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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당은 아래로부터의 힘이 규합돼야 가능하다. 따라서 시민사회와 시민이 주력이어야 한다. 정치권은 더러운 진흙탕이다. 더러운 진흙탕을 마른 땅으로 만들려면 의로운 시민들이 동참해야 한다. 이 과정이 없으면 정치는 안 변한다."

 

오는 13일 성공회대학교를 정년 퇴임하는 이재정(65) 교수. 그는 앞으로 한국미래발전연구원에서 노무현 정신에 입각한 새로운 정치운동을 시작한다. 한국사회의 진보정책과 대안을 제시하고 국가발전에 동력이 되도록 일하겠다고 했다.

 

인생의 후반부를 '노무현 철학'과 함께하기로 작심한 그를 지난 8일 만났다. 토요일 오전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가장 먼저 불을 켜고 들어온 그는 '한국미래발전연구원 이사장'이라는 새 명함을 내밀며 억류문제와 남북관계, 친노신당, 노무현정책연구 등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했다. 21년간 성공회대학교에 머물며 '교장', '학장', '총장' 다 하면서도 하지 못했던 학자로서의 아쉬움을 성토하면서.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노무현 정신, 진보정책, 그리고 시민학교

 

-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뒤에 중책을 맡게 됐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우리 사회의 큰 비극이다. 연초부터 한국미래발전연구원을 맡으라고 했지만 고사해왔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 서거 뒤에는 못하겠다는 소리도 안 나왔다. 마침 학교도 정년퇴임하니까 자유스럽게 한번 해보자, 이렇게 됐다."

 

- 한국미래발전연구원은 뭘 연구하는 곳인가.

"쉽게 정리하면 노무현정책연구소다. 참여정부의 정책과 비전들을 더 잘 정리해서 한국사회의 진보정책과 대안을 제시하는 게 목적이다. 앞으로는 추모사업도 한다. 유고집 정리, 노무현의 사상과 철학을 객관화 하는 서적 출판, 시민학교 등등. 아직 경제적 지원이 미약하기 때문에 (명함을 보여주며) 이렇게 뒤에는 회원이 되어 달라는 계좌번호도 넣고. (웃음) 시민들의 십시일반이 모이면 큰 힘이 될 수 있으니까."

 

- 노무현 추모사업회는 언제 출범하나.

"9월 말 공식 출범 예정이다. 현재는 준비위만 구성된 상태다. 봉하에서는 묘역정비 작업에 집중하고 있고, 우리는 노무현 시민학교와 1박 2일 봉하캠프 등을 준비 중이다."

 

- 전직 대통령의 철학과 정책을 연구소로 만든 건 처음 아닌가.

"그렇다. 김대중 도서관과는 다른 차원에서 전직 대통령의 정치적 유산을 개발하고 발전하기 위한 연구소 출범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아예 노무현정책연구원으로 이름을 바꾸자는 얘기도 있다. 고민 중이다."

 

- 오는 13일 퇴임식을 끝으로 21년간 몸담았던 성공회대학을 떠난다. 심경이 어떤가.

"(웃음) 88년 성공회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해서 21년간 '교장', '학장', '총장' 다 했다. 한 자리에서 이름 바꿔가며 취임식만 5번 한 사람도 아마 역사에 없을 것이다. 처음 왔을 때 학생 100명, 교수 4명이었다. 1970년대 반유신 기치를 걸었던 민청학련 때는 그야말로 우리 학교가 민주화를 모의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학교는 숙명적으로 진보와 민주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웃음)"

 

- 참여정부시절, 학계와 정치권에게 B학점밖에 줄 수 없다고 평가했는데, 요즘 정치권과 학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얼마 전 명진 스님이 <민족21> 100호 기념강연에서 이명박 정권은 남대문이 불타고 들어선 '3치 정권'이라 비판했다. 후안무치, 몰염치, 파렴치. 나는 정치를 통해 사회가 망가지고 경제가 희망을 잃는 건 언젠가 회복된다고 본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무너진 건 참 회복하기 힘들다. 신뢰와 존경, 양심. 인간이 지녀야 할 가치가 무너진 건 너무나 안타깝다."

 

- 미디어법 제정과정에서도 그 심각성을 느꼈나.

"국회 스스로 국회법을 무시하고 탈법으로 의안을 가결했다. 탈법으로 미디어법을 제정하는 과정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붕괴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도층이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건 그 자체로 사회가 무너지고 있다는 징표다. 탈세? 위장전입? 거짓말? 부동산 투기?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사회풍조가 이러면 젊은 세대가 병든다. 치유할 길이 없다. 참 슬프다."

 

- 여론전달 매체와 방법이 비민주적으로 회귀할 수 있다는 건가.

"미디어법이 무너지면 민주주의 원칙도 무너진다. 수십 년간 노력해서 쌓아온 여론전달의 매체와 방법이 근본적으로 위협받고 있다. 여론이 왜곡되면 민주주의가 이뤄질 근거가 상실된다. 무엇보다 정부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해치웠다'. 용산참사, 평택사태. 모든 게 '너 죽고 나 죽고 식'이다. 극한에 처해도 정부는 '알아서 하시라' 식이다. 정말 암담하다."

 

"다자간 대화 속에서 고립만 자초하다니"

 

- 남북관계가 20년 전으로 회귀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오바마행정부는 '거물 중의 거물' 클린턴 전 대통령을 통해 여기자들을 데려갔다. 오는 8.15 전에 유씨 등 억류된 우리 국민을 데려온다는 전망은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보나.

"현재 유씨가 왜 잡혀갔고,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으며, 뭘 하고 지내는지 도통 모르는 상황이다. 금강산에서 박왕자씨가 사고 당했을 때는 한 사람의 국민이 소중하기 때문에 금강산 관광도 문을 닫아야 한다고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뭘 하고 있나.

 

미국은 여기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썼다. 급기야 전직 대통령에다 현직 국무장관의 남편이 직접 나섰다. 국민을 지키고 안심시키는 건 국가의 의무인데, 전쟁도 불사한다는 둥 북쪽에 위협적 언사나 하고 안보갈등을 부추기고, 공포를 자극하고. 이게 과연 정부가 할 일인가 생각하게 된다."

 

- 물밑접촉을 할 민간라인도 다 죽었다는 분석이 있다.

"없는 것으로 안다. 민간채널이 완전히 닫혔다. 북쪽에서는 여러 사람들을 초청하고 있지만 정부는 일체 불허하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 무슨 대화가 가능하겠나. 북쪽에서는 전향적으로 해보려는 시도도 했던 모양인데, 참 딱한 정부다."

 

-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국제정세나 북한의 대외정책 방향을 무시하거나 모르는 게 아닌가 싶다. 아서 브라운 전 오바마 정권인수위 정보팀당이 한국에 와서 남북관계에 새로운 정책적 변화가 오지 않으면 미국은 미국대로 간다고 인터뷰까지 했다. 그런데도 못 알아듣는 것 같다. 대북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이 없으면 한반도 문제에서 이명박 정부는 '역할'을 잃게 될 것이다.

 

10·4선언을 이끌었던 정상회담 때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강조했던 바는 종전선언이나 평화체제 확립에 관한 정상간 만남이었다. 매우 흥미가 있다고까지 표현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평화체제와 종전선언 등에 대해 생각이 없는 태도 아닌가."

 

- 클린턴 방북 이후 북미 양자대화가 가능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양자대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정말 곤혹스러운 것은 일본의 총선 결과다. 아소 정부가 물러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을 때 북일간 양자대화가 시작되고, 북미 대화는 본격적 수순에 들어가면? 남쪽만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경우가 된다. 다자간 대화 속에서 고립을 자초한다면 그것보다 어리석은 게 또 있을까."

 

- 조중동은 북한을 겨냥해 '우리민족끼리' 노선을 비판했다.

"나는 조중동을 전혀 안 보기 때문에 그들이 뭐라고 썼는지 모른다. 그러나, 언론이 남북관계에 관한 보도를 일방적으로 하면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는 데 역기능을 한다. 근거 없는 불확실한 보도가 남북관계를 얼마나 악화시키는지 알아야 하고, 반성해야 한다."

 

"민주대연합으로 진보세력 함께 가야"

 

-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친노신당 창당설이 나오고 있다.

"이 논의를 위해서는 큰 원칙이 필요하다. 정치세력으로는 서로 나뉠 수 있지만, 정치목적으로는 진보세력이 함께 가야 한다. 민주당이든, 민노당이든, 시민세력이든 공감대를 만들어야 한다. 성격은 민주대연합이어야 한다. 만일 '친노그룹'만 독자세력으로 남는다면 어렵지 않겠나 생각한다. 참여정부에 관여했던 사람들 속에서의 분열은 없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꿈꿨던 국민통합과 균형발전이라는 점에서 기본정신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정치가 변화하지 않고는 민주주의를 지켜갈 힘이 없다.

 

정치는 정치권만 하는 게 아니다. 노 대통령 서거 당시 5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조문했다. 봉하마을에 160만 명이 다녀갔다. 요즘도 매일 수천 명이 참배한다. 우리 국민의 담백한 정치적 표현 아니겠나. 이걸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 정치권의 숙제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참여와 동행이 어떻게 가능할지 모색해야 한다. 정치공학적 접근은 금물이다."

 

- 구체적으로 논의단계는 어디까지 왔는가.

"일부 적극적인 분들도 있지만 일단 구상 중이다. 당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당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정치의식, 역사의식이다. 정의로운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좋은 정당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 정말 중요한데, 정당이라는 게 정치적 이해관계가 불똥 튀기는 곳이기 때문에 '좋은 정당' 하기가 쉽지는 않다."

 

- 진보진영 내부에 민주당으로는 안 된다는 인식이 퍼져 있지 않나.

"그 평가에 공감한다. 그러나 민주당은 오랜 전통적 야당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리고 지역적 연고를 가진 기득권 정당이라고 폄하하지도 않겠다. 다만, 스스로 자기업적에 도취돼 자기중심에 빠지는 우를 범하지 말았으면 한다."

 

- 올 연말 안에 창당한다는 설도 있던데.

"단언하기 힘들다. 일단 민주당이 미디어법으로 치열하게 투쟁 중이다. 너무 섣불리 정치논의를 시작하기는 어렵지 않나 싶다. 개인적으로는 여러 의견이 나오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국민들의 선택권이 넓어지니까. 국민들 사이에도 새로운 정치세력이 꼭 필요하다는 인식이 형성돼야 새로운 정당의 출현도 가능한 게 아닌가 싶다."

 

- 그 시기는 언제쯤이 될까.

"꼭 선거를 염두에 두고 시기를 저울질하기보다는 긴 역사의 흐름을 놓고 좋은 정당을 꿈꾸는 사람들이 시민사회와 국민들을 설득하면서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너무 앞서서 정당을 만들면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아 힘들어질 수 있다.

 

또 선거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조급해져 일을 그르칠 수 있다.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촛불 들고 아우성치고, 아기 엄마들이 유모차를 끌고 나와 민주주의를 외치고, 경찰 방패에 찍히고 막혔다.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몸을 날렸고 수백만이 추모했다. 그렇지만, 변한 건 없다.

 

결국 사회를 바꾸는 힘은 투표다. 우리 국민은 지난 1년 6개월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용산참사, 평택사태, 미디어법 날치기 강행처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시대정신과 역사적 책임의식을 갖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물중심 정당 탈피하고 컨텐츠로 승부해야"

 

- 시민사회세력의 규합도 중요 변수라고 생각하나.

"좋은 정당이 나타나려면 아래로부터의 힘이 규합돼야 한다. 과거 정당은 권력자 중심이었다. 권력자 의지에 따라 만들어진 정당이 대부분이었다. 이제 앞으로 만들어질 정당은 아래로부터의 정당이 됐으면 좋겠다. 따라서 시민사회와 시민이 주력이 돼야 한다.

 

일반시민들의 정치혐오감이나 부정적인 생각이 바뀔 수 있는 정당이었으면 한다. 정치권은 더러운 진흙탕이다. 따라서 의로운 시민들이 이 더러운 진흙탕을 마른 땅으로 만드는 작업에 동참했으면 한다."

 

- 새로운 정당 출현을 위해서는 인물도 필요한데 진보쪽에 사람이 없다는 평가도 있다.

"희망의 정당은 인물이 아니라 정치적 컨텐츠다. 정책을 수행할 의지와 노력이 있는 사람이 인물이 되면 된다. 나는 제발 인물 중심의 정당에서 탈피했으면 한다. 기성정치인들은 이런저런 흠이 있다.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기 위한 논의, 열린 시민공간에서 활성화되기를 바란다."

 

-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위한 첫발이 노무현시민학교인가.

"1970년대 말 성공회 대성당 주임신부를 할 때 매주 수요강좌를 했다. 강사는 주로 해직교수나 해직언론인이었다. 송건호 선생, 함석헌 선생 등이었는데, 수백명이 왔다. 대학에서도 그런 강연은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떼로 몰려와 강연을 듣고 돌아가 토론하곤 했다. 노무현시민학교는 일종의 정치학교다. 현 정치적 흐름이나 정치적 과제가 뭔지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 시민들의 정치의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 끝으로 하실 말씀은.

"21년간 몸담았던 성공회대학교 교수직을 마치면서 아쉬운 것은 학자로서 역할을 못한 것이다. 학자보다는 학교 경영자로서 역할을 했다. 앞으로 성공회대학교가 수나 양으로서가 아니라 진보적 학문의 메카로서 '성공회학파' 같은 걸 만들었으면 좋겠다."


태그:#이재정 미래발전연구원 이사장, #노무현 철학, #친노신당, #우리민족끼리, #클린턴 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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