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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의 비는 유리벽에 갇혀 있다. 사진 촬영도 금지되어 있다. 유리벽 밖에서 사진을 찍으니 대왕의 비에는 북한의 산천이 투영되어 찍혔다. 대왕은 자신의 무덤이 중국 땅에 놓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 광개토대왕비 대왕의 비는 유리벽에 갇혀 있다. 사진 촬영도 금지되어 있다. 유리벽 밖에서 사진을 찍으니 대왕의 비에는 북한의 산천이 투영되어 찍혔다. 대왕은 자신의 무덤이 중국 땅에 놓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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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는 어디에 있을까. 이번에 직접 가서 두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하기 이전까지는 그 비가 '만주'에 있다는 생각만 했다. 만주 벌판 그 어디, 겨울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면 휘날리는 낙엽들, 메마른 풀잎들, 모래알인지 아니면 가느다란 흙알갱이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먼지들, 그리고 아득히 가물가물하기만 한 지평선…… 그 사이에 홀로, 우뚝 서 있을 거라는 추측만 해왔다. 그런데 정작 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광개토대왕의 비는 '국경'에 있었다. 대왕의 비석과 무덤 바로 지척으로는 압록강이 흐르고 있었고, 북한의 산들이 병풍처럼 줄지어 한쪽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넓디넓은[廣] 영토(土)를 개(開)척하였다 하여 그 시호조차도 '광개토'로 추앙받는 영락대왕을 기리는 비석과 그 무덤이니 당연히 광활한 만주 벌판, 그 가운데서도 가장 한복판에 있으리라 여겼지만, 사실은 압록강이 저만큼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서 있었다.

대왕의 비는 또 유리 울타리 속에 갇힌 채 숨도 힘들게 쉬는 모습으로 우울하게 서 있었다. 중국은 비바람으로부터 훼손을 막기 위해 사방으로 유리벽을 설치했다지만, 어떤 전문가는 그 때문에 오히려 더 빨리 비석이 망가질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했다. 과연 비석에는 푸릇푸릇한 이끼가 끼어 있었다. 게다가 유리벽 안에는 중국 공안이 지키고 서서 그 누구도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제지하고 있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만나는 방식이 사진 아니면 제사일진대,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하도록 했다. 대왕은 철저하게 갇혀 있었다. 유폐되어 있었다. 대왕이시여, 여기까지 와서 당신과 함께 사진도 찍지 못하는 우리를 용서하소서. 서른아홉 시퍼런 나이에 못다 이룬 꿈을 안타까워하며 세상을 떠났을 당신의 비석 앞에서 우리는 사진 한 장도 제대로 찍지 못하는 나약한 후손이 되고 말았나이다.

대왕의 비는 유리벽 속에 갇혀 있다. 중국 공안이 지키면서 사진 촬영도 금지하고 있다. 대왕은 살아생전 이처럼 답답하게 될 줄은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하였으리라.
▲ 광개토대왕비 대왕의 비는 유리벽 속에 갇혀 있다. 중국 공안이 지키면서 사진 촬영도 금지하고 있다. 대왕은 살아생전 이처럼 답답하게 될 줄은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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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릴없이 유리벽 바깥으로 나와 사진을 찍는다. 유리벽을 뚫고 들어간 나의 사진기는 대왕의 비석을 가까스로 렌즈 안에 담는다. 유리벽이 빛을 가로막고, 샷시가 가로세로로 형상을 차단하지만, 그래도 나는 정성껏 사진을 찍는다. 어쩌리. 이렇게라도 찍어가지 않으면 조국으로 돌아가 누구에게 무어라 말할 것인가. 대왕 비의 웅자를 담아가기는커녕 샷시와 유리창에 갇힌 초췌함을 가져갈 뿐이지만, 그래도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보다야 낫지 않으리. '공수래공수거'는 이승과 저승을 오갈 때의 논리일 뿐 어찌 초라한 후손과 위대한 조상 사이의 지정의(知情意)를 가르는 논리가 될 수 있겠는가. 비록 유리벽에 갇힌 대왕의 비석일망정 그래도 가장 멋지게 보이는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나는 사방을 빙빙 굶주린 짐승처럼 배회한다.

장수왕은 재위 3년(414)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비를 세운다. 이 비는 높이 6.39m에 너비 1.35∼2m, 무게 약 37톤의 거대한 입석이다. 장수왕은 안산암이 섞인 이 거대한 응회암 비석에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주몽)의 이야기, 광개토대왕이 즉위할 때부터 사망할 때까지의 정복 활동 및 영토 관리, 태왕릉을 지키는 묘지기에 대한 제도 등 크게 3부분으로 구분되는 내용을 예서로 새겼다. 글자수는 1775자로 여겨지는데, 1500년 세월을 견디며 마모가 심해진데다 간자체와 이자체가 많아 1590자만 판독, 나머지는 완벽한 해독이 어려운 지경이다. 일제는 이 비문의 글자를 조작하여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려고 시도한 적도 있다. 만 17세에 고구려 제 19대 왕에 올라 22년간 재위 39세에 세상을 떠난 광개토대왕은 20세에 왕위에 올라 33세에 요절한 알렉산더 대왕과 흡사한 점이 너무도 많아 흔히 '동방의 알렉산더'라 불리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보통 호태왕(好太王)이라 부르는데, 본래 이름은 담덕(談德)이며, 통상적으로는 광개토대왕이라 칭해진다. 혹은 그가 제정한 연호를 따서 영락대제(永樂大帝)라 하기도 하는데, 광개토대왕비에 새겨져 있는 태왕의 정식 명칭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비석에서 바라본 대왕의 무덤. 시신을 모신 묘실(무덤의 정상)까지 쉽게 올라가도록 철제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 광개토대왕 무덤 비석에서 바라본 대왕의 무덤. 시신을 모신 묘실(무덤의 정상)까지 쉽게 올라가도록 철제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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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의 무덤 정상에 있는 묘실의 일부가 사진 왼쪽에, 북한의 산이 오른쪽에 보인다. 산과 공장 지붕 사이에는 압록강이 흐른다. 대왕의 무덤이 고구려땅이었지만 지금은 중국과 북한의 '국경'에 인접해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는 기분은 오로지 처연했다.
▲ 광개토대왕의 무덤과 북한땅 대왕의 무덤 정상에 있는 묘실의 일부가 사진 왼쪽에, 북한의 산이 오른쪽에 보인다. 산과 공장 지붕 사이에는 압록강이 흐른다. 대왕의 무덤이 고구려땅이었지만 지금은 중국과 북한의 '국경'에 인접해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는 기분은 오로지 처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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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에서 300m쯤 떨어진 곳에 태왕릉이 있다. 물론 무덤과 비석이 인근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그 아들 장수왕이 그렇게 설치한 때문이다. 높이가 30m에 달하는 광개토대왕의 무덤은 흔히 '장군총'이라고 불리는 장수왕의 무덤에 비해 훨씬 더 크다. 당연히 장군총이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도 거의 정상까지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대왕의 무덤은 무너지고 내려앉아 과연 대왕의 무덤이 이처럼 초라하게 기려지고 있어도 되나 싶은 한탄이 저절로 일어난다. 무덤을 사방으로 지탱하는 거대 바위들조차도 없어지거나 가로로 드러누워 있고, 장군총처럼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었을 텐데 그 많던 돌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대왕의 무덤은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온통 잡풀들만 무성할 뿐이다. 무덤 주위에서 발견된 기와 조각들에는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태왕릉이 산처럼 견고하고 튼튼하기를 바란다)는 글이 새겨져 있었건만 어찌 지금은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단 말인가.

그런데도 태왕릉 꼭대기의 묘실 앞에는 중국 공안이 지키고 서서 사진도 찍지 못하게 한다. 저 묘실 안에는 대왕이 누워서 영생의 시간을 보내고 계실 터인데, 못난 우리 후손은 그 앞에서 사진 한 장조차도 마음대로 찍지 못하는구나. 나는 비겁하게도 공안의 눈치를 보며 대왕의 묘실이 일부 들어가면서 동시에 북한 산천이 보이는 사진을 찍는다. 우리 땅이 바로 저기 보이는데도, 중국의 공장 굴뚝들 너머로 북한의 산천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데도, 나는 중국 공안에게 혹 붙들려가기라도 할까봐 조심조심 사진을 찍는다. 광개토대왕이 만주 벌판을 호령할 때에는 그 누구의 눈치도 아니 보았을 터인데, '禁止登攀(금지등반)'이라고 적힌 팻말과 북한의 산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사진 한 장을 찍으려고 나는 온갖 눈치를 다 살피고 있구나.

동양의 피라미드로 알려진 장수왕릉. 에전과 달리 지금은 왕릉 위에 올라가는 행위가 금지되어 있다.
▲ 장수왕릉 동양의 피라미드로 알려진 장수왕릉. 에전과 달리 지금은 왕릉 위에 올라가는 행위가 금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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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릉에서 광개토대왕비를 지나 조금 더 산쪽으로 가면 장수왕릉인 장군총이 나온다. 장수왕릉은 태왕릉과는 달리 지금도 본래의 면모를 거의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어 그 웅대함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물론 장수왕릉은 돌무지돌방무덤(積石石室墓)으로 면마다 거대한 받침돌로 무덤을 지지하게 만들었는데, 어른 키보다 큰 12개의 받침돌로 사방을 지탱하도록 건설되어 있다. 장수왕릉이 1500여 년 세월을 견디고 여전히 굳건하게 남아 있는 것은 돌과 돌을 맞춰 들여쌓기를 한 덕분으로, 흔히들 '동방의 피라미드'라 부른다. 장수왕릉에서 바라보면 광개토대왕릉과 비가 한눈에 일직선으로 들어온다. 그 둘이 동북쪽으로 불과 2km밖에 아니 떨어졌기 때문이다. 장수왕릉 위에 올라가서 바라보면 더욱 실감 생생하게 그 웅자를 볼 수 있다는데,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철책 사다리를 타고 무덤 위로 올라가는 일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리벽에 갇혀 있는 광개토대왕비, '동양의 알렉산더'라 찬양되지만 그 무덤만은 거의 무너져 형체조차 와해된 태왕릉, 왕릉이라 불리지 못하고 그저 장군총으로 이름 붙여지는 초라한 신세가 된 장수왕릉, 이렇게 부자의 유적을 모두 둘러보았지만, 끝내 마음은 쓸쓸하고 애잔하였다. 비록 장수왕릉이 '동양의 피라미드'라 숭앙된다지만 중국 공안들에 갇혀 꼼짝도 하지 못하는 두 영웅의 곁에 선 내 몸은 마치 미이라라도 된 듯 차갑게 식어들기만 했다. 본래 우리땅이었던 곳에서, 그러나 지금은 국경 아닌 국경이 된 이곳에서 우리는 이렇게 작아지고 말았구나. 이제 머잖아 만나게 될 국내성 유적 또한 푸대접받고 있기는 마찬가지라는데, 지난날의 영웅들을 결코 소홀하지 않게 받들어 모실 날은 언제나 오려나.

버스를 타려는데 한 노인이 유리창 너머로 손짓을 한다. 그는 사과를 팔고 있다.

"우리 할아버지는 독립군이었어."

424년간이나 고구려의 '서울'이었던 국내성 성벽 위에 지금은 '감히' 아파트가 서 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국내성 유적은 1964년에 길림성이 지정한 주요문화유적인데 어찌 이런 홀대를 받고 있을까.
▲ 국내성 424년간이나 고구려의 '서울'이었던 국내성 성벽 위에 지금은 '감히' 아파트가 서 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국내성 유적은 1964년에 길림성이 지정한 주요문화유적인데 어찌 이런 홀대를 받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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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광개토대왕, #장수왕, #국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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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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