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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이 주말마다 생과 사의 고비를 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7월 13일 폐렴 증상으로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이후 세 번째 주말을 병원에서 보냈다.

 

특히 1일(토) 새벽에는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폐기능이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혈액 투석을 받아 혈압이 갑자기 떨어지는 등 일종의 복합장기부전(multiple organ failure) 상태에 빠져 의료진에 비상이 걸렸다. 혈압 상승제 투여 등으로 다행히 의식과 혈압이 정상을 회복했으나 의료진과 가족들은 일순 긴장했다.

 

주말마다 지역구(전남 목포)를 찾은 박지원 의원은 1일 급거 상경해 이희호씨와 함께 김 전 대통령을 면회했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셋째아들 홍걸씨도 부친을 면회했다. 다행히 위기를 넘긴 김 전 대통령은 부인과 박 의원을 알아보고 박 의원의 손을 잡기도 했다. 그는 기관 삽관으로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중국에 갔다가) 또 오겠다"는 홍걸씨에게 입모양으로 "잘 가"라는 뜻을 지어보였다고 한다.

 

"의식 분명해 의사소통 지장 없어... 이번 주 넘기면 건강회복 기대"

 

안도한 박 의원은 이날 오후 기자들에게 "혈액 투석을 받으면 혈압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며 "동교동 사저에 계실 때도 그런 일이 몇 번 있었지만 곧 정상을 회복했으며, 현재의 혈압도 정상"이라고 밝혔다. 일요일인 2일에도 면회를 한 박 의원과 최경환 비서관은 "최근 뵌 것 중에서 가장 의식이 뚜렷하고 편안해 보였다"고 강조했다.

 

최 비서관은 "의식이 분명한 데다가 중환자실 간호사들이 노련해 '예' 또는 '아니오'라고만 대답하라고 해 소통에 지장이 없다"면서도 "기관절개술로 삽관을 해 말씀을 못하시니 안타까워 하신다"고 덧붙였다.

 

의료진은 지난 주말에 인공호흡기 부착후 처음으로 관에 물을 넣어 주입했다. 김 전 대통령이 물을 소화해 내면 미음으로 전환할 예정이다. 가족들의 희망은 우선 폐가 깨끗해지는 것이다. 폐렴이 완치되어야 중환자실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기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가족과 비서진은 이번 주만 잘 남기면 1주일 뒤에는 호전될 것으로 기대한다. 한 측근은 "본인의 의지가 강해 손도 올리는 등 운동을 하려고 하신다"면서 "반드시 건강하게 모시고 나가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이 고령인 데다가 퇴임 이후 최장기간 입원이어서 행정안전부가 세브란스병원에 김 전 대통령의 건강 상태를 매일 체크하는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도 사실이다.

 

퇴임후인 2003년 5월부터 신장투석

 

김 전 대통령은 원래 신장이 좋지 않았다. 신장 혈액투석을 받기 시작한 것은 퇴임후인 2003년 5월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을 때부터이다. 그는 2003년 3월 당시 한나라당이 단독 처리한 대북송금특별법을 노무현 대통령이 수용한 것을 계기로 몸이 쇠약해져 의료진으로부터 신장투석을 권유받았다.

 

이희호씨는 지난해 11월에 펴낸 자서전 <동행>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그의 마지막 자부심이었던 남북 화해를 위한 통치행위가 특검 도마에 오르게 되자 기력을 잃어버린 것이었다"면서 이렇게 회고했다.

 

"5월 11일 그는 신촌 세브란스에 입원했다. 처음으로 신장 혈액투석을 받았다. 16일 퇴원해 귀가한 이후부터는 정기적으로 (집에서) 혈액투석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한동안 의식을 잃기도 했다. 나는 두려웠다. 1980년 사형선고를 받고도 의연했던 그와 나였는데 말이다. 의료진은 심장 혈관 확장수술시의 혈압 강하 주사 때문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했다."(<동행>, 381쪽)

 

김 전 대통령은 현재 병원 본관 9층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고 있다. 이희호씨는 본관 20층 대기실에 머무르며 김 전 대통령을 간호하고 있다. 잠깐 옷을 갈아입으러 갈 때를 빼고는 동교동 집에 들어간 적이 없다. 박지원 의원과 최경환 비서관은 오전오후에 한 번꼴로 면회하지만 이씨는 수시로 남편을 면회한다.

 

코라손 전 대통령에게 조문 보내는 것도 이씨의 몫

 

집중치료중이라 면회가 안되는 줄 모르고 김 전 대통령을 면회하러 왔다가 못하고 가는 사람들을 대신 접견하는 것도 이씨의 몫이다. 또 1일 코라손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김 전 대통령을 대신해 그와 자신의 이름으로 조문을 보낸 것도 그의 몫이다.

 

70년대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의 강력한 정적이었던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의 부인이었던 코라손은 76년 '3.1민주구국선언'에 가담한 김 전 대통령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자 이씨에게 프랑스 신부를 통해 위로와 격려의 편지를 보내온 적이 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극심한 탄압 아래 있는 남편을 둔 벗'으로 동병상련의 서신을 주고받아왔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이 1980년대 초반 미국으로 망명해 하버드대에 체류했을 때 역시 망명중인 아키노 부부와 친분을 맺었다. 그러나 아키노 상원의원은 귀국 도중에 필리핀 공항에서 암살당했다. 이를 계기로 김 전 대통령이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85년 2월 귀국할 때 미국 일부 의원들이 '한국의 아키노'를 보호하기 위해 동행하기도 했다.

 

이후 남편을 대신해 필리핀 민주화의 상징으로 '피플 파워'를 이끈 코라손 전 대통령은 94년 김 전 대통령이 아태민주지도자 회의를 창설했을 때 적극 도왔으며, 98년 김 전 대통령의 취임식에도 참석했다.

 

역대 최고령·최고학력의 퍼스트 레이디... DJ와 불화 원인은 '온도 차이'

 

1922년생인 이희호씨는 DJ보다 나이가 두 살 더 많다. 대한YWCA 총무이자 이화여대 강사였던 노처녀 이희호는 62년 40세 때 두 아이가 딸린 홀아비 정치인 김대중과 혼인했다. 이씨는 결국 97년 역대 대통령 부인 중에서 최고령(75)에 최고 학력의 퍼스트 레이디가 되었지만, 그 이전까지는 납치, 구금, 망명, 연금으로 점철된 남편과 함께 파란만장한 시련의 삶을 살았다.

 

특히 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남편이 구속되자 이씨는 석방투쟁과 정치활동 그리고 가장으로서의 책무까지 짊어진 3중고에 시달리는 가운데서도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진주교도소에 수감중인 남편이 78년 12월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될 때까지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껌종이 같은 포장지에 꾹꾹 눌러쓴 '하얀 편지'를 주고받은 것은 유명한 일화다. 

 

평생 동지적 삶을 살아왔지만 불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성격 차이'가 아니라 '온도 차이' 때문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체질상 유난히 추위를 못견뎌하는 반면에 이씨는 유난히 더위를 못견뎌한다. 김 전 대통령은 여름에도 냉방을 하면 내복을 입는 반면에 이씨는 겨울에도 내복을 입지 않는다. 그래서 간혹 "제발 덥다는 소리 좀 그만해요"라고 역정을 낸다고 한다.

 

이처럼 추위를 못견디는 남편을 생각해서 한겨울에도 냉방에서 지낸 적이 있다.

 

"남편이 진주교도소에 있을 때는 겨울이라도 안방에 불을 넣지 말도록 일러두었다. 그는 추위를 몹시 타는 체질이다. 그런 '애들 아버지'가 영하로 내려가는 감방에서 떨고 있을 생각을 하면 집에서 따뜻하게 지낼 수가 없었다."(동행, 173쪽)

 

옥바라지와 정치활동을 위해 진주와 서울에서 일주일씩 지내던 77년 12월 어느 날 밤 이씨는 냉방에서 꿇어 엎드려 기도를 하다가 쓰러져 혼절했다. 냉방에서 과로와 영양 부족으로 인한 관절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일요일이면 DJ는 두 아들과 서교성당, 이씨는 혼자 창천교회로

 

이씨는 일요일(2일)에는 여느 때처럼 아침 8시에 혼자서 다니던 신촌 창천교회에 가 예배를 봤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김 전 대통령은 천주교 신자이지만 이씨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다. 평소에도 일요일이면 김 전 대통령은 두 아들과 함께 서교성당으로 가고, 이씨는 혼자서 창천교회를 찾는다.

 

이씨는 이어 오전 면회를 하고, 오후 2시30분에는 박지원 의원, 최경환 비서관과 함께 남편을 면회했다. 저녁 8시에는 세 며느리와 함께 다시 남편을 면회했다. 이씨는 4일 현재 23일째 20층 중환자 대기실에서 숙식을 하며 남편을 간호하고 있다. 며느리들은 교대로 경호원들과 비서관들 식사를 준비해 간다.

 

이씨는 이날 남편이 세 며느리들을 다 알아보는 것에 대해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었던 한 측근은 "대통령께서도 (입원 이후) 지금까지 본 모습 중에서 가장 좋아 보였다"고 전했다.

 

타고난 페미니스트인 김 전 대통령은 어머니와 두 아내를 평생 동안 아끼고 사랑했다. 특히 세 며느리와 세 손녀를 아들보다 사랑한다. 47년 동안 그와 함께 한 이씨의 얘기다. 이씨는 평소에 세 딸을 둔 큰며느리를 '황금메달'감이라며 자랑했다. 이에 비해 세 아들을 둔 시어머니인 자신은 '목메달'감이라는 농담을 하곤 했다.

 

그는 지난 일요일에도 남편과 가족 그리고 이 나라를 위해 기도했다. <동행>의 맨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이에 미루어 그 기도 내용을 짐작할 뿐이다.

 

"길고 험한 고난의 길이었지만 남편과 한 몸이 되어 서로 믿고 의지하며 굳건히 잘 걸어온 날들이었다. 남편의 평생 소원인 한민족의 평화가 빨리 정착되기를 소망한다. 아울러 또한 나의 지극한 염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이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받으면서 그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대한민국이 강자가 약자를 배려하고 보듬어 안아주는 따뜻한 사회가 되기를."(<동행>, 391쪽)


태그:#김대중, #이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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