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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벌써 일주일하고도 이틀 전인가? 지난 12일(토) 오후 서산엘 갔다. 서산문화원에서 열리는 <흙빛문학> 제50호 출판기념회에 참석하는 일이었다.

(전날 오후 고장의 백화산을 올랐다가 비탈길에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왼손을 다쳤다. 다음날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얼음찜질을 하다가 부랴부랴 서산으로 달려갔는데, 왼손잡이가 오른손만으로도 운전을 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했다. 좌와 우를 잘 쓰고 또 균형을 이룬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서산으로 달려가면서 나를 초청해준 <흙빛문학회> 김인옥 회장에게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감사했다. 김 회장은 며칠 전 전화 육성으로 내게 '초대'의 뜻을 전했다. "비용 절약도 할 겸 우편을 이용하지 않고 소수의 꼭 오실 분들, 꼭 모시고 싶은 분들께만 전화로 초대를 합니다"라는 말을 했다.

충남 태안과 서산, 두 지역을 포괄하는 '흙빛문학회'가 최근 <흙빛문학> 50집(2009년 상반기호)를 발간했다.
▲ <흙빛문학> 50집 충남 태안과 서산, 두 지역을 포괄하는 '흙빛문학회'가 최근 <흙빛문학> 50집(2009년 상반기호)를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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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거창하지 않은 행사였다. <흙빛문학> 50호 발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행사인데도, 한마디로 조촐한 모양새였다. 서산문화원 2층 회의실의 좌석들이 너무 많이 남은 형국이었다. 제11회 '청소년문학상 시상식'을 겸한 행사여서 중·고생들이 다수 참석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옛날 내가 회장을 할 때는 유명 사회단체들 못지 않게 큰 규모의 행사를 갖곤 했다. 국회의원들도 부르고, 태안이 서산군에 속했던 시절의 관선 군수도 오게 하고, 인근 각지 문인들도 대거 오게 하고….

초창기 시절에는 고장문학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의 증폭을 위해 제법 거창한 행사도 갖곤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조촐한 성격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아무래도 정력 소진이 많은 외형적 행사보다는 내실 면으로 치중하자는 기류가 많이 작용한 탓이 아닌가 싶다. 또 어쩌면 문학이 점점 위축되어 가는 현상, 갖가지 대중문화의 범람 속에서 정신문화의 토양은 더욱 부실해져 사는 현상과도 관련이 있을 법하다.

행사는 <흙빛문학> 창간호부터 50호까지의 표지와 최근 주요 행사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들을 스크린에 띄워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됐다. 사회자 이명봉 부회장의 내빈 소개, 심응섭 전 회장의 연혁보고, 김인옥 현 회장의 인사말에 이어 오늘까지 올곧게 흙빛문학회에 몸담고 있는 유일한 창립회원인 김영규 선생에 대한 감사패 전달이 있었고, 내빈 축사 후 제11회 청소년문학상 시상식이 베풀어졌다.

학생들과 회원들과 내빈들이 고루 참여하는 '시낭송' 순서를 마친 다음 기념촬영을 했고, 다른 방으로 이동하여 다과를 나누는 것으로 행사를 마무리했다.

축사는 한국문인협회 서산지부장 편세환 시인과 내가 했다. 편 시인과 나는 사전에 축사 부탁을 받지 않았다. 어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스러움을 추구하려는 주최측의 의지 같은 것이 감지되는 듯했고, 미리 준비되고 정제된 축사보다는 생살 같은 즉흥 축사를 선호하는 뜻이 결부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제1부 행사를 모두 마치고 다과회 장소로 이동하기 전 참석자 모두 기념 촬영을 했다. 앞줄 가운데 모자를 쓴 이는 발기인이자 창립회원으로서 오늘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김영규 선생이다.
▲ <흙빛문학> 50집 출판기념회 제1부 행사를 모두 마치고 다과회 장소로 이동하기 전 참석자 모두 기념 촬영을 했다. 앞줄 가운데 모자를 쓴 이는 발기인이자 창립회원으로서 오늘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김영규 선생이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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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세환 시인은 축사를 준비하지 못했음을 말하면서 짧게 축하의 말을 했고, 나 역시 축사를 준비해오지 않았지만, 나는 흙빛문학회의 창립과 초창기 속에 어려 있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회억하고 소개하는 식으로 비교적 오래 얘기를 했다. 내게 축사를 부탁한 것에는 흙빛문학회의 과거지사를 대략적으로나마 듣고자 하는 뜻이 결부되어 있지 않나 싶어 나는 고마움도 느끼며, 정말 전설 같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한 근 30년 전의 이야기 몇 가지를 들려주었다.

<2>

흙빛문학회는 1981년 태안읍에서 창립되었다. 서산군 태안읍이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내가 문단에 공식 등단하기 1년 전이었다. 향토사학자 김영규 선생, 아동문학가 최주연 선생, 시인이자 수필가로 훗날 태안여고 교장이 되는 이원국 선생, 그리고 작가 지망생 지요하 등 4명의 발기인이 창립을 주도했다. 이 4명의 발기인 중에서 가장 막내인 내가 모든 일을 주도했고, <흙빛>이라는 이름도 내가 창안했다.

1983년 <흙빛>이라는 이름으로 창간호를 발간했고, 다음해 제2집도 <흙빛>이라는 이름으로 발간했다. 1985년 제3집부터는 회원들의 거주지·출신지 분포를 태안 지역만이 아닌 서산군 일원으로 확대했는데, <흙빛문학>이 오늘날 태안과 서산 두 지역을 포괄하는 특이 성격을 갖는 계기가 되었고, 이 같은 예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1985년의 제3집은 표지에 <흙빛문학>이라는 이름을 작게 넣고 '달개비의 몸짓'이라는 이름을 크게 하는 식으로 만들었고, 1986년 상반기호인 제4집도 '뜻을 외치며 지평을 보며'라는 이름을 크게 올렸다. 그러나 1986년 하반기호인 제5집부터는 <흙빛문학>이라는 제호를 정착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흙빛>이라는 이름의 실체적 질감을 구현하기 위해 창간호의 표지 전체를 황토색과 회색과 밤색을 놓고 고민하다가 밤색으로 처리했고, 제2호의 표지는 흙에서 생성하는 대표적 빛깔인 초록색깔로 처리했는데, 오늘에 와서 책을 보면(더욱이 영상으로 보니까) 촌스러움이 완연하다.

그리고 제4집부터는 지역 미술작가들의 향토색 짙은 작품들을 구해 표지를 장식했는데, 이런 방식은 내가 회장을 그만둔 이후로도 한동안 지속되다가 언젠가부터 중단이 되었다. 출판사에서 간편하게 디자인한 거의 일률적인 방식으로 표지를 만들고 있는데, 다른 예술 장르와의 긴밀한 연대를 추구하는 방식이 아니어서 아쉽고 섭섭한 마음 크다.

<흙빛문학>은 1985년의 제3집부터 2009년 오늘의 50호까지 줄기차게 뒤 표지에 '흙빛'의 의미와 정신을 정리하여 표방하는 글을 계속적으로 올리고 있다. 이것은 전국의 어느 지역문학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사례이고 전통인데, 아마도 <흙빛문학>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끝까지 함께 갈 것으로 보인다.

애초 이원국 선생이 기초했던 것을 내가 새롭게 보충 확대 정리하여 제3집부터 뒤 표지에 올리기 시작한 이 글은 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것 같다. 여기에 소개해 본다.

'흙빛문학회'를 창립하고, <흙빛문학>을 창간호부터 10집까지 만들며 확고하게 기반을 닦았던 사람으로서 초창기 시절의 전설 같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한 이야기들을 소개했다.
▲ 근 30년 전의 전설 소개 '흙빛문학회'를 창립하고, <흙빛문학>을 창간호부터 10집까지 만들며 확고하게 기반을 닦았던 사람으로서 초창기 시절의 전설 같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한 이야기들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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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모체이자 생명이다. 인간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 흙은 그리고 진실과 정직의 표상이다. 흙은 거짓을 모른다. 인간이 사랑하며 땀을 들이는 만큼 값하여 준다.
그러면 '흙빛'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자연의 빛이며 우리 고향의 빛이다. 모든 생명을 감싸주는 모성의 빛이며 인간 본성의 빛이다. 더불어 그것은 정서의 빛이며 사랑과 평화의 빛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읽어가고 있다. 물질문명과 콘크리트 문화에 밀리고 압도되어 흙과 멀어지고 있다. 흙의 심성과 정신에 상통하는 그것들, 진정한 삶의 가치들이 지층 깊은 심연 속으로 매몰되고, 쇠멸의 길을 가고 있다.
그리하여 그것이 때로는 분노의 빛이 되기도 하고, 신음과 절규의 빛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 흙을 되찾아야 하고, 흙빛을 되살려야 하고, 흙빛의 심성과 정신 속으로 끊임없이 나아가야 한다. 흙빛의 의미와 이미지를 일깨워 기리며, 참되게 사랑하여야 한다. 그것이 분노의 빛, 신음과 절규의 빛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데 '흙빛'이라는 이 정답기도 한 이름이 한때는, 또 일부 사람들에게는 '불온'한 느낌을 주었던 것 같다. 문학단체 이름이 왜 하필이면 "흑빛이냐?"는 질문도 꽤 받았다. 그들은 '흙빛'이라는 말에서 '흑빛―검은 색'을 연상했던 것 같다. 더욱이 고등학교 교사들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때는 난감하다 못해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다.       

<흙빛문학>이 처음 세상에 출현할 때 충청남도에는 지방문학지가 몇 개밖에 없었다. 대전에 <호서문학>과 <도가니문학> (훗날 <오늘의 문학>으로 바뀜)이 있었고, 대전을 제외한 충남에는 연기의 <백수문학>이 유일했다. 그러니까 <흙빛문학>은 대전을 제외한 충남에서는 두 번째로 출현한 지역문학지인 셈이다. 

나는 <흙빛>이라는 이름을 창안할 때 지역성보다는 '문학정신' 쪽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호서문학>과 <도가니문학>, 또 <백수문학>의 이름을 참고했다. 가치지향 쪽으로 의지를 세워 <흙빛>이라는 이름을 창안했는데, 이 이름이 태안과 서산의 지역성을 표방하는 이름은 아니라는 점을 의식하면서도 그 이름을 버리기가 싫었다.

<흙빛문학> 창간 이후 <흙빛문학>에 자극 받은 각 지역의 문학지들이 속속 출현하게 되었는데, 하나같이 그 고장의 현 지명이나 옛 지명, 혹은 대표적 명물을 책의 제호로 삼는 것이었다. 이제는 충남만 해도 지역문학지가 없는 고장은 청양을 제외하고는 한 곳도 없다.

마침내 서산의 지역성을 표방하는 <서산문학>도 탄생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묘한 위기감 같은 것을 갖게 되었다. 이러다간 우리 태안만 고유 문학지가 없는 고장으로 남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없었다. 고민 아닌 고민을 안고 살던 나는 1994년 일단 <흙빛문학회>를 떠났다.

그리고 금세 <태안문학회>를 만들면 이상한 오해들이 있을 것을 우려하여 4·5년의 공백기를 두었다가 1998년 <태안문학회>를 결성하고 <태안문학>을 창간했다.

<흙빛문학>은 이미 태안과 서산 두 지역을 포괄하는 유일한 광역 성격의 지역문학지이다(문학정신과 가치지향을 표방하는 그 이름 때문에 그것이 가능할 터이다). <태안문학>은 그 이름 자체로 태안의 지역성을 표방하는 문학지이다. 이로써 나는 두 가지 성격의 지방문학지를 탄생시킨 셈이다. 문인 명색을 걸치고 지역에서 살면서 현실적인 희생과 손해,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고생을 치르며 두 문학지를 키웠다. 고장을 지키고 산 문인으로서 매우 보람된 일이라 생각한다.

<3>

1983년 1월의 창간호부터 1989년 6월의 제10집까지의 책들을 모아보았다. 내 손으로 직접 만든 책들이다.
▲ <흙빛문학> 초창기 책들 1983년 1월의 창간호부터 1989년 6월의 제10집까지의 책들을 모아보았다. 내 손으로 직접 만든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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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85년 <흙빛문학> 제3집 발간 때부터 1989년 제10집 발간 때까지 햇수로 5년 동안 회장 노릇을 했다. 창간호부터 직접 내 손으로 만들었고, 10집은 무려 450쪽으로 2천부를 찍어 태안과 서산에서 연 이틀동안 큰 규모의 행사를 열기도 했다.

나는 일찍부터 10집 발간 때까지만 회장을 하고 물러나겠다는 공언으로 구성원 모두에게 일종의 '준비'를 시켰다. 거의 온전하게 기반을 닦아놓고, 날개와 바퀴를 다 달아놓은 상태에서 공언대로 회장의 짐을 벗었다. 5년 이상 장기 집권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실행한 셈이기도 하다.

그리고 <흙빛문학> 20집(1994년 상반기호)에 '10년 세월의 마루턱에 서서'라는 글을 썼다. '창간호 발간 전의 사정들', '1982년 마지막 날 밤의 적막한 터미널', '기이한 시비', '군사정권 시절 안보꾼들의 경직된 안보제일주의' 등 네 개의 중간 제목들을 가지고 있는 글이다. 내 홈페이지에도 올라 있는 그 글을 지금 다시 읽어도, 근 30년 전의 일들이 환히 떠오르며 아릿함을 안겨 준다.

창간호를 만드는 과정의 우여곡절들, 서울에서 며칠 동안 창간호 1천 부 제작을 완료한 다음 제본소에서 일부(70권)을 따로 포장하여 택시에 싣고 당시 용산 시외버스터미널 앞으로 와서 그걸 어깨에 메고 눈을 밟으며 육교 계단을 오르내리다가 두 번이나 미끄러져서 큰일날 뻔했던 일, 책을 보고 싶어할 회원들의 심정을 생각해서 집에 연락을 해놓고 마지막 버스를 타고 태안 정류소에 밤 11시쯤 도착했을 때 아무도 나와 있지 않은 현실에서 느꼈던 적막함과 허황함, 자기 시를 고쳤다고 격렬하게 항의하는 한 후배와 시를 고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시 부문 편집 담당 선배와의 분쟁을 조정하느라 애를 먹으며 마침내 진위를 가리는데 성공했던 일, 창간호 발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새마을금고에서 얻은 빚 40만원을 1984년 11월 내 첫 작품집인 장편소설 <신화 잠들다>의 출판기념회 수입금으로 청산했던 일, 창간호 말미의 '회원주소록'에 일부 회원들의 직장 이름('측후소'라는 가명)이 소개된 것 때문에 그들의 직장 안에서 문제가 생겨 배포를 중단하고 이미 배포된 책들을 거의 전량 회수하여 측후소(국방과학연구소 연구평가단) 보안 부서 직원에게 넘겨준 다음 자그마치 두 달이나 지나서야 회원주소록의 '측후소 근무'라는 글자들을 일일이 먹으로 지운 책을 돌려 받았던 일….

생각하면 거짓말 같은 일들이 아닐 수 없다. 정말 내 표현대로 전설 같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한 일이다. 어떻게 그런 조건과 상황 속에서 고달프게 일을 할 수 있었는지 스스로 신기하기도 하다.

지금은 책 만드는 일이 참 간편하다. 글도 대개는 컴퓨터로 쓰고, 편집 작업도 컴퓨터로 한다. 원고도 사진도 모두 인터넷 전송으로 해결한다. 그리고 책을 고장(서산)에서 만든다. 옛날에는 모두 원고지에 육필로 글을 써야 했고, 원고를 모으려면 발품도 팔아야 했고, 서울이나 대전에 가서 며칠씩 묵으며 책을 만들어야 했다.       

'흙빛'의 정의(定意)를 표현하는 글을 뒤 표지에 올리고 있는데, '흙빛'의 정의를 뒤 표지나 표지 날개, 또는 앞머리에 배치하여 부각시키는 일은 1985년의 제3집 때부터 정착되고 전통이 되었다.
▲ <흙빛문학> 10집의 뒤 표지 '흙빛'의 정의(定意)를 표현하는 글을 뒤 표지에 올리고 있는데, '흙빛'의 정의를 뒤 표지나 표지 날개, 또는 앞머리에 배치하여 부각시키는 일은 1985년의 제3집 때부터 정착되고 전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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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책 만드는 일은 돈 만드는 일을 병행해야 했다. 문예진흥기금 지원금 같은 것은 이름도 없던 시절이었다. 돈 만드는 고생이 컸고, 얼굴이 두꺼워야 했다. 한번은 태안에서 가장 잘 된다는 버스정류소 근처의 한 의원을 찾아가서 서울 출신인 원장에서 손을 벌렸다. 그랬더니 그 원장이 이런 말을 했다.

"원래 문학단체가 책을 만들 때는 각자 호주머니 털어서 만드는 겁니다. 나는 고장의 명예와 직결되는 스포츠 단체는 도울 수 있어도 문학단체는 도울 수 없습니다."

좋다, 두고 보자. 나는 자연 앙심(?)을 품게 되었다. 그 날부터 어디를 가든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자리에서는 그 배불뚝이 의사의 말을 전했다. 의원 이름과 원장 이름을 대는 때도 있었고, 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없는 사실을 날조하고 유포하는 건 절대로 아니었다.

그 원장은 돈 몇 푼 아끼려고 했다가 큰 코 다친 꼴이 되었다. 한마디로 무식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안게 되고 말았다. 그는 그 후 나를 보면 어색한 표정을 짓곤 했는데, 언젠가 건강을 잃은 상태가 되어 태안을 떠나고 말았다. 그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다. 그가 건강을 잃었다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는 일체 아무에게도 그 과거지사를 말하지 않았는데, 실로 오랜만에 오늘 또 하게 되었다.

글이 너무 길어졌다. 이상으로 태안과 서산의 지역문학지 <흙빛문학>에 대한 내 추억담 소개를 마친다.   


태그:#흙빛문학, #태안문학, #지역문학, #청소년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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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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