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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초간본 동의보감. 맨 윗 부분에 조선총독부 도서라는 인장이 찍혀있는 것으로 우리 역사의 아픔을 느낄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초간본 동의보감. 맨 윗 부분에 조선총독부 도서라는 인장이 찍혀있는 것으로 우리 역사의 아픔을 느낄 수 있다.
지난 7월 31일 유네스코는 <동의보감>을 세계기록유산의 목록에 등재하였다. 온 국민이 박수치며 환호하는 사이에 의사협회에서는 '동의보감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대한 논평'이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많은 언론에서 그 성명을 보도하였고, 그에 대한 비판도 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성명의 내용 중에 한국의학사에서 바로잡아야 할 식민사관과 제국주의적 역사관이라는 두 가지 논점이 명확히 드러나고 있어서 안타깝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이다. 논평에는 "허준 선생 주도하에 기존의 중국 의서 등을 바탕으로 편집한 동의보감에 대해"라는 구절이 있고, 또 "동의보감은 … '투명인간이 되는 법', '귀신을 보는 법' 등 오늘날 상식에는 전혀 맞지 않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라고 하는 대목이 있다.

조선의 의학사를 가장 먼저 기술한 일본인 미끼 사까에(三木榮)와 조선인 김두종(金斗鍾)은 모두 1920년대에 일본에서 의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에 의한 의학사 기술의 주된 스토리는 두 가지이다. 전통의학이 주도한 시기에는 중국에서 기원한 의학을 조선의학이 언제부터 수용을 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근현대 시기에 접어들면 해부학과 외과시술, 그리고 전염병학에 대한 화두를 던지면서 전통의학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현대의학의 시대가 열리는 것을 필연적인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신기할 만큼 천편일률적인 수백 권의 한국 의서들에 대한 평가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 의학서적에 대해 평가를 하면서 '중국 의서에 바탕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설명이 나오거나, '독특한 견해 없이 편집, 또는 짜깁기만 한 책'이라는 내용을 덧붙인다. 또 근현대 시기에는 '한의학에는 해부학이 없다'는 것과 '전염병의 대처에 무방비하였다'는 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것만도 수백 권에 달하는 한국 의서들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이렇게 천편일률적일 수 있는지 신기하기까지 하다.

의사협회의 이번 논평에도 예외 없이 '중국의서 등을 바탕으로 편집한'이라는 불필요한 친절을 붙여놓은 것은 왜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통해서 확인해야 할 점이 있다.

현대사회에서 학자들이 다른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인용할 때 국적을 가려가면서 인용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좋은 연구성과이기 때문에 인용을 하는 것인가? 자동차나 핸드폰처럼 완제품의 브랜드에 따라 국산품이라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국산 부품의 개수나 우리나라에서 소유한 원천 기술의 개수, 또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원재료를 썼기 때문에 국산품이라고 하는 것인가? 미국에서 많은 의료기술과 의학지식을 배워오기 때문에 의료기기와 약까지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 의료계의 현실에서 '미국의학 등을 바탕으로 조직한 것에 불과한 ○○ 대학병원, △△△ 의대교수'라는 역사적 평가를 내린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은 여전히 식민지 근성이 남아 있는 국가라는 연구결과를 도출해낼 것이 아니면 의학발전에 도움 되지 않는 불필요한 언급일 뿐이다.

'오늘날 상식에는 전혀 맞지 않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음'이라는 것은 조금 더 지나친 논평이라 생각된다. 예를 들어놓은 '투명인간이 되는 법', '귀신을 보는 법'이라고 하는 것은 총25권의 <동의보감> 중 권9에 들어 있는 '잡방'(雜方)의 일부이다.

이 잡방에는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 쓸 수 있는 다양한 대체 음식과 약재를 쓰는 40여 가지 방법을 기록한 '구황벽곡방(救荒辟穀方)', 의학과 밀접한 관계는 없어도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13가지 방법을 기록한 '제법(諸法)', 향기를 사용하여 벌레를 쫓든가 피부질환을 관리하고 양생에 도움이 되게 하는 연기내는 방법, 향기 나는 술 담그는 법, 향기 나는 연고 만드는 법 등 65가지 방법을 실어놓은 '향보(香譜)'로 크게 구성된다.

'잡방'을 기록한 자체가 <동의보감>이 질병치료를 뛰어넘는 근거

이러한 '잡방'을 기록하였다는 것 자체가 동의보감이 질병치료를 뛰어넘어 백성들의 건강증진을 위해 얼마나 다양한 정보를 실었는가 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 몸을 숨기거나 귀신을 보는 방법이란 것은 '제법'에 실린 것으로 '추위를 이기는 법'이나 '옷에 묻은 떼와 기름을 제거하는 법'과 같이 실린 것이다.

잡방은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해 100여 가지 방법을 기록하여 보건학적으로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것으로 중국의 의서들에서는 보기 드문 내용들이다. 오늘날 상식에도 부합할 뿐 아니라 오늘 날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100여 가지 합리적인 내용들은 외면한 채 단지 두세 가지 불합리한 기록들을 뽑아내어 "오늘날 상식에는 전혀 맞지 않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음"이라고 평가한 것은 무엇인가 그릇된 의학사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필자가 떨쳐버리고 싶은 의학사관을 심어준 의학사의 선두주자들인 미끼 사까에와 김두종의 <동의보감>에 대한 평가는 현재의 의사협회 것보다 더욱 신랄한 것이었을까? 미끼 사까에는 <동의보감>에 대해 논리정연하게 기술된 동양의학의 보고라는 담담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데 반해, 서울의대 교수를 역임하였던 김두종은 현대의학적인 시각에서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는 평을 덧붙였고, 현재의 의사협회에서는 불합리한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고 하였으니 우리가 믿고 싶은 것처럼 역사라는 것이 늘 옳은 방향으로 진보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의보감>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의 등재라는 소식을 통해 <동의보감>의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일까? <동의보감>을 통해 한국의학사의 어떠한 면을 보아야 되는 것인가?

모든 역사적 사실에는 어두운 그늘과 밝은 측면이 항상 공존할 것이다. 보는 시각에 따라 조선의 붕당정치를 현재 시점의 정당정치와 같은 긍정적인 측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당리당략에만 얽매인 당파싸움이라고 매도할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식민사관이라는 것은 우리 역사의 어두운 면만을 부각하고 나열하여 우리 역사가 필연적으로 식민지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제국주의적 역사관은 오리엔탈리즘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데, 서구의 것은 늘 합리적이고 근대성을 띠는 데 반해, 동아시아 전통문화는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이라는 사고를 드러낸다.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400년 시공을 초월한 가치에 점수 준 것

우리 전통음식인 김치나 된장찌개, 청국장은 보는 관점에 따라 미개한 음식문화일 수도 있고, 뛰어난 발효음식일 수도 있다. 과거 전통음식을 포기하고 서구인들처럼 먹어야 키도 크고 운동도 잘 할 수 있다는 논리는 서구적인 가치를 우선시여기는 사람들로부터 나왔다. 하지만 서구사회에서 한식에 대한 열풍이 불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유네스코에서 <동의보감>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 것은 400년이라는 시공을 초월한 가치에 점수를 준 것이다. 400년을 뛰어넘어 보건의학사적으로, 양생의학적으로, 또 동아시아 전통의학의 새로운 획을 그었다는 점에서, 현대의학이 전래되기 전까지 동아시아 사람들의 건강과 질병을 책임졌다는 점과 현대의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분야에도 많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어 현재에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물론 400년 전의 의학서적이기 때문에 400년 전의 시각과 세계관을 갖고 있다는 점은 당연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불합리한 내용도 들어 있을 것이다.

현대적인 대학에서 교육받고 연구하는 한의사들이 투명인간을 만들고 귀신을 보기 위해 <동의보감>을 공부하는 것은 아니다. <동의보감> 속에는 질병으로부터 인류의 고통을 덜어줄 수도 있고, 현대의학에서 놓치고 지나간 선조들의 수많은 지혜가 숨어 있기 때문에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이다. 한국의학사를 다시 읽음으로 인해 과거에는 폄하받고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된 것들 중에서 현재의 우리에게, 또는 미래의 우리 후손들에게 큰 부가가치를 갖다 줄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보물찾기'를 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필자주] 연재를 시작하며
우리는 몇 해 전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전국가적인 토론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입장에 서있는 집단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또 보수와 진보 간의 갈등이 역사에 대한 해석과정에서 표면화되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 바로 세우기의 과정이 정치경제사 분야에 집중된 채 각 세부 분야별로 과거사에 대한 청산은 진행되지 못했다. 의학사(醫學史)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근대사의 기술에서 가장 뼈저리게 아팠던 부분 중 하나는 각 분야의 역사를 일본 사람들이 먼저 썼다는 것이고, 그 뒤를 이어 기술한 한국인들은 식민지 교육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특히 의학사 분야에서는 처음 기술한 사람이 양방의사였던 일본인에 이어 일본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만주국의 일본계 병원에서 근무한 의사 출신이었기 때문에 청산해야 될 과거가 더욱 복잡하게 얽혀 있다.

각 학문 분야에서 처음 던져진 화두는 그 파장이 길고 오래 간다. 일본인들에 의해 던져진 한국사의 화두는 무엇인가? 모든 동아시아의 문물이 중국에서 기원하여 일본에서 꽃피워졌는데, 조선의 역사라는 것은 반도국으로서 그 가교의 역할만을 했을 뿐이기 때문에 조선의 역사는 스스로 만들어낸 것 하나 없는 주체성을 상실한 단절의 역사요, 필연적으로 식민지일 수밖에 없는 역사라는 것이다.

첫 화두가 이러했기 때문에 일제(日帝) 시대 이후 많은 역사가들은 조선의 오랜 역사 기간 내내 자주성을 애써 강변하게 되었다. 이미 주권을 갖고 오랜 기간 국가를 유지한 나라의 역사를 써내려가면서 내내 우린 자주 독립국이었다고 외치는 역사 기술,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한국의사학회(韓國醫史學會, 회장 맹웅재)에서는 지난 10여 년간 한국의학사의 기술에서 잘못 던져진 두 가지 화두를 고쳐나가기 위해 많은 토론과 연구를 진행해왔다. 첫 번째는 일본에 의한 의학사의 식민사관을 고쳐나가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근대화의 논리를 앞세운 제국주의적 의학사관을 바로 잡는 것이었다.

필자는 국민들이 꼭 알아야 할 이러한 문제점들이 부각될 수 있는 한국의학사의 주제들을 선정하여 연재를 시작할 예정이다. 단, 연재될 내용들은 필자의 단독 연구 결과물이 아니라 학회에서 논의된 내용들을 필자가 대표하여 전달하는 것임을 밝혀둔다. 신문이라는 지면의 특성상 연구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지 못하게 되는 것에 대해 독자들과 선배 연구자들께 넓은 아량을 베풀어주시길 부탁합니다.

덧붙이는 글 | 강연석 교수(원광대 한의과대학 의사학교실, yeonkang@wku.ac.kr)는 이번 연재의 대표 필자입니다. 본 원고의 도입부분은 2009년 8월 고 장준하 선생님의 思想界 복간준비호에 본인의 이름으로 기고한 "한의학의 왜곡과 위기"라는 글의 도입부분을 부분 수정한 것임을 밝힙니다.



태그:#한국의학사, #한의학, #동의보감, #사관, #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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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의사학교실 (주)민족의학신문사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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