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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살 어르신이 해발 1915m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세상을 얻었다'. 그것도 핫바지 입고 나무지팡이를 짚고 장장 9시간 만에 등정했다가 내려오는 강행군을 '성공'했다. 85세, 82세, 72세, 71세의 마을 주민 4명과 같이 올랐는데, 이들의 평균 나이는 80세가 넘는다.

화제의 주인공은 이병덕(李炳德·91)옹이다. 이정규 경상대 교수(축산학)의 부친인 이씨는 산청군 신안면 중촌리 산성마을에 사는 권순열(85), 이병록(82), 박노윤(72), 이주상(71)옹과 함께 지난 11일 지리산 천왕봉 등정에 성공해 마을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9월 11일 오후 지리산 천왕봉 표지석 앞에서 어르신들. 왼쪽부터 박노윤, 이주상, 이병록, 앞 이병덕, 권순열옹.
 9월 11일 오후 지리산 천왕봉 표지석 앞에서 어르신들. 왼쪽부터 박노윤, 이주상, 이병록, 앞 이병덕, 권순열옹.
ⓒ 김경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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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천왕봉 등정에 나선 것은 우연이었다. 이병덕씨가 얼마 전 "죽기 전에 천왕봉에 한번 가보자"고 말했던 것. 다른 사람들도 "죽기 전에는 한번 가봐야지" 하고 답했다. 이들은 그동안 천왕봉에 굳이 오를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바빠서 갈 생각을 못했다"거나 "꼭 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또 내려 올 걸 힘들게 왜 올라가나"가 이유라면 이유였다.

"죽기 전에 한번은…"이라는 말에 마을 어르신들이 쉽게 단합해 버렸다. 등산화는 물론 등산조끼 하나 없는 이들이 '모험'을 벌이기로 결심한 것. 그 날은 날씨도 맑은 9월 11일. 아침 9시 마을 어귀에 모였다.

마을 뒷산에서 산머루 농장을 하면서 혼자 사는 어르신들을 돌보고 오는 김경란(50)씨가 길잡이를 자처하고 나섰다. 이렇게 해서 6명이 모였다. 그런데 이들의 몰골은 '등산객'과는 거리가 멀었다. 배낭은 말할 것도 없고 등산화나 조끼 같은 기본적인 장비를 제대로 갖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중절모에 운동화를 신은 이도 있고, 아예 구두를 신은 채 나선 이도 있었다. 우리옷 핫바지에 신사복 바지, 또는 매일 집에서 입던 나들이용 점퍼를 입은 이도 있었다. 그래도 이들은 나들이 하듯 지리산으로 향했다.

마을에서 중산리까지는 김경란씨의 머루농장 업무용 더블캡 트럭으로, 중산리 주차장에서 경남자연학습원까지는 버스로 이동했다. 이후부터는 걸어야 했다. 법계사~천왕봉으로 오르는 가파른 길을 숨을 헐떡거리며 올랐다. 젊은 사람도 오르기 힘들다는 등산코스를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올랐다.

"산신령 같다고 사진 찍자더라구"

지리산 천왕봉 표지석 앞에서 이병덕, 이병록옹 형제.
 지리산 천왕봉 표지석 앞에서 이병덕, 이병록옹 형제.
ⓒ 김경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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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마주친 등산객들은 이들을 보고 신기한 반응을 보였다. 마치 산신령을 만난 듯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고, 기념사진을 찍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병덕씨는 "재미있었어. 늙은 노인네 다섯 명이 나무지팡이를 들고 등산을 하니까 젊은이들이 신기하게 보더구먼. 같이 기념촬영을 하자고 하기에 시간을 많이 뺏겼지. 핫바지가 헐렁해 자꾸 흘러내려 애를 먹었다구"라고 말했다.

마침내 천왕봉에 올랐다. 2009년 9월 11일 오후 2시. '지리산 천왕봉' 표지석을 배경으로 어느 등산객보다 당당한 포즈를 취하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어르신들은 "폼을 잡느라고 애를 썼지만 도무지 태가 안 났어. 그냥 찍은 거지"라고 말했다. 김경란씨의 카메라 셔터가 찰칵하는 순간 이병덕씨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먹먹했다"고 한다.

90, 80세 어르신들은 천왕봉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곧바로 하산길에 올랐다. 이들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줄은 알지만 힘들게 올라간 천왕봉에서는 하산길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어르신들은 특별히 운동을 하지 않았고, 평소 해발 200~300m 높이인 마을뒷산 백마산과 월명산을 매주 서너차례 오르내리는 게 전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꾸준하게 산행을 하며 건강을 지켜오고 있다.

아무 음식이나 잘 먹는다고 한 이병덕옹은 90세가 넘도록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에 대해 "잘 먹고 부지런한 것 말고 달리 없다"고 말했다. 그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서 2~3km를 산책한 뒤 아침밥을 먹는 습관을 수십 년째 해오고 있다.

이날 어르신들이 천왕봉에 올라갔다는 소식에 마을에서는 난리가 났다. 천왕봉 주차장까지 달려온 아들과 며느리도 있었다. 모두 기대 반 걱정 반으로 하루를 보냈다. 드디어 해질 무렵 어르신들은 마을로 돌아왔다. 전장에 나가 승리한 장군처럼 '보무도 당당하게' 개선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에게 박수를 치기도 했다.

"나무 지팡이를 잃어버렸는데..."

자연학습원 출발 직전 법계사 표지석 앞에서 선 이병록(82), 이병덕(91), 김경란(50), 이주상(71), 박노윤(72), 권순열(85)(왼쪽부터).
 자연학습원 출발 직전 법계사 표지석 앞에서 선 이병록(82), 이병덕(91), 김경란(50), 이주상(71), 박노윤(72), 권순열(85)(왼쪽부터).
ⓒ 김경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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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장 하연도(69)씨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는 것만 해도 고맙고 존경스러운데, 젊은이들도 가기 힘들다는 천왕봉을 무사히 등산하고 돌아와 주셔서 더욱 고맙고 기쁘다"면서 "어르신들의 뜻을 이어받아 마을 전체가 더욱 화목하고 건강한 마을이 됐으면 좋겠고, 우리 마을이 장수마을, 건강마을이라는 소문이 좀 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산청군 신안면 중촌리 산성마을은 전형적인 우리나라 시골마을이다. 6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현재 절반 이상의 가구가 혼자 사는 어르신들이다. 마을 거주자 중 가장 젊은 사람이 60세다.

공식 통계는 확인되지 않지만 천왕봉 등정 역사상 최고령을 기록하는 게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기록으로 따지자면, 최고령은 물론 가장 빈약한 등산장비를 갖추고도 전문 산꾼 못지않은 실력을 자랑한 기록도 포함돼야 할 듯하다.

한학을 공부해 단성향고 전교와 성균관 전의를 지낸 이병덕옹은 천왕봉 등정에 성공한 뒤 이렇게 말했다.

"정상에 올랐을 때는 다소 힘들었지만 뭔가 해냈다는 든든한 느낌이 들더라구. 그냥 산에 오르는 것이지 무슨 의미를 두지는 않았지. 들고 갔던 나무지팡이를 어디서 잃어 버렸는데 아까워 죽겠네. 그저 좋아하는 일 찾아 하고 기왕 하는 일 즐겁게 하고, 내 몸 내가 챙기고 잘 먹고 부지런하면 살면 되는 거지. 오는 추석 때 손자손녀 오면 지리산 천왕봉 다녀왔다고 자랑해야지."


태그:#지리산, #천왕봉, #산청군, #이병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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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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