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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쌀 수탈 전진기지'로, '진한 아픔이 있는 도시'로 표현되는 군산. 그 뼈아픈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며 취재도 하고,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는데, 오늘은 월명공원과 전망대 옆에 세워진 애국지사 동상 주인공에 대해 얘기하려고 한다. 

34년 전 어린이날 월명공원 풍경. 전망대로 가는 길목인데, 시골에서 나들이 나온듯한 가족의 옷차림들이 이채롭다. 소나무사이로 보이는 전망대에서 풍광을 감상하는 나들이객들은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34년 전 어린이날 월명공원 풍경. 전망대로 가는 길목인데, 시골에서 나들이 나온듯한 가족의 옷차림들이 이채롭다. 소나무사이로 보이는 전망대에서 풍광을 감상하는 나들이객들은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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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 금동 흥천사 입구에서 108계단을 밟고 월명공원 전망대에 오르면, 아스라이 보이는 오성산과 하굿둑, 세월의 한을 품고 흐르는 금강에서 고기잡이하는 '앉은뱅이 배'들이 정겹게 다가오는데, 서해의 섬들과 낙조는 전국 어느 항구도시에서도 보기 어려운 풍광을 자랑한다.

1926년에 발행된 '군산안내'는 명소로 군산공원(월명공원)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곳은 군산부의 서쪽에 있으며 경치가 웅대하고 소나무 숲이 우거져 창연하며 특히 벚꽃이 필 때 조망이 가장 좋다. 금강이 눈앞에 흐르고 있으며 전북의 섬들, 충남의 산야가 일시에 펼쳐져, 4계절 놀기에 적당하다. 산허리에 '군산신사'가 있어 경내에는 장엄한 기운을 느낀다"라고 적혀 있다.

뼈아프게 느껴지는 '신사'란 일본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국조신을 모시는 신당과 각 지역의 토속적인 향토신을 모시는 신당, 일본 황실(皇室)의 조상이나 신대(神代)의 신, 또는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을 신으로서 모신 일본의 사당을 통틀어 지칭하는데 군산 신사는 전망대 아래 회전 그네가 있던 장소에 있었다고 한다.

신사가 있던 자리에 설치한 회전그네, 1976년에 촬영한 사진인데 당시에는 익산, 장항 등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신사가 있던 자리에 설치한 회전그네, 1976년에 촬영한 사진인데 당시에는 익산, 장항 등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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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공원은 일제가 조성했으며 당시에는 동상이 세워진 대사산(大師山)만 한정하는 좁은 지역으로 '각국 공원'으로 불리다, 1914년에 '군산공원'으로 바뀌었는데, 무절제한 벌목으로 숲이 훼손되자 1967년에 부근 산들을 산림보호지역으로 정하고 '월명공원'이라고 부르기 시작,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인들 주택이 자연환경이 좋은 월명공원과 월명산 부근에 몰려 있었다고 하는데, 그때 지은 집들이 지금도 군데군데 남아 있다. 7개 동(洞)이 공원과 연결되어 있으며 개나리, 철쭉이 많고 벚꽃, 소나무가 숲을 이루어 사계절 정취가 뛰어나 많은 시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벚꽃이 만발하는 봄이면 일인들이 소풍을 나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곳곳에서 '게다'(일본 나막신)를 신은 부녀자들이 "아침 꽃"이라는 정종(청주)을 마시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무척 소란스러웠다고 한다.

필자가 어렸을 때 "왜정 때는 째보선창서 공원을 치다보믄 밤이도 대낮 같었응게!"라는 어머니의 탄식조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문제는 해방과 함께 청산되었어야 할 일제 잔재가 암 바이러스처럼 민족혼을 좀먹고 있다는 것인데, 대통령까지 일본에 굽실대며 따라가는 인상을 풍겨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다.  

월명공원, 산교육의 터로 가꿔야

애국지사 춘고 이인식(1901-1963) 선생 동상. 한쪽 팔을 들고 애절하게 외치는 모습이 반성을 모르는 일본과 인두겁을 쓴 일부 친일파 자손, 친일세력에 부화뇌동하는 얼뜨기 지식인들을 꾸짖는 것 같다.
 애국지사 춘고 이인식(1901-1963) 선생 동상. 한쪽 팔을 들고 애절하게 외치는 모습이 반성을 모르는 일본과 인두겁을 쓴 일부 친일파 자손, 친일세력에 부화뇌동하는 얼뜨기 지식인들을 꾸짖는 것 같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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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월명공원에 오르면 전망대 옆에 애국지사 이인식 선생 동상이 믿음직스럽게 버티고 있어 위로를 받는데, 오른팔을 올린 근엄한 모습은 이웃나라 국모를 시해하고, 나라를 빼앗아 쌀을 수탈해갔으면서도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을 꾸짖는 듯하다.

그럼에도, 술자리에서 지인이나 학우들에게 독립투사 이인식 선생을 아느냐고 물으면 모른다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고향이 임피이고, 몇 년 전에는 월명공원 전망대 옆에 동상이 세워졌던데 못 보았느냐고 재차 물으면 "먹고 살기도 바쁜디, 공원에 갈 시간이 있느냐!"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공부할 나이에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옥고를 치르고, 부모에게 물려받은 전 재산(8천 원)을 헌납했던 시대의 선각자가 고향에서조차 외면당하고 있으니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고, 친일파 후손들이 재산을 찾겠다고 소송을 벌이고 있다는 생각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고향으로 이사해서 월명공원을 찾았다가 우뚝 선 애국지사 동상을 보니까 무척 반가웠고, 60년이 넘도록 남아 있는 일제 잔재의 악취를 감해주는 것 같아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동상이 건립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시민이 많고, 발길도 뜸하다고 해서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이 중학교는 인재를 육성하고자 함이오. 선생의 노력 하심은 헤아리기가 어렵네···.”로 시작되는 송공시비(頌功詩碑), 활짝 핀 무궁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중학교는 인재를 육성하고자 함이오. 선생의 노력 하심은 헤아리기가 어렵네···.”로 시작되는 송공시비(頌功詩碑), 활짝 핀 무궁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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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공원은 군산 팔경의 하나이니 시민의 휴식처나 관광지로 개발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 탐사지역으로 지정해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선생님이나 급우들과 자주 찾아 바른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산교육의 터로 가꾸는 것도 미래를 내다보는 진정한 투자라는 생각을 해본다.

춘고(春皐) 이인식(李仁植) 선생은 누구?

군산시 임피면에서 만석 부호였던 이태하씨의 막내로 태어난 춘고 이인식 (1901-1963)선생은 일찍이 한학을 수학, 임피 초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1916년 서울 보성고에 입학, 어려운 학우들에게 정신적, 물질적 선행을 베풀면서 많은 친구를 사귄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이 선포되자 조국독립을 쟁취할 뜻으로 연희전문 김원벽, 보성전문의 강기덕, 경성의학전문의 한위건 등과 3·1 독립만세 주체인 손병희 선생 등 33인 휘하에서 미국영사관 연락담당을 맡는다.

1919년 3월1일 탑골공원에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집결, 태화관에서 33인의 3·1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자 시위 군중을 미국 영사관 쪽으로 유도하고 독립선언문을 살포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그해 3월5일 자택에서 각 전문대 대표 및 고보생 대표 63명이 그간의 투쟁내용 평가와 사후대책 등을 토의하다 3·1 독립운동 학생 중심세력으로 체포되어 구속, 4개월간의 예심 끝에 10개월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외국에서 독립운동

옥중에서 수많은 독립투사를 만나, 외국에서의 활동상황과 독립운동자금의 필요성을 절감한 이인식 선생은 출소하자 암암리에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를 거쳐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으로 거금 8천 원을 헌납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에 입학한다.

1923년 동경대학 철학과에 입학, 재일본 한국인 학생 항일결사의 일원으로 금우회(錦友會)를 조직하고 월보 등을 발간하면서 항일운동 거사를 도모하다 일경에 발각, 조직이 와해되자 일부 동지들과 엿장수로 변장하고 중국으로 탈출, 1925년부터 망명생활을 시작한다.

1926년 '6·10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국내에 잠입, 거사 활동, 정보수집, 군자금 조달 등 암약 활동을 하며 중국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투사로서의 살신성인 정신으로 조국 광복을 위해 젊음을 바친다.

월명공원 전망대 옆에 우뚝 서 있는 애국지사 이인식 선생 동상. 잠시 만났던 이상용(제자) 씨가 동상을 둘러보고 있다.
 월명공원 전망대 옆에 우뚝 서 있는 애국지사 이인식 선생 동상. 잠시 만났던 이상용(제자) 씨가 동상을 둘러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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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15일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 광복을 맞아 귀국했지만, 이념을 앞세운 권력쟁취 싸움을 개탄하고, 향리인 임피로 내려와 임피중학교 교장으로 부임. "배워야 한다. 그래야 잘 살 수 있다!"는 일념으로 낡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배움에 굶주린 소년·소녀들을 배움의 길로 인도한다.

헌신적인 교육열과 숭고한 교육정신

동상 건립에서 관리, 추모행사에 이르기까지 이인식 선생 관련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는 '춘고 기념사업회' 하영태(71세) 고문은 "이인식 선생님은 제2의 부모로 생각한다"면서 "5년간 농사꾼 노릇을 하며 공부해서 고급공무원까지 지냈는데, 어떻게 은혜를 잊겠느냐"며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인식 선생님에게 교육을 받고 고급공무원까지 될 수 있었다는 하영태(71)씨
 이인식 선생님에게 교육을 받고 고급공무원까지 될 수 있었다는 하영태(71)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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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고문은 "이인식 선생님은 가난한 아이들을 데려다 약초를 캐어 학비를 만들게 했다"면서 "나중에는 농사꾼 학생들로 교실이 넘쳤다"고 전하며 봉급을 털고 수당을 환원해서 학생들 학비로 전환시켰다는 말도 덧붙였다.

열두 대문을 열고 들어가야 안채가 나올 정도로 부호였음에도 거지를 그냥 돌려보내지 않아 "만인덕덕(萬人德德) 이인식"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는 하 고문은 "그 많은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헌납하신 애국자요 선각자이니 제자인 우리가 당연히 모셔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하 고문은 동상을 지금의 위치에 세우자고 당시 강근호 군산 시장에게 추천해서 2005년 10월1일 제막식을 했는데 "선생님이 시내에서 이름난 학교 교장을 지내셨으면 참배객이 많을 텐데, 시골 오지에 있는 학교라서 발길이 뜸한 것 같다"며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하 고문은 선생님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암송하고, 나라 잃은 서러움을 듣고 자란 학생들은 훗날 육군대장, 교육자, 공직자, 법조인, 기술자, 사업가가 되어 모교와 고향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월명공원 동상 앞에서 만난 이상용(68세)씨는 "선생님은 교장으로 재직하면서도 학생들에게 도덕을 가르치셨어요. 성품이 곧으면서 따뜻했던 분이라서 영원한 선생님으로 가슴에 남아 있지요"라며 "고향의 영재를 육성하여 잘 살아가기를 열망했던 시대의 선구자요, 민족의 스승"이라며 임피중학교 시절을 회상했다.

1962년 3월1일 건국 공로훈장 독립장을 수여 받고, 전북 교육위원 재직 중(1963년 3월25일) 생을 마감한 춘고 이인식 선생은 서울 동작구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는데, 그의 헌신적인 교육열과 숭고한 교육정신은 학생들을 물건취급하고 등록금 인상에만 열을 올리는 사학재단들이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와 한겨레필통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월명공원, #애국지사, #이인식선생,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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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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