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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마지막 일요일. 옥상에서 아이가 애써 키우는 강낭콩 넝쿨을 만지다가, 앞집 아주머니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우리집에 도둑이 들었나 봐요. 몽땅 다 뒤집어 놓았네. 어떡해. 어떡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주머니에게 경찰에 연락하게 하고 집에 들어가 보았다. 부엌 환기통을 뚫고 들어와 온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휴가 이틀 집을 비운 사이에 일어난 일이란다. 곧 경찰이 오고 감식을 한다고 또 한바탕 난리가 난다.

벌써 이 골목에서만 몇 번째 일어난 일이냐고, 방범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 아니냐고, 현장에 나온 경찰관에게 이야기해 보았다.

"이 쪽이 방범 취약지구입니다. 골목이 막혀 있고 공사하는 곳이 많아 차가 들어오기도 힘듭니다. 빨리 재개발이 되기라도 해야지 다른 방법이 없네요."

방범 CCTV라고 달면 낫지 않겠느냐고 묻자 그건 구청 소관이라 경찰이 어쩔 수 없단다.

이 골목에서만 올해 들어 세 집에 도둑이 들었다. 우리집도 4월에 방범창을 자르고 들어와 아이의 돼지 저금통까지 몽땅 털어갔다. 5년 전에도 창을 깨고 들어와 아이 돌반지 등을 몽땅 털어갔었다. 그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아이 엄마는 몇 달을 불안에 떨어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경찰 감식반이 와서 지문 채취한다고 여기 저기 검정칠을 해놓고…. 그러나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그때 온 경찰은 "못 잡아요. 어떻게 잡아요. 혹시 다른 곳에서 잡혀 여죄를 추궁하다 나오면 모를까" 그런 말을 남기고 할 일을 다한 듯 가버렸다. 올 4월에 두 번째 도둑이 들었을 때는 오히려 담담했다. 현장 감식한다고 했을 때 아내는 청소하기만 번거롭다고 그만두라고 했다. 두 번째도 범인은 잡히지 않고 또 앞집에 도둑이 들었다.

노력하겠다는 말만하는 구청, 재개발해야 도둑 막는다는 경찰

길 중간쯤 나란히 버티고 있는 전봇대. 이 때문에 이삿짐차는 물론 화재시 소방차도 들어 올 수 없다. 5년 전부터 민원을 냈는데 아직도 노력하겠다는 답변밖에 없다.
▲ 한쪽이 막힌 골목길 길 중간쯤 나란히 버티고 있는 전봇대. 이 때문에 이삿짐차는 물론 화재시 소방차도 들어 올 수 없다. 5년 전부터 민원을 냈는데 아직도 노력하겠다는 답변밖에 없다.
ⓒ 안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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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청 홈페이지에 민원을 냈다. 5년 전에도 제기했다가 해결은커녕 이곳 저곳에서 전화만 오고 사람만 피곤하게 해서 포기한 민원을 다시 제기했다. 좁고 한쪽이 막혀 있는 골목. 입구쪽 골목에 차라도 한 대 주차되어 있으면 안쪽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알 수 없는 골목. CCTV를 설치해 달라는 것과 골목 중간쯤 나란히 선 두 개의 전봇대 중 하나만이라도 제거해서 이삿짐 차나 화재 등 응급상황에 소방차라도 들어올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두 번씩이나 제기하는 민원이고 너무나 절박한 문제이기에 어느 정도 해결해 주지 않겠느냐는 믿음이 있었다. 8월 7일 '접수하신 민원이 처리 완료되었습니다'라는 답변 메일이 왔다. 그러나 내용은 전혀 처리되지도 해결되지도 않은 그냥 노력하겠다 이상의 답변은 아니었다.

"우선 선생님께서 요구하신 지역에 대하여는 **경찰서에 방범순찰을 강화토록 요청하겠으며, 향후 추가설치 계획시 위와 같은 선정절차에 의거 처리코자 함을 알려드리니 많은 이해 있으시기 바랍니다."

"귀하께서 말씀하신 한전주 및 통신주는 한전**지점 및 KT**지점에서 유지관리하는 시설물로, 본 지역은 금년도 하반기 중으로 우리구 치수방재과에서 하수관거 정비사업을 시행할 구간으로 공사시행 시 해당 유관기관(한전, KT)과 협의하여 적극 검토토록 할 예정임을 알려드리오니 이 점 많은 이해 있으시기 바랍니다."

5년 전에도 똑같은 답변이었다. 금방이라도 해결해 줄 것 같이 호들갑을 떨더니 구청에서는 한전과 KT에 연락하는 것으로 자기 일을 다 마쳤다는 듯 손놓아 버리고, 한전에서는 '전신주 옮기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라며 현장조사 한 번으로 싹 깔아 뭉개 버렸다. KT에서는 아예 나와 보지도 않았다. 그게 5년 전 일이다.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골목에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절도 사건을 감안하시여 골목 안쪽에 방범용 CCTV를 설치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처지에서 불안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한 집에서 도둑이 두 번이나 들어 왔다면 그 불안감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낮에도 잠금장치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 초인종이 울리면 깜짝 깜짝 놀라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절박한 마음으로 쓴 내 마음과 달리 '향후 추가 설치시' '선정절차에 의거' '적극 검토' 등 민원인으로서는 전혀 기대할 것 없는 답변만으로 일관했다.

답답해 담당 공무원에게 전화를 했다. CCTV는 한 대에 2천만 원 이상이 들고 요청하는 지역이 많아 금방은 해결이 어렵단다. 강남 같이 구 예산이 많은 것도 아니니 이해하란다. 전봇대 관련 담당 공무원에게도 전화를 했다. 전봇대 관리권이 한전과 KT에 있기 때문에 자기들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다만 협조요청을 하겠단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는 거대한 전봇대가 하루 아침에 뽑히지만 이삿짐 차 들어오게, 화재방지와 방범을 위해, 전봇대 좀 옮겨 달라는 서민의 요구에는 여전히 노력해 보겠다라는 모호한 대답만 돌아올 뿐이다.

낙후된 동네에 나랏돈 좀 쓰면 안되나요?

누구나 쾌적하고 안전한 주거를 원한다. 이런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해 줄 수 있는 주거 시설이 도시에서는 아파트다. 골목의 주차 문제 때문에 싸우지 않아도 되는 곳, 입구마다 CCTV가 설치되어 있고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출입도 불가능한 곳, 단열과 냉방 걱정이 없고 음식 쓰레기 냄새 때문에 코를 잡지 않아도 되는 곳, 놀이터가 없어 아이들이 차 다니는 골목에서 뛰어 다니지 않아도 되는 곳, 이런 곳이 도시의 아파트다.

그 반대가 좁은 골목이 이어지는 서민들의 단독주택, 소규모 연립주택들이다. 그래서 대다수 사람들은 아파트의 삶을 동경하고 단독주택이 많은 곳은 낙후된 곳, 서민들이 사는 곳이라 여긴다(수백평 대지를 가진 단독주택이 몰려 있는 곳 이야기가 아니다).

아파트가 살기 편한 곳, 단독주택이 살기 불편한 곳이라 인식하게 한 데는 정부의 주택정책 탓이 크다. 낡고 오래 되면 재개발 지역으로 설정해 싸그리 밀어 버리고 아파트 지을 궁리만 했지, 오밀조밀한 단독주택을 살기 편하게 만들려는 노력은 거의 안 한다. 빈집 털린 현장을 찾은 경찰관조차 단독주택 지역을 재개발 해야 방범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을 할 정도라면 단독주택 지역, 달동네 같은 곳에서 치안·방범·화재·환경 무엇 하나 정부에 기대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일 뿐이다.  

주변에는 아파트가 아무리 살기 편하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근접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내가 사는 동네만 해도 폐지를 주워 모아 살아가는 할머니부터, 강남에 직장을 두고 조금 싼 곳을 찾아 단독 주택에 세 들어 사는 사람, 지하방에 모여 사는 외국인 노동자들까지 주로 여건이 어려운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아파트가 아무리 살기 좋다고 한들 그림에 떡일 수밖에 없다. 동네가 재개발되어 아파트가 들어선다면 남아서 입주하는 사람들보다 또 다른 단독주택 밀집지역, 달동네로 보금자리를 옮겨야 할 사람이 훨씬 많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쪽방촌 서민들의 어려운 삶들이 소개된다. 겨울 초입이면 연탄을 져 나르는 서민들의 고단한 삶이, 삼복더위에는 창 하나 변변히 없는 두세 평 방 안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절박한 삶들이 매년 재방송처럼 반복된다.

그럴 때마다 이런 사람들이 사는 동네를, 집을, 방을 쾌적하고 안전하게 바꾸는 데 나랏돈을 좀 쓰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을 한다. 높고 가파른 골목을 깎고, 방범TV를 달고, 차라도 들어갈 수 있게 정비하면, 이런 사람들의 고달픈 삶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화재 위험이 있는 골방 전기배선을 교체하고, 냉난방 시설도 정비해주면 좋지 않을까? 세사는 동안 도배 한 번 할 여유 없는 사람들, 나랏돈으로 싱크대도 바꿔주고 샤워할 수 있는 시설도 만들어 주면 안되는 걸까?

아파트로 이사 가자는 아이에게 궁색한 변명만...

한 기사를 읽어보니 어떤 나라에서는 높은 실업난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실업자들을 고용하여 서민 주택의 창을 이중창으로 바꾸고 난방 시설을 개선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에너지 사용이 줄어드는 2중의 효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 기사를 보면서 우리나라에도 지금 시행되고 있는 공공근로니 희망근로니 하는 일자리들을 서민들의 주거환경을 개선하여 삶을 질을 높이는데 적극 활용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았다.

단독주택이 모여 있는 골목에는 주차할 공간도 마땅치 않고 쓰레기도 잘 치워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곳을 한꺼번에 재개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단독주택에는 선택의 다양성이 있고 도시의 폐쇄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장점도 존재한다. 노후되어 살기 불편하니 밀어 버리고 아파트를 짓자는 주택정책은 서민을 위한 정책이라고 보기 힘들다.

아파트 지상주의로 가는 주택정책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 달동네라고 불리는 서민들의 공간이 사람 사는 공간이 되도록 정부의 대책이 필요하다. 골목을 정비하고 방범과 화재에 취약한 시설을 보완해야 한다. 주차공간을 갖추고 인도와 차도를 구분해야 한다. 주민들이 알아서 해야 되지 않느냐는 시각은 곤란하다.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이 없다면 단독주택 밀집지역은 미국의 슬럼가처럼 변할지도 모른다.

아이가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한다. "너희들 같이 쿵쿵 뛰면 아랫집에서 매일 야단 맞을 걸? 전에 작은 집에 갔을 때도 쿵쿵 뛰다가 야단 맞았잖아. 그리고 완두콩도 옥상에 못 기르고 마당에 풀장도 설치할 수 없을 걸?"이라고 했더니 다시 이 집이 좋단다. 그런데 며칠 뒤. "아빠 놀이터 있는 아파트로 이사 가요. 이 동네는 놀이터도 없잖아요."

아이는 하루에도 몇 개씩 아파트로 이사 가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 내고, 그럴 능력도 그럴 마음도 별로 없는 아빠는 날마다 궁색한 변명을 만들어 낸다. 동네가 살 만하면 아이와 실랑이도 끝날 텐데 말이다. 아파트에 살고 싶은 게 아니라 아파트 같은 환경을 지닌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 나의 꿈이다. 정부에 묻고 싶다. 이런 생각이 과분한 욕심이냐고.


태그:#주택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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