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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하는, 덕담을 주고받는 추석을 맞았다.

대한민국의 며느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크든 작든 일거리 앞에서 전투하듯 명절을 준비하고 보내야 한다.

 

나는 결혼생활을 20년도 훌쩍 넘긴 한 집안의 둘째 며느리다. 시부모님은 형님과 함께 사시고 시댁은 서울이다.

 

부모님 모두 이북에 고향을 두고 있어서 친척 또한 많지 않다. 그래서 명절은 친척들의 분주한 들락거림보다는 부모님의 직계 자손인 우리 형제들만 모이는 조용한 시간들이 대부분이다.

 

'너처럼 시집살이를 쉽게 하면 뭔 걱정이겠냐' 한다 해도 할 말이 없는 며느리다. 시댁이 서울이니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동서지간에 이런 저런 실랑이로 명절을 쇠기 전부터 속을 끓일 일이 많지 않았던, 모르긴 해도 명절증후군을 별로 겪지 않고 산 며느리에 속한다.

 

 

올 해는 우리 형제간에 특별한 추석을 맞이했다.

추석 전날 시댁에 도착해서 "저희 왔어요"하고 인사를 하는데 "어서오너라"하며 마중하시는 그 곳에, 한 분의 자리가 비어 있다. 비어 있는 그 자리는 시어머니의 자리다. 형님 식구들과 함께 안방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시는 시아버님만 보인다. 한 자리만 비어 있을 뿐인데... 순간 이 빠진 엉성한 입안 같기도 해서 시리고 서걱한 마음이 들었다.

 

시어머니께서는 3개월 전에 느닷없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 일흔일곱의 연세다. 아직은 죽음을 생각할 정도의 연세는 아니셨기에 그렇게 황망히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을 때, 자식들은 아무 준비 없이 어머니를 보낼 수밖에 없어서 더 기가 막혔다.

 

어머니는 착하고 온순한 분이셨지만 '딸은 딸이고 며느리는 며느리다'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냉정하신 분이셨다. 정에 엎어졌다 젖혀졌다 하지 않으셨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는 다 좋을 수만은 없는 것처럼 다 나쁠 수만도 없다.

또 같은 시어머니에 며느리들마다 추억은 제각각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큰며느리가 기억하는 시어머니와 둘째인 내가 기억하는 시어머니는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점들이 있다.

 

어머니는 멋쟁이셨다. 며느리가 보기에 손녀들에게 수더분한 모습의 할머니가 아닌 것이 아쉬울 정도로 자신의 몸을 가꿀 줄 아는 분이셨다.

 

옛날 시어머니들은 며느리가 색다른 옷이라도 입을라치면 '아무 옷이나 입고 다니지 그런데 돈 쓴다고' 혀를 끌끌 차는 것이 일반적 생각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 어머니는 옷에 대해 무신경한 며느리를 못마땅해 하셨다. "젊었을 때는 멋 좀 부려야 한다"는 성화를 듣고는 했었다. 나는 그것이 스트레스(?)였다.

 

양가 어른들 첫 상견례 때 친정엄마는 고운 한복을 입으셨다. 그 시절에는 상견례를 할 때면 주로 한복을 입는 것이 예의였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하이힐 구두에 전혀 어색하지 않은 깔끔하면서도 타이트한 정장을 입고 나오셨다. 친정엄마와 전혀 다른 모습 때문에 미래의 시어머니가 생소했었다.

 

그런 분이었지만, 며느리가 첫아이를 제왕절개로 출산을 하고 병원에 일주일을 누워 있는 동안, 병원에서 출퇴근을 하는 아들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아들의 밥을 해서 들고 오셨다. 그 바람에 함께 입원해 있던 다른 집 며느리들로부터 '시집 잘 갔다'는 부러움을 사기도 했었다.

 

 

신혼 일년 간 부모님과 같이 살았다. 살면서 좋은 말만 오간 것은 아니었다. 섭섭한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시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살갑지도 않았고 살림도 못하는 며느리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다. 가족이 되기 위해 부대껴야 했던 시기였다.

 

부모님 댁은 겨울이면 거실에는 카펫이 깔리고 그 가운데에 난로가 놓였다.

어느 날 난로에 한약을 달이고 있었는데, 내가 연탄불을 간다면서 약탕기를 덜컥 카펫에 그냥 올려놓았다. 카펫이 뚝배기 약탕기의 열기로 거무스름하게 눌러 붙었다. 콩닥거리는 새며느리를 향해 "어머 얘 조심하지"가 끝이었다. 연탄불을 간답시고 불이 이글거리는 연탄을 현관 타일바닥에 그대로 놓는 바람에 타일이 튀어 떨어져 나갔을 때도 "어머 얘 조심하지"가 전부였다. 남편이 어머니가 끓여내 놓은 찌개를 떠먹으면서 내게 "자기가 끓이면 왜 이런 맛이 안 나지?" 했을 때도 "살림 경력 30년하고 이제 몇 달된 얘하고 같냐"면서 오히려 남편을 타박했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좋게만 넘어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시절로 치자면 그만큼 약한 시집살이도 드물었다.

 

자식들이 모두 모여 외식을 하자고 할 때 아버님은 "돈 나가게 무슨 외식이냐 집에서 삼겹살이나 구워먹자"고 하시는데 어머니는 "요즘은 외식도 가끔씩 해야 해요. 나도 밖에 나가서 먹고 싶어요"하시면서 부엌으로부터 며느리들을 해방시켜 주시는데 일조를 하시기도 하셨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사이는 좋은 편은 아니었다. 고집 센 두 분은 서로의 의견을 내세우느라 들쭉날쭉 언쟁이 늘 있었다. 때론 어머니는 아버님만 두시고 여행도 잘 다니셨다. 그럴 때 혼자이신 아버님은 쓸쓸해 보이지 않으셨다.

 

비록 두 분이 티격태격 하신 사이였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의 아버님을 뵈면, 나름 시간을 잘 보내고 계시는 것 같아도 쓸쓸해 보인다. 시어머니가 기르시던 화분들은 봄이 되면 화려하게 꽃들을 피워서 '어찌 저리 꽃을 잘 가꾸실까'할 정도였는데 그 화분들도 화려해 보이지 않는다.

 

마당에 자목련 한 그루는 이상기온 때문인지 가을까지 꽃을 피우고 있다. 봄처럼 화사하게 활짝 피지 않고 한두 송이씩 피고 지고 있다. 어머니가 자목련을 보신다면 "얘 저 꽃 좀 봐라, 별일이다 호호호" 하시면서 특유의 '호호' 웃음을 웃으셨을 텐데... 그러나 그 꽃을 즐길 분이 안 계시니 꽃도 스산해 보인다. 낙엽 지는 가을이라서가 아니라 '시어머니의 빈자리' 때문에 느껴지는 쓸쓸함이다.

 

 

아들이 가족을 이끌고 제 집으로 가려 하면 늘 함께 배웅을 해주셨는데, 지금은 한 분만이 우리를 배웅하신다. 이런 '빈자리'의 쓸쓸함이 언제쯤 무뎌질까.


태그:#시어머니,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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