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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이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산유화>- 김소월

소월시비
▲ 남산공원 소월시비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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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는 노모를 등에 업고 남산에 오르는 것이 효도의 관례

남산(南山:262m)은 곁에 있어도 그리운 사람처럼 서울에 있어도 그리운 산이다. 고려시대만 해도 '남산 관등 놀이'는 매우 유명했다고 한다. 늙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등에 업고 수백리를 행차하여 남산에 오르는 것이 효도의 한 관례였다고 한다.

그것은 '남산관등'을 해야 극락 열반할 것으로 믿었던 풍속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내 아이면 거북등, 잉어등, 북등을, 계집 아이 같으면 알등, 방울등, 수박등을 들고 남산을 오르던 그 때 풍경을 잠시 남산 소월로를 걸으면서 떠올려 보는 것이다.

남산의 순환도로 이름이 소월로로 바뀐 것은 정말 좋은 일이라는 생각도 덩달아 하면서 말이다. 남산은 서울의 허파라고 불리지만, 남산은 서울의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기 좋은 시적인 분위기의 산책로를 가지고 있다. 서울 N 타워로 오르는 돌계단길과 남산 순환로 등이 그것 아닐까.

예장지구(남산골 한옥마을부근),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 박영효 가옥 등 시내에 흩어져 있던 전통 한옥 여러 채를 옮겨 놓았다. 이 지역은 남산골 제모습 찾기 운동의 하나로 1998년 4월 18일에 문을 열었다. 1994년 11월 29일 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하여 타임캡슐을 묻은 서울천년타임캡슐광장이 있다. 문화재로는 서울특별시 지방문화재 제5호인 와룡묘가 있다.
▲ 남산을 알면 서울이 보인다 ? 예장지구(남산골 한옥마을부근),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 박영효 가옥 등 시내에 흩어져 있던 전통 한옥 여러 채를 옮겨 놓았다. 이 지역은 남산골 제모습 찾기 운동의 하나로 1998년 4월 18일에 문을 열었다. 1994년 11월 29일 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하여 타임캡슐을 묻은 서울천년타임캡슐광장이 있다. 문화재로는 서울특별시 지방문화재 제5호인 와룡묘가 있다.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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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은 서울 중구 장춘당 공원 동네였다. 그래서 어릴 적 우리집에 함께 사는 순이 언니의 손에 잡혀 많이 올라왔다. 그때 언니가 "어서 돈을 벌어서 고향 부모님 남산 구경 시켜주고 싶다"고 이야기하던 말이 내 머릿속에 잘 잊혀지지 않았다.

나는 어린 마음에 왜 하필 남산 구경일까. 창경원이나 덕수궁도 갈 수 있을 텐데...하고 내심 생각했지만 무슨 까닭인지 나는 순이 언니에게 한번도 묻지 못했다. 왜 언니가 고향 부모님들의 서울 구경을 남산으로 목표를 했는지 깨닫게 된 것은 순이 언니가 우리 집을 떠나고, 서울 남산 케블카를 서울 내기가 아닌 시골 사람이 되어 타던 날이었다.

60-70년대의 효도관광은 서울 남산 구경이 최고

그러니까 1960년-70년대 무렵 부모님을 시골에 둔 채 혼자 상경하여 살아가는 자식된 도리로는 한번쯤은 경제출혈을  해서라도 서울 남산 케블카 태워드리는 것이 가장 큰 효도처럼 생각했던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지금에야 해외로 부모님을 효도 관광시켜드리는 것이 정말 큰 효도처럼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순이 언니가 남산을 노래 부른 것은, 남산을 자주 오르면서 남산만큼 높지도 낮지도 않으면서 서울 구경을 한눈에 내려다 보듯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라고 여겼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남산의 본래 이름은 목멱, 고어로 '마뫼', 서울의 청학동

남산의 본래 이름은 목멱. 이는 고어로 마뫼 즉 남산이란 뜻. 인경이나, 종남이라 칭하기도 했다고 한다. 남산의 풍수는 뽀쪽하고 날카로운 북악의 산세와 다르게 선이 부드러운 산이다. 북악산과 남산은 이렇듯 정조가 다른 산이다.

그래서일까. 남산 북쪽 기슭의 필동 일대는, 조선시대에 시인 묵객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으로 청학이 사는 선향이라 하여 청학동(淸鶴洞)으로 불리웠으며, 경관 또한 아름다워 삼청동, 인왕동, 쌍계동, 백운동과 더불어 한양 5동 (漢陽五洞)으로 손꼽히던 곳이다. 이 골짜기에는 천우각이라는 누각이 있었고 여름철의 피서를 겸한 쉼터로도 유명하였다.

 
동상
▲ 의사 안중근 동상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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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전집'의 저자 '문일평'의 글을 빌리면, "남산이 경성의 전면을 가로막아 비록 좁게 만들었으나 남산이 없었다면 경성은 그만큼 단조하고 범속하게 되었을 것이다. 시내에서 남산을 바라봄도 가하되 남산에 올라 남산을 보는 것도 좋고 다시 남산에서 북한을 배경으로 경성시를 부감함도 더욱 좋다. 보기에는 아름답고 오르기에 편하고 또 전 경성을 한눈 아래 거둘 수 있기는 남산이다. 남산이 경성 발전에 저해가 되는 것과 남산이 경성인에게 위안을 주는 것과 어느 것이 클지는 용이하게 단언할 수 없거니와 남산이 저 산악으로 더불어 경성의 자연을 구성한 요소의 하나가 되는 동시에 시민에게 기쁨과 힘을 주는 원천인 되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남산의 본래 이름은 인경산이었으나 조선조 태조(이성계)가 1394년 풍수지리에 의해 도읍지를 개성에 서 서울로 옮겨 온 뒤에 남쪽에 있는 산이므로 "남산"으로 지칭 되었고 풍수지리상 안산으로 중요한 산 이었다.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산신령을 모시는 신당을 북악산과 남산에 세웠으며 남산에 세운 신당에는 목멱대왕이란 산신을 모시고 있어 목멱신사라고 불렀고, 또한 나라에서 세운 신당이므로 국사당이라고도 했다. 이때부터 인경산은 목멱산으로 불렸다.
▲ 다산 정약용 선생의 동상 남산의 본래 이름은 인경산이었으나 조선조 태조(이성계)가 1394년 풍수지리에 의해 도읍지를 개성에 서 서울로 옮겨 온 뒤에 남쪽에 있는 산이므로 "남산"으로 지칭 되었고 풍수지리상 안산으로 중요한 산 이었다.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산신령을 모시는 신당을 북악산과 남산에 세웠으며 남산에 세운 신당에는 목멱대왕이란 산신을 모시고 있어 목멱신사라고 불렀고, 또한 나라에서 세운 신당이므로 국사당이라고도 했다. 이때부터 인경산은 목멱산으로 불렸다.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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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명소, 안중근 기념관

이처럼 남산은 높지 않아서 오르기 쉽고 오르면 정말 발 아래 서울을 둘 수 있는 전망이 압권인 장소이다. 남산공원을 좀더 역사적으로 구경하려면 아무래도 남산에 있는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기념관부터 방문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곳에는 1970년에 세워진 사단법인 안중근 의사 숭모회 기념관이 있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의 일본 감옥에 갇힌 이후 1910년 3월 26일까지 옥중에서 쓴 유묵과 자서전 등 수십 점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유묵은 서체도 뛰어나지만 글에 담긴 의미와 교훈은 오늘날에도 마음 속에 깊이 되새길 만큼 '명심보감'이다 하겠다.

말씀
▲ 안선생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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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옛 이름은 한양공원...고종의 친필은 통일원 청사에 보관

남산의 역사를 살펴보면 임진왜란때 남산은 일본군의 주둔지였다. 시민들은 이곳을 '왜장터'라 불렀고 일본인들은 남산을 자신들의 성역처럼 여겨 1897년 그 일대 3,000여평을 빌려 '왜성대공원'이라 이름짓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도로개설과 함께 벚꽃 600그루를 심었으며, 지금의 숭의학원 자리에 '대선궁'이라는 신사를 세웠다. 이렇게 일제 강점기때는 서울성곽, 봉수대, 국사당 등이 철거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남산은 서울의 허파라고 불리울 정도로 자연 경관이 수려한 곳이다. 그러나 숱한 역사의 왜곡과 파손, 개발과 고립이라는 굴곡을 겪어온 것이다.

당시 일제에 의해 훼손된 남산이 일반 시민의 공원으로 개발된 것은 1910년이다. 당시는 '한양공원'으로 불리웠다. 그 당시 고종 임금의 친필의 석비는 통일원 청사 옆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국사당 자리는 남산 정상 팔각광장, 지금은 인왕산 서쪽 자락 선바위 아래 옮겨져 내려오고 있다. 일제는 남산에 조선선신궁이라는 일본신사를 세워놓고 우리민족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던 것이다.

타워
▲ 남산 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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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꽃 파리해지마 봄은 벌써 가고
산이 깊구나 푸름이 살쪘구나

향기로만 가만히 있기 싫어 물따라 나오고
괴상한 바위 밑엔 언제나 기이한 꽃이 피었어라

골짜기로 기어드는 연하 은일의 뜻이던가
뒤늦게 피는 탈홍을 못이겨

이제부터 능히 정안, 길선하면
하늘이 공력을 어찌 소나무에게만 쏠리리.
'남산'-'정강오'
서울 에니메이션 센터 들려보세요.
▲ 남산타워로 가는 길에 서울 에니메이션 센터 들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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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블카의 꿈, 그리고 삶의 동화 속으로
▲ 남산 케블카의 꿈, 그리고 삶의 동화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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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봉수대는 서울에 있다하여 경봉수라고 불리기도

서울 남산 봉수대는 1993년 9월 20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의 태조는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후 남산에 봉수대를 설치했다. 전국의 봉수가 최종적으로 모두 남산 봉수대에 전달되도록 하였는데, 남산 봉수대는 중앙 봉수소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남산에 설치된 봉수대는 갑오개혁 다음 해인 1894년까지 거의 500여 년 동안이나 사용되었다. 봉수대의 명칭은 남산의 옛 이름을 따서 목멱산 봉수라고 하기도 하고,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봉수'라고도 불리웠다.

봉수란 근대 통신수단이 발달되기 전까지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중요한 국가적 통신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변방에서 긴급한 사태가 발생한 경우 그 사실을 가까운 관아와 해당 지역에 신속하게 알려 위급한 사태를 긴급하게 대처하기 위한 수단이다.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하나, 적이 나타나면 둘, 경계에 접근하면 셋, 경계를 침범하면 넷, 경계에서 적과 아군이 접전 중이면 다섯을 올리도록 했다.

봉수대
▲ 남산 봉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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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것은 생산적인 능동성이다. 그것은 사람 나무 그림 사상 등에 대한 돌봄, 앎, 반응, 긍정, 즐거움 등을 뜻한다. 그것은 그의(그녀의 또는 그것의)생명력을 증대시키고 소생시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자기를 재생시키고 자기를 증대시키는 하나의 과정이다. -E. 프롬
▲ 남산의 신풍속 문화 사랑한다는 것은 생산적인 능동성이다. 그것은 사람 나무 그림 사상 등에 대한 돌봄, 앎, 반응, 긍정, 즐거움 등을 뜻한다. 그것은 그의(그녀의 또는 그것의)생명력을 증대시키고 소생시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자기를 재생시키고 자기를 증대시키는 하나의 과정이다. -E. 프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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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신 풍속도, '사랑의 자물쇠'

해외 여행 사진이나 영화 속에서 많이 봤던 '사랑의 자물쇠'가 설치되어 있는 곳을 지나면서 생각한다. 빈틈없이 빼곡히 매달려 있는 사랑의 자물쇠를 잠그고 열쇠들은 어떻게 했을까 하는 쓸데 없는 생각말이다.

외국의 경우도 우리와 다르지 않아서, 관광지의 다리 난간 따위에 '사랑의 자물쇠'를 채우고 풍속이 많아서 그 자물쇠를 잠그고 아무도 열지 못하게 열쇠를 함부로 던져 버린 탓에 그것이 또 자연을 오염하는 공해의 원인이 되어 '사랑의 자물쇠'를 설치하지 못하게 하는 나라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청춘남녀의 아름다운 색깔처럼 색색의 남산 타위 근처에서 만난 사랑의 자물쇠들은, 일편 우리네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돈도 명예도 아닌, 바로 '사랑'이란 것을 알려주는 듯 하다.

남산은 이렇게 세월따라 효도의 등불을 밝히던 남산관등에서 청춘 남녀의 '사랑의 자물쇠'행렬로 이어져 가는 듯도 하다.

남산보러 시골 김서방 왔다 !
▲ 서울 남산보러 시골 김서방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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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은 서울의 자부심의 상징

남산은 특히 소나무가 많다. 사계절 수목이 푸른 경관이 훌륭하다 하겠다. 수림이 잘 보호되어 꿩을 비롯한 산새·다람쥐 등 산짐승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우리 말에 어디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듯이 서울 시내서 남산 오르는 길은 많다.

남대문·퇴계로3가·장충공원·이태원동·후암동 등 여러 곳으로부터 산꼭대기에 이르는 산책로가 있다. 남산 정상에는 탑골공원의 정자를 본뜬 팔각정과 서울 N타워, 산정부 일각에는 한국의 경위도 원점이 있다.

서울 타워는 1972년 완공된 높이 236.7m의 방송국 종합송신탑으로, 탑 안에는 송신탑시설 외에 사방 60 km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고, 공원 서단부에는 계단으로 이어진 세 개의 광장이 산허리를 타고 펼쳐져 있다.

맨 아래에 있는 광장은 약 2,500평 규모의 어린이 놀이터, 그 위에 6,000평 규모의 백범광장이 있고, 북동쪽에는 1969년 8월에 건립한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이 있다. 남산 분수대를 중심으로 하여 북서쪽에 서울시 교육위원회 과학교육원, 그 맞은편에 안중근의사 기념관이다.

시골 사람 서울 올라와서 김서방 찾듯이 서울에서 남산을 찾지 못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서울 길은 원형, 남산을 오르는 길도 많아 미리 인터넷으로 남산 지도 알고 오르는 것도 요령이다. 남산은 서울의 얼굴이자 서울의 자부심이다. 그 중앙이라는 자부심의 상징처럼 오늘도 서울 N 타워의 첨탑은 하늘을 찌를 듯 하다. 

1991년 남산 제모습 가꾸기 사업을 통하여 남산의 생태성과 역사성이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남산 봉수대가 복원되는 한편 남산외인아파트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 남산 야외식물원이 조성되었다. 남산 제모습 가꾸기를 통한 10년간의 노력 후에도 2004년 남산공원의 이용 실태분석 및 개선방향 연구, 2006년 도심재창조 종합계획의 열린남산만들기 등을 통하여 남산 가꾸기를 위한 노력들이 지속적으로 행하여지고 있다.
▲ 남산을 알면 서울이 보인다 1991년 남산 제모습 가꾸기 사업을 통하여 남산의 생태성과 역사성이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남산 봉수대가 복원되는 한편 남산외인아파트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 남산 야외식물원이 조성되었다. 남산 제모습 가꾸기를 통한 10년간의 노력 후에도 2004년 남산공원의 이용 실태분석 및 개선방향 연구, 2006년 도심재창조 종합계획의 열린남산만들기 등을 통하여 남산 가꾸기를 위한 노력들이 지속적으로 행하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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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남산, #김소월,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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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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