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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 개편, 없애고 찢어놓은 곳은 낙안군 뿐

 

전국이 팔도에서 23부로 바뀌게 된 계기는 115년 전인 1894년에 실시된 갑오개혁이다. 그 이듬해, 을미개혁 때는 팔도 중 다섯 개의 도가 남도와 북도로 나뉘고 일제 강점기까지 이어져 현재의 지방행정체제로 굳어졌다.

 

1894년 이후, 지방행정체제는 여러 차례 바뀌기를 반복했는데 그 형태는 일반적으로 <한 지역과 한 지역을 합병하는 것> <한 지역의 일부를 떼어내서 타 지역으로 보내는 경우> <한 지역을 없애고 그곳을 타 지역에 흡수시키는 것> 등이었다.

 

하지만 일제가 1908년 칙령 제72호에 의해 시행한 낙안군의 폐군은 성격이 좀 다르다. 지역과 지역민을 완전히 와해시키기 위한 계략이었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그 이유로 "폐군과 함께 지역과 지역민을 나눠서 인근 도시에 배분한 것"을 들고 있다. 그리고 "이는 납득하기 힘든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폐군도 폐군이지만 어떻게 이런 식으로 하나를 둘로 갈라놓느냐?

 

고을이 없어진 사례는 비단 낙안군만의 문제는 아니다. 을미개혁 때 시작된 행정구역개편에서 수많은 고을이 폐군되거나 합병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곳은 모두가 폐군이 되거나 합병이 돼도 한 고을주민 모두가 움직였는데 유독 낙안군만은 지역뿐 아니라 주민들까지 둘로 나뉘어 의구심을 남겼다.

 

지형적으로 볼 때 낙안군은 표면적으로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바다로 나가는 벌교 쪽의 좁은 공간을 제외하고 산이 고을 전체를 감싸고 있는 형태며 그 안은 평야지대로 직선거리로 고작 7킬로미터 남짓한 독립 공간이다. 그런데 쪼개놨다.

 

경계를 나눠놓은 것을 보면 우습다. 온통 평야지대인 곳에서 1미터도 되지 않는 고랑을 경계로 나누었는가 하면 마을 한가운데를 쪼개놓은 곳도 있다. 한 동네 사람인데 타 지역 사람이다. 그렇게 해서 위쪽은 순천시요 아래쪽은 보성군이 됐다.

 

그럼 위쪽 낙안지역 사람들이 순천시로 나가서 일을 보려면 어떻게 될까? 산을 넘어 25킬로미터나 가야 한다. 아래쪽 벌교 사람들이 보성군으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찬가지로 산을 넘어 30킬로미터나 가야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편하고 효율적인 것을 고려한 행정구역 개편이 아닌 시쳇말로 "골탕 좀 먹어봐라"는 식의 개편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일반적으로 행정구역 변경으로 자신의 고장이 없어지고 타 지역으로 갈 경우 행세를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학연 혈연 지연이 강한 한국사회에서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진 기득권을 내 준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낙안군 사람들은 전부 한 곳으로 가도 시원찮은 판에 지역도 절반이 나뉘고 사람들도 절반이 나눠져서 전혀 교류도 없던 타 지역으로 들어가게 됐기에 누가 봐도 의도적인 낙안군 해체며 분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낙안군의 항일투쟁과 의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제의 낙안군 폐군 분해, 항일투쟁과 의식 말살정책

 

낙안군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와 같은 천연 요새다. 일본이 침략의 거점도시로 지목한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넓은 평야가 있어 곡식이 풍부하고 바다와 접해 해산물까지 풍부한 것은 물론 전남 동부지역에서 물자를 약탈해 일본으로 수송하기에도 안성맞춤으로 욕심 낼만 한 장소다. 하지만  이 지역은 대대로 항일투쟁과 민족의식이 강했고 폐군 당시에는 의병 활동이 남달랐다.

 

한말의병의 항일투쟁사를 보면 낙안군이 폐군되던 해인 1908년, 광양, 순천, 낙안, 보성을 비롯해 전남지역에서 가장 강력히 저항했다. 일제 침략자들은 호남의병 토벌 없이 한일합방을 이루기 어렵다는 판단으로 약 2개월간 전남일대와 전북지역을 휩쓸어 의병의 씨를 말린 사건이 있었다.

 

당시, 안규홍은 1백여 명을 규합해 4월 동소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보성, 낙안을 중심으로 해서 지역을 확대해가면서 광범위한 전투를 벌였고 낙안과 조성 사이의 산에서 벌인 전투는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줬다. 특히, 안규홍이 벌교에서 일본 순사를 맨 주먹으로 거꾸러트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 보다 좀 이른 1905년에 나철은 을사조약을 맺은 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으고 거사까지 실행했는데 비록 실패는 했지만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그가 나고 자란 곳이 바로 낙안군이었고 중앙 정치무대에서 활동했던 인물이었기에 낙안군 출신이라는 점은 크게 각인됐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행정구역 개편의 직접적 영향이었다고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만 훨씬 이전인 임진왜란때 신호를 비롯해 송여종, 이필종, 배몽성, 방덕룡, 오경남 전방삭, 선정립, 이관 등이 왜군을 무찌르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는데 이들이 모두 낙안군 사람들이었다.

 

일제의 낙안군 말살정책, 해방됐는데도 아직까지 이어져

 

101년이 지난 지금, 낙안군을 말살하려 했던 일본은 이미 60여 년 전에 물러났다. 하지만 아직도 옛 낙안군과 주민들을 말살하려는 정책은 곳곳에서 눈에 띤다. 일제 침략자들이야 항일투쟁 때문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명분은 그저 행정구역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다.

 

낙안과 벌교 즉, 옛 낙안군 지역이 함께 뭉쳐 서로 협력하면 지역민들에게 이익이 되는 부분이 주변에는 수없이 많다. 농업, 상업, 공업, 관광 서비스업 등 모든 면에서 그렇다. 가장 큰 이유는 거리다. 인근 도시인 순천시와 보성군과 30킬로미터씩이나 떨어져 있지만 낙안과 벌교는 불과 7킬로미터 거리에 산이나 강 등 자연적 장벽도 없는 평야지대에 함께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자꾸 갈라놓는다. 일제 침략자들은 눈에 보이게 낙안군을 말살했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게 말살하고 고착화 시키고 있다. 같은 땅, 같은 평야인데 농로가 이어지지 않고 주민들도 논. 밭 크기를 말할때 기준이 다를 정도다.

 

낙안군의 역사와 문화는 사라진지 오래고 대대로 내려오며 번창했던 상업지역인 벌교는 몰락하고 낙안에서 벌교로 가려면 시·군이 다르다는 이유로 교통요금도 시외요금이며 도로 확포장도 등한시해 소통의 발길이 끊어져버렸다.

 

25킬로미터씩이나 떨어진 순천만과 낙안읍성은 가까운 듯 표시하며 관광객을 호객 하지만 정작 7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벌교 태백산맥 문학관은 순천시 관광지도에는 없다. 보성 차밭에서 출발해 벌교를 지나 대원사, 서재필기념관으로 올라가는 코스는 낙안읍성을 거치면 더욱 훌륭한 관광코스인데 빼 놓고 돌아간다.

 

낙안읍성을 지나 태백산맥 문학관까지의 평지 7킬로미터는 조선시대부터 비극의 근대사를 느낄 수 있어 역사마라톤을 기획해도 좋은 상품이 될 것을 반쪽 마라톤으로 만들어버린다. 동시대에 태어나 각각 국악과 현대음악으로 국내외에 거장으로 알려진 오태석(낙안)과 채동선(벌교)의 동서양 음악의 합동연주는 꿈도 못 꾼다.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나열하면 밤을 새도 모자란다.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보복이 두렵다?"

 

낙안군 통합을 이야기하면 주민들은 이구동성 그런 얘기를 한다. "보복이 두렵다"고. 요즘 세상에도 보복이 있냐고 물으면 물리적인 보복만이 보복이냐며 보이지 않는 불이익이 더 무섭다고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러면서 "농민이 나서면 농약 분배나 농어민 자금 지원에서 불이익을 줄 것이고 기업인이 나서면 세무조사나 할 것이며 행정에서 나서면 인사에서 불이익이 올 것은 안 봐도 뻔하다"면서 그런 보복은 보복이 아니냐며 얘기도 꺼내지 말라고 한다.

 

그 누구도 불이익 때문에 쉽게 끄집어 낼 수 없는 말 '낙안군'. 요즘 행정구역 개편이 온 나라를 들썩이게 만들지만 그 논의에 앞서 논의해야 할 0순위는 '옛 낙안군' 이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고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눈치만 봐야하는 지역민들의 안타까움이 눈에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낙안군과 낙안군 폐군(廢郡) 
현재의 순천시 외서면을 비롯해 낙안면, 별량면 일부, 보성군 벌교읍 그리고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일부의 땅은 옛 낙안군이었다. 하지만 101년 전인 지난 1908년 10월 15일, 일제는 항일투쟁무력화, 동학혁명진원지분산, 침략거점도시화를 위해 낙안군 자체를 없애버리고 주민들을 인근 지역 세 곳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덧붙이는 글 | 예고: [09-047] 이순신 장군, 전쟁물자 구하러 다니던 남도 300킬로미터 길
남도TV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낙안군, #남도TV, #행정구역, #낙안, #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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