴이 많은 샤오싼샤의 바우샤.
 특이한 기암괴석과 동굴이 많은 샤오싼샤의 바우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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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의 파진 틈에 놓여진 현관. 싼샤댐으로 강 수위가 올라가면서 적지 않은 현관과 부장품이 약탈당했다.
 절벽의 파진 틈에 놓여진 현관. 싼샤댐으로 강 수위가 올라가면서 적지 않은 현관과 부장품이 약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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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른 물로 많은 경관이 훼손됐지만, 샤오싼샤는 여전히 싼샤 관광의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샤오싼샤를 제대로 보려면 우산항에서 전용 유람선을 갈아타야 한다. 유람선은 오직 다닝허(大寧河)만을 오가며 관광객에게 샤오싼샤의 아름다움을 펼쳐 보인다.

샤오싼샤는 우산현청에서 옛 다칭진까지 약 60㎞에 달한다. 남에서 북으로 이어지는 룽먼샤(龍門峽), 바우샤(巴雾峽), 디취샤(滴翠峽) 세 협곡을 가리킨다. 댐 건설 이전 샤오싼샤는 양쯔강의 물이 닿지 않았다. 오랜 옛날 협곡 속 비경을 간직한 샤오싼샤를 현지인들은 '신선들이 사는 맑은 계곡'이라 불렸다. 하지만 지금 샤오싼샤도 수심이 수십m에 달하는 저수지로 바뀌면서 황톳물이 들어찼다.

지금은 강물 속으로 사라졌지만, 룽먼샤는 10여㎞에 달하는 잔도(棧道)가 유명했다. 잔도는 깎아지는 절벽 중간을 뚫어 길을 만들거나 절벽에다 나무를 박아 기나긴 길을 만든 것이다. 배를 이용하기 힘든 양쯔강 구간이나 지류에 수없이 만들어진 고대 도로인 셈이다. 현재는 롱먼샤 뿐만 아니라 취탕샤와 우샤의 잔도도 물에 잠긴 상태다.

바우샤부터는 특이한 기암괴석이 줄이어 나타난다. 호랑이가 뛰어오르는 듯한 절벽 중간에는 동굴이 있어 호랑이가 금방 튀어 나올 것만 같아 보인다. 말을 타고 돌아가는 듯한 마구이산(馬歸山), 높은 산이 연꽃 봉오리 같은 롄타이산(蓮臺山), 퇴적한 단층 절벽에 용이 움직이는 듯한 형상이 수놓아져 있는 용진(龍進) 등이 눈앞에 펼쳐진다.

바우샤부터 하나둘씩 눈에 띄는 현관(懸棺)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이로움을 준다. 현관은 절벽 중간의 파진 틈에 관을 놓아두는 일종의 풍장이다. 중국 서남부 지역에 사는 소수민족의 장례 풍속이다. 석관과 나무관 두 종류가 있는데, 2000년 넘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높이가 높을수록 하늘 높이 올라간다고 여겼기에, 왕족이나 귀족은 높은 절벽에 관을 놓았다. 샤오싼샤에서 가장 높은 현관은 절벽에서 500m 이상 높은 곳에 놓여 있다. 자연적으로 생긴 절벽 틈에 관을 놓지만, 일부러 구멍을 파서 관을 설치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전설을 간직한 우샤 12봉의 으뜸인 신녀봉.
 재미있는 전설을 간직한 우샤 12봉의 으뜸인 신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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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샤는 석회암으로 이뤄진 절벽이 많아 특이한 형상을 가진 암벽이 많다.
 우샤는 석회암으로 이뤄진 절벽이 많아 특이한 형상을 가진 암벽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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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을 떠나면 싼샤의 두 번째 대협곡 우샤가 시작된다. 우샤는 후베이성 바둥(巴東)현까지 45㎞에 달한다. 우샤는 무엇보다 석회암이 많다. 이 때문에 강물에 의해 자연적으로 깎여져서 특이한 암벽이 허다하다.

무엇보다 우샤 12봉은 기이한 산과 깎아지는 절벽으로 싼샤의 백미로 꼽힌다. 우샤 12봉의 하나인 신녀봉(神女峰)은 보는 이를 감탄케 한다. 신녀봉은 솟아오른 고산준봉 가운데 홀로 조그맣게 우뚝 솟아있다. 높이도 해발 2000m가 넘어 산 정상을 볼라치면 고개가 아플 지경이다.

우샤 12봉이 유명한 것은 무엇보다 재미있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치수의 황제로 숭상 받는 우(禹)왕이 어느 날 싼샤를 찾았다. 협곡 사이에 세차게 흐르는 강물을 보며 곤혹스러워 했는데, 하늘에서 서왕모의 딸 요희(瑤姬)가 자매들을 데리고 내려왔다.

요희와 자매들은 우왕에게 물을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우샤의 봉우리에 앉자 뱃사람들을 살펴주었다. 세월이 흘러 그들은 산의 일부가 되어 우샤 12봉이 되고, 그 중 신녀봉은 요희가 변한 것이라 한다.

싼샤의 마지막 대협곡 시링샤는 즈구이현에서 이창시 난진관(南津關)까지 이어진다. 총 길이 66㎞로 싼샤에서 가장 긴 구간이다. 본래 시링샤는 뱃길이 험해서 뱃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중간에 싼샤댐이 생겨 옛 추억으로만 남게 됐다.

싼샤댐은 중국인에게 문명의 혜택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하지만 벌써 드러나는 각종 부작용과 파괴된 자연 풍광, 사라진 역사 유적은 천고의 한으로 남을 수 있다. 이런 현실 때문일까. 안사의 난을 피해 싼샤를 유랑하던 두보의 시는 더욱 고즈넉하고 애달프다.

찬이슬 내려 숲은 단풍으로 물들고 (玉露凋傷楓樹林)
우산우샤는 쓸쓸한 기운이 가득하네. (巫山巫峽氣蕭森)
강 사이로 이는 파도는 창공에 솟구치고 (江間波浪兼天湧)
변방 하늘 구름 천지에 어둠이 드리운다. (塞上風雲接地陰)

한 해가 가고 국화는 새로 피어 다시금 눈물짓고 (叢菊兩開他日淚)
쓸쓸한 강 위에 배에 묶여서 온통 고향 생각이 절로 나네. (孤舟一繫故園心)
어느새 지척에 다가온 추위는 겨울옷을 재촉하는데 (寒衣處處催刀尺)
홀연 백제성을 휘몰아치는 다듬이 소리 급하구나. (白帝城高急暮砧)

이창에서 싼샤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시링샤의 한 절경.
 이창에서 싼샤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시링샤의 한 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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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유동은 중국의 내로라하는 시인들의 설화가 깃든 장소다. 삼유동 뒤편이 바로 난진관이다.
 삼유동은 중국의 내로라하는 시인들의 설화가 깃든 장소다. 삼유동 뒤편이 바로 난진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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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Tip 1

싼샤를 보려면 충칭에서 완저우(萬州)에 가야 한다. 먼저 충칭 홍치허거우(紅旗河溝)에 있는 북부버스터미널에서 완저우행 고속버스를 탄다. 버스비는 105위안(약 1만7900원) 안팎으로, 약 3시간이 소요된다. 완저우에 도착하면 양쯔강 고속정터미널로 간다. 택시로 5위안(약 850원) 거리다.

완저우에서 펑제나 우산으로 가는 고속정은 낮 시간을 제외하고 1시간 간격으로 있다. 완저우에서 펑제까지는 1시간20분, 펑제에서 우산까지는 50분 걸린다. 고속정 표값은 각각 55위안(약 9560원), 70위안(약 1만2000원)이다. 우산에서 샤오싼샤를 구경하는 유람선 표값은 160위안(약 2만7200원)으로, 시간은 약 3시간이 소요된다.

고속정으로 우산에서 싼샤댐까지는 1시간 반이 걸린다. 표값은 85위안(약 1만4500원)인데, 싼샤댐에 도착하면 전용버스가 대기하여 이창까지 배웅해준다. 이창은 싼샤댐을 보기 위한 관광객이 몰리는 도시다. 시내 곳곳에 고급 호텔부터 중저가 호텔까지 다양하게 널려있다. 150~200위안이면 아침식사와 무료 인터넷이 제공되는 깨끗한 호텔을 구할 수 있다.

# 여행Tip 2

이창에서 가야 할 곳은 단연 삼유동(三遊洞)과 난진관이다. 사실 이 두 곳은 한 군데에 맞대고 붙어있어 찾기 쉽다.

삼유동은 예부터 자연 동굴과 암자 절벽이 유명하다. 세인에게 오르내리게 된 것은 819년 당나라 유명한 시인 백거이, 백행간, 원적이 찾으면서부터다. 이들은 삼유동에 머물며 놀면서 시 한 수씩 남기었다. 백거이가 지은 '삼유동서'는 지금도 삼유동 동굴 한 켠에 시비로 남아있다.

송대에 이르러 저명한 문장가인 소순, 소동파, 소철 3부자도 삼유동에 놀러 왔다. 이들도 시 한 수씩 지어 동굴에 비석으로 남겼다. 이를 기리어 후대인들은 백거이, 백행간, 원적을 '전(前)삼유'라 칭하고 소씨 3부자를 '후(後)삼유'라 부른다.

난진관은 싼샤가 끝나는 지점이다. 이곳부터 강폭이 넓어지면서 물길은 느려진다. 전국시대부터 난진관은 양쯔강 수로의 요충지로 중요시됐다. 삼국지의 촉과 오도 난진관에서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당시 군대를 지휘했던 장비를 기념하여 북을 치며 군사를 지휘하는 석상에 세워져 있다.

삼유동과 난진관의 개방시간은 9:00~17:00로, 입장료는 80위안이다. 이창 시내에서 삼유동과 난진관까지는 따로 대중 교통편이 없기 때문에 택시를 대절해 가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BS U포터,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중국, #충칭, #싼샤, #삼협, #장강삼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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