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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가고 싶었고 기피한 적 없지만 군대는 끝내 안 갔다.

MB경제 비판은 했지만 MB와 시각차는 없다.

정치할 생각은 없지만 국무총리직은 수락했다.

약속은 불리하더라도 지켜야 하지만 세종시는 원안대로 안 된다.

부족한 사람인 거 맞지만 몹쓸 사람은 아니다.

두 차례에 걸쳐 천만 원 받아썼지만 '스폰서 총장'이란 말은 모욕이다.

더불어 사는 사회가 되기를 늘 기도하지만 세금은 안 냈다.

공무원으로서 겸직은 안 되지만 기업 고문직은 하면서 월급 받았다.

1년 9개월 동안 사회봉사를 했지만 1억 원 가까운 돈을 벌었다.

교수로서 학생들과 강의 약속은 꼭 지켜야 하지만 책상머리에서 고뇌만 할 수는 없었다.

아내가 전시회 할 때 일체 알리지 않았지만 3일 전에 신문에는 보도됐다.

그림이 재산인 줄 몰랐지만 6천만 원에 팔렸다.

 

청문회를 거치면서 드러나 정운찬 국무총리 지명자에 대한 내용이다. 그리고 그가 자서전에서 유달리 강조한  말을 떠올려보았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어제의 나의 말과 오늘의 나의 말이 다르지 않고, 그때의 나의 행동이 내일과 모레의 나의 행동과 다르지 않은, 항구여일한 삶의 모습과 언행과 자세이다."

 

그의 자서전 제목은 <가슴으로 생각하라>이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머리로만 계산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그가 마침내 대한민국의 국무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가족 이야기 좋아하는 정운찬

 

"가마를 타면 먼저 가마꾼의 어깨를 생각하라는 어머님의 말씀을 되새기겠다."

 

국회에서 총리 인준안이 가결되자 그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아마 이것도 미리 머리로 계산해 둔 발언이었으리라. 그는 스스로 (영광스러운) 가마에 올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을 터이다.

 

또한 그는 어려울 때마다 가족을 들먹이기를 좋아한다. 돌아가신 자기 어머니가 미국 유학 중 보낸 편지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이역에서 고생 중인 아들에게 하필 왜 '가마' 이야기를 했는지는 정황상 잘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는 청문회를 마치고 나서 새벽 3시에 집에 들어갔더니 "아버지가 추궁 당하는 것을 보고 엉엉 울었어요"라고 한 아들·딸의 말을 전한 바 있다.

 

정운찬은 어려서부터 유달리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자서전에 '행운도 준비해 둔 사람에게 돌아간다'고 적어 놓고 있다. 이로 보아 그는 평소 행운을 준비해 두며 살아간 사람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그는 서울대 총장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궁핍'했고, 따라서 돈 많은 이의 도움을 마다하지 않고 받았을 것이다.

 

그는 숙부와 스코필드 박사와 조순 교수 등에게 더할 나위 없는 은혜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넷'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고 다닌다.(그의 진짜 아버지가 이런 말을 듣는다면 기분이 어떨지.)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1970년부터 한국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1971년 1월에 유학길에 오른다. 1976년 프린스턴대학 박사가 된 그는 아직 병역을 필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조교수가 되어 2년 간 미국에 더 머무른다. 그러다 그는 1977년 고령으로 병역 면제 처분을 받는다. 이후 그는 모교인 서울대학교의 교수가 된다.

 

70-80년대 격동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는 오직 교수직에 몰두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사회과학대학 교무학장보를 시작으로, 경제학부 학부장, 재정경제부 금융발전심의회 위원장, 한국금융학회 회장, 예금보험공사 자문위원, 한국사회과학연구협의회 회장, 사회과학대학 학장 등 여러 내외 보직을 역임한 끝에 2002년 마침내 대망의 서울대학교 총장이 된다.

 

언론의 관심을 묶어둘 줄 아는 사람

 

정운찬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유종일은 그가 교수 시절 '교수시국선언'을 주도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노태우의 6·29선언 즈음부터의 대학시국선언이라는 것은 교수라면 다수가 참여하는 일이었다.

 

서울대학교 총장이던 그가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은 것은 3불정책을 놓고 노무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면서부터였다. 물론 여기에는 3불정책에 반대하는 조중동의 지원 보도가 있었다. 이후 그는 대선후보군에 거론되기 시작했다. 당시 여권은 심각한 인물난에 봉착해 있던 터였다.

 

참고로 그가 지난 대선 정국에서 행한 발언들을 간추려본다.

 

2006.12.13 문화일보 : 절대 (대선에)안 나간다. 정치에 관심 없다.

2006.12.20 MBC : 정치를 안 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2006.12.21 세계일보 : 천지가 개벽해 50대 이상 중 나 한 사람만 남는다면 (정치를) 할지도 모르겠다.

2006.12.26 재경공주향우회 : 공주인들이 원한다면 모든 것을 바칠 것이다.

2007.2.25 서울신문 :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정치를 안 한다고 말할 수 없다.

2007.3.6 MBC : 이 달 중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될 것이다.

2007.3.7 동아일보 : 지금은 내가 (대통령)감이 되는지, 당선될 수 있는지, 당선된 다음에 잘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

2007.3.19 월간조선 : 누가 국가경제를 제대로 이끌어갈 것인지를 놓고 국민의 심판을 받는다면 지금 출발해도 제가 (이명박 서울시장에게) 밀리지 않을 것 같다.

 

이렇게 그는 '마음으로 생각'하기는커녕 치밀하게 머리로 계산했다. 이 와중에서 그는 스스로 자기가 '디사이시브한(결단성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해서 주변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적도 있다.

 

아무튼 그는 어떻게 해야 언론의 관심이 자기에게서 떠나지 않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대선정국에서 '스코필드' 같은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그의 대선 여론 지지율은 3%를 넘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가 여론지지율에 비해 단연 많은 언론 보도를 타게 된 것은 그의 계산된 언론플레이가 한몫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2007년 4월 30일 세실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대선포기를 선언한다.

 

"많은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대선에 나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럴 만한 자격과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대선 포기의 이유로 '정치세력 규합이 어려웠다'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자기가 '정치꾼'이 아닌 순수한 학자라는 이미지를 환기시켰다.

 

그가 보인 모순된 행보, 국격 말하기 전에

 

그가 자서전을 출간한 것은 대선 포기를 선언한 이후였다. 정권이 바뀌자 그는 이따금씩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면서도 자기가 과거 노무현 정부의 탄압을 받은 사람처럼 하고 다녔다.

 

"내가 정면으로 맞서자 불을 켜고 나의 과거사와 개인적인 흠집을 뒤지던 여권은 별것을 못 찾았던지 마침내 눈을 슬그머니 감아주었다."(자서전 <가슴으로 생각하라>에서)

 

<시사저널>도 2008년 7월 29일(979호) 이와 비슷한 보도를 했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현 경제학부 교수)은 지난 6월23일 기자 등과 함께 한 사석에서 얼핏 "총장 시절 국가정보원으로부터 3~4개월 정도 도청당하고 미행당한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 달 후 <시사저널> 기자가 그를 만나 구체적으로 캐묻자 그는 슬쩍 말을 바꾼다. 

 

"미행당한 것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도청은 했을 것이다. 그런데 확인되지는 않았다."

 

이것은 정운찬이라는 이름 석 자가 어떻게 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지를 시사한다. 우리는 이런 '비상한' 인물을 국무총리로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한마디로 말해서, (그가 즐기는 외래어로 표현한다면) '그로테스크'한(엽기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기가 총리가 되어 '국격'을 높이겠다고 말했다. 허황되게 국격을 말하기 전에 자신의 인격부터 시급히 정상화해야 하지 않을까? 가마꾼의 어깨를 생각하기 전에 반성문부터 써라.


태그:#정운찬, #국무총리, #서울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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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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