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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동 벽화거리의 특징은 그림과 벽, 담, 집 등의 사물이 모두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꽃들 사이에 집이 있고, 빨래가 널려 있고, 조형물 아래에 담장이 있어 사람이 들고나도 자연스러운 멋이 있다. 
              
이린이들이 그린 그림
▲ 이화동 이린이들이 그린 그림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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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거리에는 크고 작은 그림과 조각, 조형물들이 많아 사진 찍을 곳이 많았다. 벽화를 배경으로 연우의 인물사진을 몇 장 찍었다. 벽화는 인물사진의 배경으로 이용해도 좋고 작품자체도 대단한 볼거리인 것 같다.

골목 길 사이사이에 미로처럼 얽혀 있는 작품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개개인의 시각이 모두 달라 여러 명이 이곳을 다녀가더라도 모두 다른 사진이 나온다. 작은 골목 하나하나에서 각자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이해하고 발견하기 때문인 것 같다.
         
벽화거리
▲ 이화동 벽화거리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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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구인광고가 붙은 나무전봇대, 호박 넝쿨 아래에 손으로 직접 쓴 월세 방 벽보, 담쟁이와 함께 평상이 있는 구멍가게, 낙서가 많은 추억이 담긴 이발관 등 옛스러운 맛과 냄새가 넘쳐난다.

이곳의 사람들은 왠지 정겹다. 모르는 길을 물어봐도 너무 쉽게 알려준다. 하지만 아쉽게도 벌써 시간이 3년을 경과하여 몇몇 작품은 망가지거나 칠이 들뜨거나 벗겨진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누가 더 그림을 그려줄 사람 없나요?

잠시 쉬면서 사진도 잔뜩 찍고 물도 마시며 숨을 돌린 다음, 인근의 이승만 대통령 사저인 이화장으로 이동했다. 이화장은 원래 조선 중기의 문신 신광한(申光漢)의 집터로 신대(申臺)라 하였는데, 8·15 이후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이 돈암장을 거쳐 마포장으로 갔다가 마지막으로 옮겨와 살았던 곳이다.  

문이 닫혀 있어 벨을 눌렀더니, 문을 열어준다. 안내원이 나와 예약 여부를 묻는다. 작년 남대문 방화사건 이후로 목조문화재에 대해서는 3일 전까지 사전예약을 받아서 예약된 자만 방문을 허락한다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 동상
▲ 이화장 이승만 대통령 동상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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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다고 겨우 우겨 입구와 주요 건물 사진만 촬영하고 돌아간다는 조건으로 3~4분 동안 머물다 나왔다. 이승만 기념관과 조각(組閣)을 발표하였던 조각정, 1988년에 세운 이승만 동상이 있었다.

다음에 시간을 내어 정식으로 예약을 하고 다시 한 번 방문을 해야겠다. 1인 예약도 가능하다고 하니 연우랑 조용한 때에 와야겠다.

이화장을 나와 대학로로 이동했다. 마로니에 공원 옆에 있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http://www.arko.or.kr)건물을 보기 위해서다. 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사업과 활동을 지원하는 단체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대학로에 본부를 두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현장 문화예술인들로 구성된 11명의 위원들이 합의를 통해 문화예술 정책을 이끌어 내는 곳으로, 정책의 수혜자였던 문화예술인들이 정책의 입안자이자 수행자로 문화예술 행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민간기구이다.

당초 1972년에 공포된 문화예술진흥법에 근거하여 1973년 3월에 한국문화예술진흥원으로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노력이 2001년부터 국회에서 계류되던 중, 참여정부에서 2005년 문화예술진흥법 개정 법률이 공포되면서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 출범하였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은 특수법인이었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민간기구이다.
       
경성제국대학의 본부였던 건물로 지금 우리 문화와 예술의 중심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쓰고 있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경성제국대학의 본부였던 건물로 지금 우리 문화와 예술의 중심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쓰고 있다.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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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의 목적은 예술의 자생력을 신장시키고, 예술 창조를 견인하며, 예술적 융성과 사회생산력의 신장을 동시에 발전시켜 예술시장의 생산력을 확보하는 것과, 궁극적으로 국민 모두가 문화예술이 주는 창조적 기쁨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문화예술진흥기금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 일행이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입주하고 있는 건물이 다름 아닌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의 본관이기 때문이다. 일제가 조선의 통치를 원활히 하기 위해 세운 경성제국대학의 심장에서 한국의 문화예술을 논하고 있는 공간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경성제대 본관은 화신백화점 등의 설계를 했던 조선 최고 건축가였던 친일파 박길룡(朴吉龍)의 작품으로 1930년 8월 착공해 일 년 2개월 만에 완공한 것이다. 1981년 사적 제278호로 지정된 바 있는 이 건물은, 아쉽게도 해방이 된 후에도 한국 대학교육의 중심인 국립 서울대학교 본부로 쓰였다.

1975년 3월 서울대가 관악으로 이전할 때까지 30년간 대학본부로 쓰이다가 1976년 10월부터 문예진흥원이 쓰다가 2005년부터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이어받아 쓰고 있는 곳이다.

박물관으로나 쓰여야 할 것 같은 문화재가 아직도 한국 민족예술과 문화의 심장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바로 이웃 건물에 세 들어 살면서 장애인들의 검정고시를 지도하고 있는 '노들장애인야학' 같은 곳과 맞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갈 곳이 없어 마로니에 공원에서 천막교사를 운영하다가 어렵게 정부 보조금을 받아 월세를 내어가며 힘들게 운영하고 있는 노들장애인야학 같은 곳이 이런 곳에 들어와 '일제의 잘못된 식민지 교육의 장을 우리는 소외받는 장애인들의 교육장으로 제대로 승화하여 이루고 있다'라는 선언을 하고 싶어진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건물 안팎을 두루 둘러본 다음, 식사를 하기 위해 마로니에 공원을 지나는 길에 '쇳대박물관'의 외벽이 특이하여 사진을 한 장 찍어온다. 녹슨 철판 위에 나뭇가지를 조각해 둔 모습이 아름답다.
          
나무가지 조각이 좋은 곳이다.
▲ 쇳대박물관의 벽 나무가지 조각이 좋은 곳이다.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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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을 둘러본 다음, 일행은 샤브샤브와 칼국수로 점심을 했다. 시원한 맥주라도 한잔 하려고 했지만, 너무 더운 날씨라 모두가 '여름 낮술에 취하면 부모도 몰라본다'며 고개를 내둘러 급히 식사를 마치고 해산 했다. 오후 1시가 다 되었다.

나는 연우가 "나도 선글라스를 하나 사 달라."고 해서 대학로 주변을 맴돌다 너무 더워 포기하고는 집으로 향했다.

녀석은 작렬하는 더위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야구를 하기 위해 집 근처 슈퍼에 들러 물 한통을 산 다음, 집에 도착하기 무섭게 세수를 하고는 야구용품을 챙겨들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어린이들은 체력이 대단하다. 나는 일사병에 걸릴 것 같아 샤워를 하고 낮잠에 빠져 들었다.

덧붙이는 글 | 역사, 문화와 함께 하는 서울시 종로 중구 걷기 모임

네이버 카페 http://cafe.naver.com/daipapa



태그:#역사, 문화와 함께 하는 서울시 종로 중구 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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