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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채 옆 삼층석탑 앞에서 바라본 범종각
▲ 아름다운 절집 부석사 요사채 옆 삼층석탑 앞에서 바라본 범종각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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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먹도록 장가 못간 늙은 노총각이 때 빼고 광을 내서 신붓감을 만나러 가기 전에 느꼈을 법한 애타는 조바심과 초조함을 새삼 이해할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영주의 부석사로 향하는 내내 그러한 심정이었다. 맞선을 보기로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리다 못해 지루해서 혹 떠나갈지도 모를 미지의 여인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가지런히 무릎을 조아리고서 두 손을 곱게 모은 채 단아한 자태로 앉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사진 속 여인을 두근거리며 떠올려 보았다.

서둘러 만나보고 싶었다. 달리는 버스에게 사나운 채찍질을 해서라도 그녀에게 향하는 여정을 급히 재촉하고 싶었다. 그만큼 어서 빨리 만나보고 싶은 호기심 어린 욕망이 가슴에 차오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가까스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버스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로 변할 수 없는 한 꼬리를 문 차량들의 더위로부터의 기나긴 피난행렬을 추월할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가만히 눈을 감고 흥분된 호흡을 진정시켜보기로 했다.

얼마동안 스르르 잠이 든 모양이었다. 고개가 옆으로 툭 떨어지는가 싶더니 스스로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달리는 버스의 창 밖을 살펴보니 초록빛이 무성한 산과 계곡이 수려하게 눈에 들어왔다. 가파른 절벽 옆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는 낙동강 계곡 상류의 꿈틀거리는 푸른 물빛도 시원하게 볼 수 있었다. 흠칫 '영주'라는 이정표가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는 것을 보고는 천년 고찰 부석사와의 대면의 시간이 멀지 않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미세한 입자의 하얀 운무가 뒤섞여 휘감고 있는 봉황산(鳳凰山)의 예사롭지 않은 산세(山勢)와 용모를 볼 수 있었다. 태백산맥이 두 줄기로 나뉘어 각각 제 갈 길로 나아가는 양 맥의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봉황산의 첫인상은 신비로웠다.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의 중턱에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침 없이 다소곳이 안겨 있는 품새는 지리적 풍수적으로도 매우 이상적인 자리매김처럼 보였다.

경상북도 영주라 하면 영남의 내륙 오지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패권을 다투던 시절 신라의 운명을 지키는 북부의 요새, 요충지로서의 영주의 의미는 남달랐을 것이다. 그러한 이 곳 영주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으로 손꼽힌 부석사가 있었고, 그를 만나러 먼 길을 달려온 참을 수 없는 흥분과 설렘이 있었다. 애틋한 교감과 연분을 꿈꾸는 시골 노총각처럼 순진한 소망이 있었다.

인공분수를 지나 매표소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공기와 혼합되어 허공을 흐르며 서서히 얼굴을 적시는 옅은 안개가 끈적끈적했다. 부석사 절집으로 향하며 발 길이 바빠지는 와중, 길 가 옆에 앉아 무언가를 팔고 계시는 한 분의 노파를 우연히 발견할 수 있었다. 굽은 허리를 의자에 기대고 앉아 옥수수 몇 조각을 챙겨 집을 나선 저물어가는 노인의 운명이 눈에도 가슴에도 고스란히 느껴져 왔다. 노인의 앞을 스쳐 지나며 인간의 '생로병사'와 세월을 거스를 수 없는 타고난 우주 속의 먼지 같은 운명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승과 속의 경계라고 할 절집의 첫 관문 일주문
▲ 부석사 일주문 승과 속의 경계라고 할 절집의 첫 관문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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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매표소를 끼고 휘감아 돌아서니 저 만치 완만한 언덕길 위로 드디어 '일주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양 쪽에 기둥을 하나씩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은 일주문은 두 기둥이 일렬로 서 있다고 해서 일주문이다. 그 일주문은 일심(一心)을 상징한다. 성스럽고 신성한 사찰의 공간으로 들어서기 전 세속의 때와 번뇌를 말끔히 씻고서 불법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으라는 속과 승의 경계를 의미하는 관문인 것이다.

일주문에 들어서며 앞서 만났던 노인과 바람처럼 스쳤던 찰나의 인연을 잊기로 했다. 잠시라도 속세의 번뇌를 모조리 툴툴 털어버리고자 했다. 그렇게 마음을 텅 비운 채로 그 곳에 들어서고자 했다. 일주문을 거쳐 천왕문에 이르는 나지막한 비탈길을 쉬지 않고 걸어 올랐다. 넓적한 박석과 흙을 섞어 걷기 좋게 깔아놓은 길 위에는 군데군데 촉촉한 습기가 묻어 있어 여인의 젖은 입술처럼 스리 살짝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부드러운 걸음으로 사뿐사뿐 살살 걷기로 마음을 작정했다.

보물 제 255호로 지정된 높이 4.3m의 잘 빠진 몸매를 가진 당간지주
▲ 부석사 당간지주 보물 제 255호로 지정된 높이 4.3m의 잘 빠진 몸매를 가진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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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으로 오르는 중간 사과밭을 지난 왼편에 늘씬한 '롱다리'와 훤칠한 키를 자랑하며 우뚝 서있는 한 쌍의 당간 지주를 볼 수 있었다. 슈퍼 모델처럼 잘 빠지고 늘씬한 몸매로 세련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허접한 성형으로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미인의 모습이었다. 높이 4.3m의 이 당간지주를 유심히 살펴보니 아래쪽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둘레가 좁아져 수직의 상승감을 체감할 수 있도록 한 섬세한 조형적 의도를 엿볼 수 있었다. 게다가 상단의 끝마무리를 마치 꽃잎처럼, 새의 깃털처럼 날렵하게 구성한 것을 볼 수 있으니 당시 석공의 빼어난 기술과 극진한 장인정신의 내공을 짐작할 수 있을 법했다.

당간지주의 크기나 그 세련된 공력으로 짐작컨대 부석사라는 절집은 작은 규모의 평범한 사찰이 아니었다. 봉황산 중턱 당간지주에 높고 커다란 당간을 세우고 깃발을 달아두었을 텐데, 아랫마을에 사는 중생들에게는 한 눈에 들어왔음직한 위치였다. 부석사 당간지주는 아직 성글지 않은 풋사과 향기로 가득한 아름다운 절집의 입구를 지키는 양 의연하게 서 있었다.

천왕문 안에서 사천왕 상에게 허리숙여 절을 올리는 중생
▲ 간절한 기원 천왕문 안에서 사천왕 상에게 허리숙여 절을 올리는 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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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간 비탈길을 지나니 실질적인 절집의 대문이라 할 천왕문이 버티고 있었다. 돌계단에 올라 천왕문의 안쪽 그늘에 서서 좌우에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악귀를 밟아 제압하고 있는 4명의 사천왕상을 만나볼 수 있었다. 불법을 수호하는 4명의 수호신이 지키고 있는 천왕문(혹은 금강문, 인왕문)은 사악한 세력과 악귀의 범접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다르게 보면, 사뭇 해학적이면서도 유쾌한 웃음을 짓게 하고 있으니 강온의 양면성이 엿보이는 조각을 새긴 목수의 '외강내유'의 미학적 관점이 반영된 작품이라 할 만 했다. 

천왕문 안에서 좌우의 사천왕에게 합장한 손으로 연신 머리와 허리를 숙여 절을 하고 있는 지긋한 아주머니를 보았다. 몸짓으로만 보아도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정성스런 인사였다. 걸음을 멈추고 어두운 그늘이 자욱한 천왕문 안에서 한 폭의 그림처럼 고개 숙인 겸손한 중생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볼 수 있었다. 합장한 아주머니의 공손한 인사는 사천왕에게 이렇게 말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가정의 평화를 해치는 사악한 악귀가 찾아오지 못하도록 보호하여 주소서"
"불법을 수호하는 신성한 힘으로 내 안에 꿈틀대는 이기심과 욕심을 모두 버리게 하소서"
"힘들고 고통 받는 중생들에게 굳센 용기와 희망이 피어나도록 하소서"

흔들리는 사람의 마음에 먼지 같은 번뇌가 쌓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물욕과 갈등, 반목이 켜켜이 기승을 부릴 때면 절집에 찾아와 마음을 다스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왕문을 통과하여 부석사 경내로 들어섰다. 발 앞에 석축 돌계단이 무엇인가 의미심장한 규칙과 불법에 따라 놓여져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놓여져 있다는 것보다는 쌓여 있었고, 절집을 찾는 중생들을 위해 매우 질서 있게 디딤돌이 되어 주고 있었다. 제멋대로 생긴 크고 작은 자연석들이 서로의 간격을 메우며 이를 맞추어 쌓여진 조화로움은 그 자체로도 큰 깨달음을 주었다.

큰 돌은 기꺼이 아래로 놓여 기초를 이루며 위를 받쳤고, 중간 돌은 그 위에 놓여져 석축의 상단과 기단을 연결해주는 물리적 힘의 중추가 되고 있었다. 크기가 작은 돌들은 큰 돌과 중간 돌들의 틈새 사이로 몸을 파고들어 촘촘하고 빈틈없이 공간을 채웠다. 그리고 그보다 더 작은 공간은 흙과 모래가 스며들어 한 치의 허술함이 없도록 자신을 헌신했다. 크고 작은 갖가지 모양의 돌과 흙과 모래는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실존적 가치와 의미에 대한 희열을 조화롭게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석축과 돌계단은 나를 기꺼이 내려놓아 나와 남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 또 그것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것,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조화로움을 실현하는 것, 아마도 이런 것들을 몸소 보여주어 가르침을 주고 있는 상생적(相生的) 건축미학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사시사철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밟으면서 오르고 내리는 이 석축과 돌계단을 올라서며 기분 좋은 상상을 하고, 뿌듯한 교훈을 얻을 수 있어 좋았다.

천왕문을 지나 요사채 앞의 삼층석탑에서 범종각으로 향하는 불이(不二)의 길
▲ 부석사 범종각 천왕문을 지나 요사채 앞의 삼층석탑에서 범종각으로 향하는 불이(不二)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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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문에서 세 계단을 오르니 무량수전으로 향하는 불이(不二)의 길이 '진리는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라고 말하며 안내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길을 사이에 두고 소박한 품새로 좌우 양옆에 나란히 서 있는 남매 같은 삼층석탑의 직립을 볼 수 있었다. 남매처럼 보이기도 하고 형제처럼 보이기도 하는, 전혀 건방져 보이지 않는 소탈하고 준수한 집사 같은 용모였다. 그 곳에서 잠시 끈적거리는 땀과 축축함을 식히고 말렸다. 그러는 사이 시선의 각도로 치자면 약 20~30도 위를 바라보니 와~! 하고 저절로 감탄의 음성이 쏟아지고 있었다. 극락세계를 인도하는 신비로운 풍광으로 저만치 범종각이 보였다. 그 뒤로 일주문부터 여태껏 이어져온 직선의 축과 각도를 달리해 고고하고 아담한 자태로 안양루가 내려보고 있었다. 무량수전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인 안양루가 불법의 공간인 절집에 들어선 부족한 중생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듯 자애롭고 신성한 미소를 지어주고 있었다.     

왼쪽의 요사채를 눈으로 살피고, 오른쪽의 샘터로 가서 석조 안으로 졸졸 흐르는 시원한 해탈의 약수 한 바가지를 떠 마셨다. 목 줄기를 타고 가슴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물은 피로를 풀어주는 카타르시스의 정화수였다.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흥분도 잦아드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차분히 진정시킨 후 이내 다시 범종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튼실하고 건강해 보이는 범종각 1층 누각의 기둥 다리는 결코 노쇠해 보이지 않았다. 말 같이 질긴 힘줄은 건조하게 말랐으되 여전히 쇠하지 않아 보였고, 마치 천하장사 못지않은 강인한 근육처럼 보였다. 나이가 들고 늙어 기력이 쇠한 무기력한 노인의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아직도 두툼하고 거친 종아리와 장딴지를 가진, 나이는 많지만 건강한 어르신이었다. 민흘림기둥으로 위 아래층을 튼튼히 세운 범종각은 건축학적으로도 균형과 안정감을 고루 갖춘 빼어난 용모를 하고 있었다.   

범종각 아래를 지나며 좌우에 가지런한 차림의 자세로 있는 선열당과 응향각을 두루 살필 수 있었다. 적당한 간격과 공간의 배열과 나눔, 산세의 기운을 고스란히 가람의 질서에 잘 교합시킨 자연스러움이 돋보였다. 감히 누구라도 별로 흠을 잡을 수 없는 불법의 공간배치였다.

튼튼하고 강건한 종아리와 장딴지를 가진 범종각 누마루 아래에서 안양루를 바라 보았다.
▲ 범종각 아래에서 바라본 안양루 튼튼하고 강건한 종아리와 장딴지를 가진 범종각 누마루 아래에서 안양루를 바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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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각에서 안양루(安養樓)로 향했다. 일직선의 축에서 왼쪽으로 살짝 빗겨난 자리에 날개를 펼친 것처럼 가볍게 처마를 들어올린 아담한 고전적 미인이 있었다. 건물배치에 있어 지극히 평범한 보편성에서 일탈하여 산의 지형을 따라 순순히 각도의 변화를 준 가람창건의 연출자가 가진 자연주의적 안목은 거장의 수준이라 할 만했다. 그러니 이 절집을 우리나라 건축가들의 필수 답사코스라 하고, 또 그들은 이 절집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 "가장 잘 지은 고건축"으로 손꼽는데 주저하지 않았으리라.

안양루 돌계단을 올라 마당에 걸음을 세우고 고개를 들어 앞을 우러르니, 아, 드디어 무량수전(無量壽殿)이 그 자리에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걸작임을 알 수 있는 빈틈없는 조형적 균형감과 비례, 경박한 치장이나 화려한 기교를 전혀 발견하기 어려운 절제된 천 년 고찰의 아름다운 자태가 있었다.

전면 5칸 측면 3칸의 배흘림기둥 주심포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무량수전의 간결하고 정제된 완벽한 아름다움
▲ 부석사 무량수전 전면 5칸 측면 3칸의 배흘림기둥 주심포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무량수전의 간결하고 정제된 완벽한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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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뿐히 고개를 쳐든 경쾌한 추녀 곡선, 간결하고 풍만한 배흘림기둥과의 조화, 산만하지 않고 단순하여 한량없이 편안함을 주는 공포, 수려하고 정갈한 좌우의 대칭적 안정감, 필요이상의 허세가 결코 드러나지 않는 장식, 시골 노총각의 순진한 눈과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아 버리는 황홀한 매력을 무량수전은 온전히 가지고 있었다. 젊고 발랄한 아가씨는 아니었지만, 그 보다 더 고혹적인 향기를 진하게 발산하는 농익은 여인이었다. 더하거나 뺄 것 하나 없는 완벽한 몸과 마음을 가진 단아한 중년의 미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이었다.

한참동안 제자리에 서서 감상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는 얼마 후 무량수전을 한 바퀴 빙 돌아보았다. 앞에서 보았던 모습, 옆으로 보이는 모습, 뒤에서 보이는 모습은 제각각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배흘림기둥은 위아래의 둘레와 가운데 허리 부분이 이상적인 비례로 다듬어져 주춧돌 위에 힘차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기둥의 볼록한 중간 부분은 기둥머리가 넓어 보이는 착시현상을 막아주었고, 지붕의 육중한 무게를 믿음직하게 떠받치고 있었다.

무량수전의 옆모습, 무량수전의 귀솟음
 무량수전의 옆모습, 무량수전의 귀솟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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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가운데보다 양쪽 귀퉁이의 처마 끝을 더 튀어나오게 한 안허리곡과 건물 귀퉁이의 기둥을 가운데보다 더 높게 처리한 귀솟음은 전면에서 봤을 때, 착시현상을 일으켜 건물의 안정감을 극대화 해주고 있었다. 더욱이 양쪽 귀퉁이 추녀와 추녀 사이를 연결하여 유려하게 흐르는 지붕의 곡선은 천 년의 사찰 무량수전을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운율이었다. 무량수전은 전체적으로 직선과 곡선을 절묘하게 융합시킨 완벽한 건축미학의 소산이었으며, 서방 극락세계를 주재한다는 아미타불의 자비를 중생들에게 무음(無音)으로 전해주는 한량없는 모성(母性)의 품이었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사찰체험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사찰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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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방학을 맞아 사찰체험을 하러 온 어린 아이들이 스님의 뒤를 졸졸 따라 염불을 외며 무량수전 법당 안을 둥글게 돌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로 꽉 들어찬 법당 안에는 들어설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문틈으로 고개를 밀어 넣어 무량수전의 주존인 소조불상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뿔싸, 불상의 방향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지 않은가! 어떤 절에 가든 당연히 불상은 대법당의 정면 한 가운데 정좌된 모습으로 앞(아래)을 향하고 있는 것인데, 옆을 향하고 있다니...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때마침 문득 예전에 책을 통해 읽었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무량수전은 전면 5칸 측면 3칸으로 건물의 앞뒤 간격이 비교적 좁은 편이다. 따라서 불상을 보통의 경우처럼 정면에 배치하면 사람들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진다. 그러기에 무량수전 내부 왼쪽의 치우친 공간에 불상을 배치하고 오른쪽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공간감과 경건함을 느끼게 하려함이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럴 법했다. 막혀있지 않은 천장, 그래서 더욱 웅장해 보이는 공간, 열을 지어 늘어선 기둥의 한편에 불상을 배치하여 경외감을 느끼게 한 의도의 반영은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려시대 대목장인들의 뛰어난 식견과 안목을 짐작할 수 있는 뚜렷한 증거라는 생각을 했다.

국보 제17호로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이다.
▲ 부석사 석등 국보 제17호로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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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과 안양루 사이 마당에는 어딘지 모르게 매우 조신해 뵈는 석등이 하나 있었다.  석등은 정교한 비례를 갖춘 채, '꽃미남' 같은 용모를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요모조모를 살폈다. 보면 볼수록 세련되고 균형 잡힌 몸매에, 화려하고 섬세한 조각에다 기품이 가미된 최고의 양가집 도련님처럼 보였다.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이라는 안내문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무량수전의 오른편 동쪽 위로는 삼층석탑이 하나 서 있어 눈길을 끌었다. 탑은 원래 법당 앞에 세워지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삼층석탑은 법당(무량수전)의 동쪽에 세워져 있었다. 천 년 고찰 가람의 배치에 있어 이유 없는 어설픈 적당함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무량수전 안의 아미타 소조불상이 동쪽을 향하고 있으니 동쪽에 서 있는 이 삼층석탑은 사바세계를 상징하고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보았다. 그 사바세계를 상징하는 탑의 주변을 돌며 절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알 수 없는 그들만의 간절한 이유를 가진 탑돌이를 바라보며 왠지 모르게 가슴이 짠하게 저려오는 심정이 느껴졌다.

의상대사와 중국인 선묘라는 여인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설화가 담긴 부석사의 뜬돌, 절의 이름으로 유래되기까지 했다.
▲ 뜬돌 부석(浮石) 의상대사와 중국인 선묘라는 여인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설화가 담긴 부석사의 뜬돌, 절의 이름으로 유래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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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층석탑에서 내려와 다시 한 번 무량수전의 뒤꼍을 돌아드니 서쪽에 마치 떠있는 바위처럼 바위와 돌 틈 위에 얹혀져 있는 부석(浮石)을 볼 수 있었다. 언뜻 보아 바위의 위아래가 서로 붙어 있는 것 같으나, 또 어찌 보면 붙어 있지 않고 묘하게 틈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의상대사와 중국의 선묘라는 여인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연모의 설화가 깃든 이끼 낀 뜬돌을 보며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으로 내려와 안양루 석축난간에 서서 멀리 아래를 잠시 동안 내려다보았다. 흐릿한 운무 속에 초록의 빛으로 뒤 덮인 태백산맥의 아스라한 연봉들이 고도를 낮추며 남쪽으로 치닫는 경관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초록의 극락정토이자 도솔천의 풍경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소박한 감동을 넘어서는 참을 수 없는 벅찬 감흥이었다.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절집' 부석사를 느끼며, 감상했던 바람 같은 짧은 시간을 돌이켜 보았다. 자연의 지형을 조화롭게 수용한 천 년 고찰, 내 누님 같은 꽃처럼 아름다운 절집을 부드럽게 만지고, 향기를 맡으며, 잊을 수 없는 매력에 깊숙이 빠져들었던 오늘 하루를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순진한 시골 노총각의 애틋한 순정과도 같은 마음으로, 이룰 수 없는 여인과의 사랑을 순순히 가슴에 묻는 심정으로 돌계단에 발을 내려놓았다. 다만 언젠가 다시 만나기로 한 재회의 약속을 평생  잊지 않겠노라는 다짐을 하며 아쉬워하는 스스로의 마음을 위로하고, 또 위로하며 부석사와의 아쉬운 이별을 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8월 2일 답사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태그:#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안양루, #부석, #의상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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