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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이 마지막이었음을 직감했던 것일까. 지난 4월 24일 14년 만에 고향 하의도를 찾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표정은 내내 어두웠다. 특히 선영에 참배를 마친 그의 표정은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것이었다.

 

하의도에서의 마지막 주문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돼버린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그때 DJ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었다.

 

"선영을 참배하고 난 김 전 대통령께서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것은 마치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순간 대통령님께서 어떤 마음의 정리를 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의도를 방문하기 전에 찾은 '제2의 고향' 목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목포 사람 김대중'으로서, 목포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고향방문을 축하하러 온 이들을 "목포·신안·무안에서 온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라고 불렀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히 '목포사람'으로 살겠다"고도 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을 동행취재 하던 기자들 중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친한 기자들끼리 둘러앉으면 "저 어르신께서 이제 마지막을 정리하시는 듯하다"고 안타까워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는 목포에서도, 하의도에서도 마치 자기주문을 하듯 반복해서 말했다.

 

"내게 생명이 있는 한 불굴의 의지로 꾸준히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 함께 노력합시다." 

 

그는 "민주주의와 서민경제, 남북관계가 위기에 빠져있다"고 연설할 때마다 강조했다. 이른바 '3대 국난론'과 함께 그는 이때도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고, 방관하고 방조하는 것도 악의 편"이라고 악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주문했다.

 

마지막 남아있는 자신의 불꽃을 3대 위기를 타개하는 데 불사르겠다는 처연한 의지를 거듭해서 밝힌 것이다. 기자의 당시 취재수첩엔 DJ의 발언을 받아 적은 한 쪽에 '짠하다'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너무도 처연했던 마지막 고향방문길

 

14년 만에 고향을 찾은 DJ는 이미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고, 스스로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불태울 것인지를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남아있는 의지의 원초를 고향방문을 통해서 끌어내고 싶어 했다.

 

실제로 그는 '호남의 정신'과 '하의도 농민운동'의 역사정신을 거론하며 자신의 '불굴의 의지'가 저항의 역사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역사의 긴 흐름 가운데 자신의 삶을 위치 지우고, 역사와 함께 호흡하며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정립했던 DJ답다.

 

그때 기자는 고민했었다. '역사의 장강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 DJ의 마지막 고향방문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심정으로 인생 말년에 고향을 찾는 한 '노(老)정객'으로 DJ를 규정하기에는, 그의 마지막 행로는 너무도 처연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탯줄이 있는 생가를 찾고, 어려서 다녔던 학교를 가보고, 동무들과 놀러가던 바닷가에 서 보고, 조상들이 잠들어 있는 선영을 찾고….

 

보통사람도 고향을 찾으면 흔하게 보내는 일정 속에서 DJ는 역사 속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불굴의 의지'를 이끌어내고 있었다. 적어도 젊은 기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DJ가 쇤 목소리지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3대 국난을 지적할 정도로 세상이 망가지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리고 왜 저 고통스런 십자가를 이제 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보낼 자격이 있는 DJ가 져야 하는가 하는 비탄도 터졌다. 미안하고 또 부끄러웠다.

 

남북화해를 위해서라면 어르고 달래는 일까지 마다않던 DJ

 

당시 한명숙 전 총리의 이른바 'KTX 안 DJ의 발언(DJ가 정동영 후보가 아닌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는)' 때문에 언론에 거의 묻혀버리고 말았지만 그가 목포 환영만찬에서 한 발언은 DJ가 남북관계라는 대의 앞에서 얼마만큼 치밀하고 전략적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DJ는 "이 대통령 주변에 유신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대통령의 유연한 남북정책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이같은 발언은 이 대통령 주변에 있는 대북 강경론자들과 이 대통령을 분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 대통령의 운신의 폭을 넓혀주려는 매우 계산된 발언이었다.

 

심지어 그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고까지 호평을 해주며 속내를 은근히 드러냈다. "현직 대통령이 전임 대통령이 약속한 것을 파기하면 되냐"는 것인데 이는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이행하라는 DJ식 부드러운 압박이었던 것이다.

 

어르고 달래서라도 이명박 정부를 남북공존·남북화해의 마당으로 이끌고 가자고 했던 DJ의 노력은 그 당시엔 무참한 실패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MB정부의 대북 강경책은 갈수록 도를 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DJ는 죽어서도 DJ다. 조문사절단으로 북측 고위인사가 MB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남에 왔기 때문이다. 죽어서까지 DJ가 마련해준 밥상을 MB정부가 또 내팽개치는지 지켜볼 일이다.

 

일기에 남은 고향방문 소회 "행복한 고향방문이었다"

 

 

생전 유독 어린이들을 좋아했던 DJ는 모교를 방문해서 새까만 초등학교 후배들과 함께 밥도 먹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그는 장난기 심한 섬마을 어린이들이 "할아버지, 사인해 주세요"라고 하자 스스럼없이 사인을 해주었다. 아이들과 함께 '사랑해요'하며 기념사진을 촬영할 땐 누가 어른이고, 누가 어린이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그의 미소는 그렇게 해맑았다.

 

어쩌면 이런 낭만적 성품으로 인해 그가 독재에 굴복하지 않고 민주와 평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는지도 모른다. 그가 늘 강조했던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배려도 어린이 같은 철없는 낭만성에 기인하는 바가 클 것이다.

 

그는 "서생의 문제의식으로 현실을 분석하고, 상인의 기질로 현실을 응대하라"고 자주 얘기했었다. 기자는 여기에 '어린 아이와 같은 철없는 낭만성'도 김 전 대통령의 가치관의 토대로 굳이 덧붙이고 싶다.

 

이로 인해 DJ는 진정한 인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박애와 동정은 서생의 문제의식으로는, 상인의 셈법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낭만성의 원초다. 우리는 그냥 대통령을 잃은 것이 아니라 '철없는 낭만성'을 간직했던 유일한 대통령을 잃은 것이다.

 

그가 다시 뭍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이젠 영영 올 수 없는 길이었음을 운명처럼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여객선 차창 밖에서 그의 이 표정을 잡았다. 조금도 선명하게 잡기 위해 줌(ZOOM)을 당겼지만 그의 얼굴은 더 이상 선명하게 잡히지 않았다.

 

배가 고향 하의도를 출발했다. 멀어져가는 고향 하의도와 자신을 낳고 키운 서남해를 다시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역사의 바다 한가운데로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2009년 4월 24일

14년 만에 고향방문.

선산에 가서 배례.

하의 대리 덕봉서원 방문.

하의초등학교 방문, 내가 3년간 배우던 곳이다.

어린이들의 활달하고 기쁨에 찬 태도에 감동했다.

여기저기 도는 동안 부슬비가 와서

매우 걱정했으나 무사히 마쳤다.

하의도민의 환영의 열기가 너무도 대단하였다.

행복한 고향방문이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기 중에서




태그:#김대중, #DJ, #하의도, #고향,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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