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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나무와 독립지사 기념비가 나란히 서있는 동구 밖 풍경
 무궁화나무와 독립지사 기념비가 나란히 서있는 동구 밖 풍경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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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무궁화나무와 기념비잖아? 동구 밖 풍경이 다른 마을과 전혀 다르네."

마을이 저만큼 바라보이는 마을 입구에 이르자, 길을 사이에 두고 인삼밭과 마주선 무궁화나무와 기념비가 나그네를 맞는다. 무궁화나무는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대개의 농촌 마을들이 동구 밖 마을 입구에 커다란 느티나무들이 서있는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더구나 무궁화나무 옆에 서있는 기념비는 구한말 일제에 맞서 싸운 이 마을 출신 애국지사를 기리는 기념비였다.

무궁화와 독립지사 기념비가 서있는 동구 밖 풍경

마을 앞 들녘 풍경
 마을 앞 들녘 풍경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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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은 나지막한 다섯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 서있는 산자락 아래 자리 잡고 있었다. 다섯 산봉우리는 그만그만한 다섯 형제가 어깨동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정다운 모습이다. 바위절벽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날카로운 산이 아니고 숲으로 뒤덮여 봉긋봉긋 솟아 있는 부드러운 산이었다.

마을은 밤나무와 각종 과일나무들, 그리고 고추밭과 콩밭, 참깨 밭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마을 앞에서 주변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숲속에 파묻힌 몇 채의 집들과 제법 드넓은 들녘 뿐,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지난 8월 5일, 휴가철을 맞아 처갓집 동서들과 처남들이 함께 뭉치자는 연락을 받고 찾게 된 셋째 동서네 마을인 충남 청양군 목면 화양1구에서 만난 풍경이다. 마을 안으로 곧장 들어갈까 하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에 끌려 개울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넜다.

개울 건너 둑길 아래쪽에는 소박한 모습의 육각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농촌 어느 마을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마을 정자다. 이름도 넉넉한 풍락정(豊樂亭), 그런데 이 마을 정자는 그 풍경이 매우 달랐다. 정자 위에 17~8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대개의 시골마을 정자는 정자만 덩그렇게 세워져 있을 뿐 사람들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마을 정자엔 사람들이 많아 깜짝 놀랐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17~8명이나 모여 있어서 놀란 것이다. 마을 공동회의나 모임이라도 하는 것 같아 그냥 지나치려 하자 누군가 나그네를 부른다.

"지나가는 분, 그냥 가지 말고 이리 올라오세유!"

뒤돌아보니 정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이 손을 흔든다.

"우리 마을 손님인 것 같은데 그냥 가시면 되남유? 여기 술 한 잔 들고 가셔야쥬?"

꾸벅 인사를 하고 정자위로 올라서자 대뜸 술부터 권한다. 역시 정겨운 농촌 인심이다. 잇몸 염증 치료중이어서 술을 못한다고 하자 그럼 음료수라도 한 잔 하란다.

마을 앞 정자 풍락정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마을 주민들
 마을 앞 정자 풍락정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마을 주민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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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윤병일 어르신유? 우리 마을 출신 독립지사 어르신이시쥬. 우리 마을의 자랑이신 분이어서 마을 입구에 기념비를 세워 놓았구먼유."

"그리고 그 무궁화나무유, 원래는 커다란 미루나무가 서있었는데 이 개울에 다리 놓고 마을 입구 길을 옮기면서 기념비와 함께 우리나라꽃 무궁화를 심었구먼유. 독립지사와 우리 무궁화 어울리잖아유? 꽃이 참 예쁘지유?"

마을 입구에 세운 독립지사의 기념비와 나란히 나라꽃 무궁화를 심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활짝 핀 꽃만큼이나 아름답다.

마을의 자랑인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지사 윤병일 선생

화양1구(오살뫼) 마을로 가는 다리 앞에 서있는 마을표지석
 화양1구(오살뫼) 마을로 가는 다리 앞에 서있는 마을표지석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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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의 본래 이름은 '오살뫼'다.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금강변에 우뚝 솟은 앵봉산 줄기에 나지막하게 솟아 있는 다섯 봉우리 아래 있는 마을이어서 '오산미(五山美)'라고 부르다가 발음대로 '오살뫼'가 되었고, 지역 행정마을 개편에서 햇볕이 잘 드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화양리가 된 것이다.

독립지사 윤병일 선생은 본관이 칠원으로 1873년 12월 12일 바로 이 '오살뫼'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듬해인 1906(병오)년 홍성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조참판 민종식을 도와 좌군관으로 일제와 싸웠다. 이른바 홍주의거다.

이들 홍주(홍성)의병들은 남포와 보령에 있는 일본군을 습격하여 병기를 탈취하였다. 그리고 3월 20일에는 홍주성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포 공격이 본격화되면서 의병 수백 명이 전사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선생은 그 뒤에도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1916년까지 10여 년 동안 논산과 연산 등지에서 이용규, 이만식, 조종국 등과 같이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활동을 벌이다 일경에 체포되어 강화 석모도에서 옥살이를 한 분이다.

오살뫼 마을은 독립지사 윤병일 선생과 같은 칠원 윤씨들이 많이 거주하는 집성촌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다른 성씨들도 많았지만 정자에 모여 있는 주민들 중에는 윤병일 선생과 가까운 후손들도 더러 있었다.

농기계들과 붉은 고추를 널어말리는 마을 공터 풍경
 농기계들과 붉은 고추를 널어말리는 마을 공터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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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유. 우리 마을의 자랑이지유, 어디 후손들뿐이겠어유? 우리 마을에서 그런 훌륭한 독립지사가 나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랑스러운 일이지유."

자신은 칠원윤씨가 아니라 타성이라는 주민이 하는 말이었다. 독립지사 이야기가 나오다보니 화제는 자연스레 그 시절로 되돌아갔다.

"어느 지방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일본 사람들에게 아부하고 산 친일파들은 지금도 그 후손들이 다 잘 살고 있대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친일하면서 재산도 많이 모으고 권력도 잡았으니께, 그 돈으로 대를 이어서 잘 살 수 밖에유? 참 잘못된 세상이구먼유"

"그런데 국가를 위하여 목숨바쳐 침략자들과 싸운 독립지사의 후손들은 너무 가난하게 살고유, 이건 너무 불공평 하잖아유?"

그러나 다행이 윤병일 지사의 따님들은 이곳에서 살고 있지는 않지만 대부분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농사는 풍년인데 수확한 쌀을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걱정하는 농심

"저희 마을이유? 분위기 좋지유. 그러니께 이렇게 날마다 많이 모여서 술 한 잔, 음료수 한 잔 나누며 정답게 살지유, 어제는 저분이 사고, 오늘은 내가 샀구먼유."

이 마을은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이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여름에는 시원한 정자에 모이고, 겨울이면 마을회관에 모인단다. 술이며 안주랑 음료수는 누가 사느냐고 묻자. 마을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돌아가며 서로 대접한다는 것이었다.

먹이를 물고 올 부모제비를 기다리는 새끼제비 3남매
 먹이를 물고 올 부모제비를 기다리는 새끼제비 3남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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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세상에 걱정 없는 곳이 어디 있겠어유?  저렇게 벼농사는 잘 지어놨는데 가을에 추수하고 나면 쌀은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먼유. 수입쌀도 문제고, 그나마 북한에 도와주던 쌀도 미곡 창고에 그냥 쌓여 있다는데..."

살아가는데 어려움은 없느냐고 묻자 60대로 보이는 주민 한 사람이 말을 끝내지 못하고 정자 아래 펼쳐진 들녘을 바라본다. 들녘에는 무논 가득 풍성하게 자란 벼가 가득했다. 옛날에는 농사만 잘 지으면 되었지만 요즘은 판로가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나마 좋은 값에 잘 팔리지 않으면 농사비용 건지기도 어렵다며 한숨을 푹 쉬는 노령의 농부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정자에서 내려오자 조금 떨어진 다리 위 양쪽 난간에 기대어 말리는 참깨묶음이 이채롭다. 저만큼 앞쪽에서는 노인부부가 말린 참깨를 털고 있었다. 참깨가 잘 영글었느냐고 물으니 수확이 좋다고 대답하는 할머니의 표정이 밝다. 참깨는 어느 정도 마를 때마다 그때그때 때를 놓치지 말고 털어야 한다고 한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여기저기 붉은 고추를 말리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공터와 마당은 물론 비닐하우스 안에도 널어놓은 고추들이 뜨거운 햇볕아래 말라가고 있었다. 근처 고추밭에도 주렁주렁 열린 고추들이 붉게 익어간다. 골목길 담장에 기대어 세워놓은 참깨들도 정겹다.

마을이름과 부부이름이 함께 써있는 문패가 걸려 있는 대문 기둥
 마을이름과 부부이름이 함께 써있는 문패가 걸려 있는 대문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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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저기 저 새, 혹시 제비 아니야? 제비 맞지?"

마침 마중 나오는 셋째 동서를 바라보다가 그의 마리 위 전깃줄에 앉은 작은 새 두 마리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역시 제비들이다.

요즘 농촌에서도 귀하디귀한 제비 가족을 만나다

"저 제비들 우리 마을 회관에 둥지를 튼 제비 부부일거에유."

마을 회관에 몇 년 째 해마다 찾아와 새끼를 치는 제비가 있다는 것이었다. 동서와 함께 마을회관을 찾아갔다. 정말이었다. 마을회관 처마 밑에 제비 집이 있었다.

"어! 저 집 앞에도 세 마리나 있는 걸."

제비집 밑으로 연결된 전깃줄에 세 마리의 제비들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부리가 노란색이다. 아직 어린 새끼들이었다.

"저건 새끼들이구먼유, 부모 제비들이 먹이를 물어다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새끼들여유."

바로 그때 날렵하게 날아온 제비 한 마리가 새끼에게 먹이를 물려주고 쏜살같이 날아간다. 그렇게 어미제비와 아빠제비는 번갈아 먹이를 물고 날아와 새끼들의 입에 먹여주고 날아갔다. 옛날에는 제비가 흔하여 집집마다 제비가 날아왔지만 올해는 오직 마을회관 한 곳에 둥지를 튼 한 쌍의 제비부부밖에 날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배밭이 있는 뒷산자락에서 내려다본 마을과 들녘 풍경
 배밭이 있는 뒷산자락에서 내려다본 마을과 들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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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도 전에는 해마다 제비들이 찾아와 새끼를 쳤는데 몇 년 전부터 오지 않아서 여간 섭섭한 것이 아니구먼유."

셋째 동서는 해마다 찾아오던 제비가 오지 않아 무척 섭섭하다고 했다. 동서네 집으로 가는 골목길에는 대문마다 문패가 붙어 있었다. 그런데 문패가 서울의 문패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마을이름과 집 고유번호, 그리고 그 옆에 부부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문패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문패의 모습은 동서네 집 대문도 마찬가지였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셋째 처제와 먼저 와있던 처남 내외가 반긴다. 대문간이며 헛간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것은 잘 다듬어 양파자루에 담아놓은 마늘들이었다.

마을 앞 들녘 건너 나지막한 산위에 피어오른 저녁놀
 마을 앞 들녘 건너 나지막한 산위에 피어오른 저녁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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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마을 뒤 배나무 과수원 뒷동산에 오르자 마을과 마을 앞 들녘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100여 호의 큰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50여 호, 100여명의 주민이 모여 사는 경치도 아름답고 평온한 마을이었다. 나이든 농부들이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오붓하게 모여 사는 마을 풍경이 풍요롭고 정겨운 모습이다.

그러나 그 평온함 속에도 걱정근심이 스며있었다. 누가 저들의 걱정 근심을 말끔하게 씻어 줄 수 있을까? 이건 분명 정부의 몫이다. 그러나 농촌을 돌아보지 않는 정부의 정책들이 농심을 멍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들 건너 나지막한 서쪽 산위로 지는 고운 노을이 농부의 속 타는 마음인양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화양1구, #오살뫼, #풍락정, #이승철, #풍년 농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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