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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유로 여름은 추리소설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추리소설 마니아에게 계절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여름 한철 치열한 두뇌싸움과 서스펜스, 긴장으로 꽉 찬 추리소설을 차례차례 읽어 젖힌 뒤면 한껏 과열된 머리를 식히고 싶어진다.

마치 치열하게 울어대는 매미의 울음이 지나고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가을 풀벌레소리가 반가운 것처럼 말이다. 아니면 굵직하고 걸쭉한 요리들이 한바탕 상을 휩쓸고 지나간 뒤 화룡점정처럼 깔끔한 뒷마무리를 맡아줄 상큼한 디저트의 등장처럼 뭔가 다른 소설로 분위기를 조금 바꿔주고 싶어진다.

짜릿하면서 입에 짝짝 감기는 맛-히가시노 게이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수상한 사람들>
 히가시노 게이고의 <수상한 사람들>
ⓒ 랜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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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 자체만으로 이제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버린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집 <수상한 사람들>은 아무 부담없이 술술 읽어나갈 수 있는 소설집이다.

그러나 재밌다면서 입을 헤벌리고 아무 생각없이 읽었다가는 뒤통수 맞기 십상이다. 단편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단도 끝에 감춰진 날카로움과 예리함을 지닌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집 <수상한 사람들>은 올 더위를 깔끔하게 마무리해줄 구원투수.

<수상한 사람들> 책표지에는 '기상천외 미스터리'라고 쓰여 있지만 그 표현은 어쩐지 좀 생뚱맞다는 느낌이다. 총 일곱편이 수록되어있는데 '기상천외 미스터리'도 있지만 따뜻하고 촉촉한 작품도 있고 등이 오싹하도록 기분 나쁜 작품도 있다. 그런가하면 별 감동없이 밋밋한 작품도 있다. 제 각각의 맛이다.

나는 7편의 작품중에서 <달콤해야 되는데>와 <등대에서>를 인상깊게 읽었다. 뒤통수까지는 아니지만 생각하지 못한 반전(그러나 대개 끝부분쯤에서는 예상하게 되는)으로 가슴이 서늘해진다. <달콤해야 되는데>는 촉촉한 감동으로 오고, <등대에서>는 인간의 이중적인 모순에 가슴이 뜨끔해지는 불편함으로 온다.

고교시절 야구결승전에서 심판의 판정콜 때문에 자신의 일생이 틀어졌다고 생각하는 한 청년의 복수를 그린 <판정콜을 다시한번>은 흥미진진하다. 그때 정말 심판이 오심을 내린 것일까, 아니면 청년이 착각을 한 것일까. 작가는 끝까지 진위를 쉽게 밝히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독자의 구미를 팽팽하게 잡아당기다 마지막에 가서 확 놓아버린다. 그 바람에 독자들은 뒤로 벌렁 나자빠진다. 이런 식이다.

과로사로 어이없이 죽음을 당한 한 샐러리맨의 이야기를 그린 <죽으면 일도 못해>는 오랜만에 읽어보는 밀실 살인 이야기다. 밀실추리가 주는 밀도높은 긴장과 스릴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 

우아하고 신비하고 관능적인 맛 -고이케 마리코

고이케 마리코의 <밤은 가득하다>
 고이케 마리코의 <밤은 가득하다>
ⓒ 북스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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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지나가는 책상에 두고싶은 또 한권의 소설은 고이케 마리코의 <밤은 가득하다>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에 비해 인지도가 덜 하지만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가로서 일본에서는 매우 유명하다.

고이케 마리코는 특히 여성의 복잡하고 관능적인 욕망과 심리를 잘 그려낸 작품을 많이 써서 여성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있다.

이번에 접한 그녀의 <밤은 가득하다>는 고이케 마리코의 또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앞의 <수상한 사람들>이 현실적이고 평면적이고 직선적인 느낌이라면 <밤은 가득하다>는 매우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이면서 우아한 분위기다.

여기에도 총 7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작품의 주인공은 모두 여성이다. 그것도 사랑을 받지못해 언제나 사랑을 갈구하는 여성들이다. 편모에서 자랐다거나,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거나 배신을 당하거나, 홀로 남겨진 여성들이 주인공들이다. 여기에 죽음과 영혼과 같은 영적인 소재들이 더해져 작품에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특히 감출 수 없는 여성의 성적 욕망과 욕구를 신비롭게 표출한 작품들이 다수를 이룬다. 죽음에 이르면서까지 이루고 싶었던 사랑, 자살한 옛 애인이 환영에 비치는 한 여인, 남의 가정을 파탄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던 한 여성의 자살. 이 일곱편의 소설에는 늘 '죽음'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있다.

따라서 일곱편의 작품마다 그 결말에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걸 진정한 반전이라고 해야 할까. 두뇌싸움을 하거나 팩트를 짜맞춰서 문제를 푸는 그런 미스터리가 아니다. 고이케 마리코의 소설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해야 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산벚나무>를 읽고나서는 등골이 살짝 오싹해졌다. 그러나 그 오싹함은 한여름 더위를 물리칠 만큼 싸늘한 것은 아니고 그저 노염(늦더위)을 살짝 달랠 수 있는 정도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이 허해지고 서늘해진다. 그 이유는 읽어보면 알게 될 거다. 아마 그 감정은 밤마다 우는 풀벌레의 심정과 비슷할지 모른다. 초가을밤에 읽기 적당한 책이 <밤은 가득하다>이다.

이런 분께 권하고 싶어요

이런 사람들에게 권하고싶다. <수상한 사람들>은 날마다 늘 분주하거나, 이런저런 약속이 많아서 재밌는 일이 펑펑 터지는 사람 혹은 굉장히 현실적이며, 세상에 귀신따위는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밤은 가득하다>는 올 여름 예기치않은 죽음으로 마음의 상처를 받았거나 혹은 남보다 조금 예민하고 느긋하거나 죽음이 사랑의 끝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아니, 차라리 그 반대가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올 여름 '죽음'으로 상처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해서.


수상한 사람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윤성원 옮김, 알에이치코리아(RHK)(2017)


태그:#고이케 마리코, #히가시노 게이고, #밤은 가득하다, #수상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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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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