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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흙서점>.
 헌책방 <흙서점>.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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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에서 4번 나들목으로 나오면 헌책방 〈흙서점〉이 코앞에 보입니다. 서울시내뿐 아니라 나라안 어디에서도 전철역에서 가까이 자리한 곳은 퍽 드뭅니다. 진주와 남원에서는 시외버스터미널 옆에 헌책방이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버스역이나 기차역 둘레에 헌책방이 많았습니다. 오늘날 지하철역 둘레는 가게삯이 비싸 웬만하면 엄두를 못 낸다 할 텐데, 사람들이 퍽 많이 드나드는 목 좋은 자리에 〈흙서점〉 한 곳은 다부지게 뿌리내리며 아주 많은 책손이 찾아오는 손꼽히는 곳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흙서점〉 일꾼은 책방 앞에 마련해 놓은 '책 아닌 헌 물건' 파는 값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에 쓰기도 합니다. "저 물건들 팔아서 한 달에 십만 원밖에 안 되지만, 저 물건들 그냥 버려지면 아깝잖아요. 이렇게 해서 새로운 사람이 찾아가면 버려지지 않아 좋고, 이렇게 판 물건으로 번 돈은 또 누군가를 도우면 더 좋고요."

열 몇 해째 이곳 〈흙서점〉을 찾아오면서 '낙성대역 앞에 있으'니 으레 "낙성대 앞 헌책방"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현동 헌책방 〈책창고〉부터 골목 안쪽으로 인헌동을 거쳐 찾아가다가 이 헌책방이 행정구역으로는 '봉천동'임을 깨닫습니다. 인헌동에 〈인헌헌책방〉이 있다가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여태껏 '인헌동'이 있어 그 헌책방 이름이 〈인헌헌책방〉이었다고 뒤늦게 알아차립니다. '나 스스로 이렇게 걸어 보지 않으면 모르는구나' 하고 새삼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이 붉어집니다. 제가 서울사람이 아니니 서울 길이름을 얼마나 알았겠느냐 싶으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헌책방을 찾아다니면서 그 헌책방이 무슨 동에 있는지 제대로 살펴야 하지 않았느냐 거듭 뉘우칩니다. 〈흙서점〉에서 책값을 셈하며 넌지시 여쭙니다. "여기도 봉천동에 들어가 있었어요?" "네, 봉천동이었지요. 그런데 얼마 전에 낙성대동으로 바뀌었어요. '봉천동' 하면 가난한 이미지가 박힌다며 안 좋다나 봐요."

그러고 보니 '구로공단역'이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헌책방 〈흙서점〉 아주머니는 예전에 독산동에서 〈오거서〉라는 이름으로 헌책방을 따로 꾸리기도 하다가 이제는 가시버시가 한 곳에서 책방 살림을 꾸리고 있습니다. 〈오거서〉를 찾아가는 길목에서 마주해야 했던 수많은 공장들이 떠오릅니다. 봉천동과 독산동 사이에 얼마나 많은 공장이 있었고, 얼마나 많은 쪽방이 있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 눈물과 웃음이 서려 있었을까 곰곰이 떠올려 봅니다.

비아프라 삶과 사람과 생채기를 담아낸 사진책입니다.
 비아프라 삶과 사람과 생채기를 담아낸 사진책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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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값을 모두 셈한 다음 《a monologue》(뿔,2009)라는 사진책 하나 더 집어듭니다. 연기하는 박상원 님이 찍은 사진을 담았습니다. 나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 헌책방에 들어왔느냐 싶고, 새책 값은 그리 비싸지 않으나 나중에 따로 새책방에서 사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셈한 책값이 꽤 되고 고른 책은 가방에 다 넣지 못할 만큼 많습니다. 이 책까지 더 장만해야 하느냐 마느냐 망설이다가 눈을 질끈 감습니다. 내 눈으로 보기에 어설프고 겉치레가 많구나 싶어도, 어찌 되었든 사진은 사진이요 사진책은 사진책이기 때문입니다.

다섯 해 앞서 〈흙서점〉에서 만난 사진책 《BIAFRA》가 떠오릅니다. 타카하시 나오히로(高橋直宏) 님이 1960년대 끝물에 아프리카 비아프라에서 일어난 내전 생채기를 담아낸 사진책입니다. 다섯 해 앞서 〈흙서점〉에서 《비아프라》를 만났을 때에도 오늘처럼 '벌써 다른 책을 잔뜩 골라 놓고 책값을 셈해 한 달 살림돈이 아슬아슬하겠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책방 모습을 사진으로 몇 장 더 찍자며 한 번 더 골마루를 둘러보다가 벼락처럼 제 눈에 꽂혔고, '오늘 고른 다른 책은 다 물려도 좋으니 이 책 하나만은 반드시 사자'고 느꼈습니다. 이와 달리 박상원 님 사진책 《a monologue》는 '나한테 무슨 돈이 철철 넘친다고 이런 사진책까지 사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나 스스로 '사진책 도서관을 꾸린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안 좋아하거나 내가 못마땅해 하는 사진책이라 하더라도 내 눈높이를 기르고 온갖 사진책을 두루 살펴보며 사진길을 걸어갈 사람한테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주머니를 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아프라 어린이들. 우리 삶과 세상에는 가난과 돈많음이 고르게 나뉘지 못한 채 뒤엉켜 있습니다. 이 사이에는 '전쟁'과 '무기'와 '폭력'이 가로놓여 있고요.
 비아프라 어린이들. 우리 삶과 세상에는 가난과 돈많음이 고르게 나뉘지 못한 채 뒤엉켜 있습니다. 이 사이에는 '전쟁'과 '무기'와 '폭력'이 가로놓여 있고요.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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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원 님이 돈이 많아 사진을 했겠습니까. 바쁘고 힘든 나날임에도 하루하루 쪼개고 나누어 사진 몇 장 알뜰히 남겨서 사진책으로 엮었습니다. 타카하시 나오히로 님 《비아프라》처럼 총알이 빗발치는 땅에서 내전 때문에 가난에 찌들려야 하는 밑바닥 사람들하고 뒹굴며 사진을 담아내는 땀내가 배이지 않았다고 '땀내와 눈물콧물 담긴 사진책'이 가장 훌륭하다고 추켜세울 수 없습니다. 이쪽 나라에서는 이런 사진을 하고, 저쪽 나라에서는 저런 사진을 할 뿐입니다. 좀더 살림이 넉넉한 사람은 넉넉한 매무새로 넉넉한 가운데 외로움을 사진으로 달래고, 좀더 살림이 팍팍한 사람은 팍팍한 가운데 사랑을 잃지 않으려는 가운데 손가락에 남은 따스함을 사진기 단추로 옮겨낼 뿐입니다.

책값을 다시 셈하자니, 〈흙서점〉 아저씨는 한 마디 툭 내놓습니다. "어? 박상원이도 사진을 하네?" 〈흙서점〉 아저씨는 지지난해에 제가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책을 골라들 때, 책값을 셈하다가 "뭐? 밥벌이의 지겨움? 먹고살 만하다 이건가?" 하고 한 마디를 했습니다.

― 서울 낙성대 〈흙서점〉 / 02) 884-8454

헌책방 <흙서점>
 헌책방 <흙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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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그치지 않는 곳은 비아프라뿐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거나 부추기는 모든 권력자는 젊은 넋한테 사랑과 믿음이 아닌 총과 칼을 들도록 내몹니다.
 전쟁이 그치지 않는 곳은 비아프라뿐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거나 부추기는 모든 권력자는 젊은 넋한테 사랑과 믿음이 아닌 총과 칼을 들도록 내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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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사진잡지 <포토넷> 2009년 10월호에 함께 싣습니다.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태그:#사진, #사진책, #헌책방, #일본사진책, #비아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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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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