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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시흥갯골생태공원에서 그린웨이(자전거도로)를 따라 보통천을 거슬러 물왕저수지까지 가던 길에, 우리나라 최초의 농학자인 강희맹 선생이 명나라에서 연꽃씨를 가져와 심은 뒤 널리 퍼트렸다는 관곡지 인근 연성동 억방죽들(연꽃테마파크)을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해가 서쪽 바다로 넘어가기 시작해 오래 머물지 못해 아쉬워, 지난 주말 다시 자전거를 타고 찾아갔습니다. 강태공들로 북적이는 물왕저수지를 휙 돌아 물왕교차로에서 하천변을 따라 내려가다, 하직골방죽들을 가로질러 관곡지로 향하던 길에 아파트 숲에 가려진 강희맹 선생의 묘와 신도비를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진주강씨 문량공 강희맹 선생(1424-1483)은 조선 초기의 뛰어난 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종 29년(1477) 별시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세조 9년(1463) 중추원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성종 13년(1483)에는 의정부에서 일반정사를 처리하는 좌찬성에 이르렀습니다.

 

선생은 문장이 당대 으뜸이고 글-그림에도 뛰어났으며, 박학다식하며 공정한 정치를 편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유교경전과 역사, 중요한 의례에 밝아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 <예조실록> <경국대전> <동문선> <동국여지승람> 등의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습니다. 또한 그가 그린 그림이라 알려진 <독조도(獨釣圖)>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시흥시 시도기념물 강희맹선생묘역 코앞에 고층아파트

 

52세 때 관직에서 물러난 선생은 장인 안승효가 준 약 1만㎡의 땅을 근거로 금양(조선시대 시흥의 옛지명)에 와서 살면서 <금양잡록>이란 농서를 썼다 합니다. <금양잡록> 외 저서에는 <사숙재집> <존담해이> 등이 있습니다.

 

묘는 부인 안씨와의 합장묘이며 봉분 앞에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좌우에 독특한 모습의 문인석이 있습니다. 가파른 묘역 왼쪽 아래는 성종 19년(1488)에 세운 신도비가 있습니다. 서거정이 비문을 짓고 박증영이 글씨를 썼다 합니다. 시흥시 시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강희맹선생묘와 신도비 묘역에는 가족, 후손들의 묘와 한글창제 도움비, 문량공 사우, 연성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비탈진 강희맹 선생 묘역을 둘러보고 택지개발로 잘려나간 산속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목을 축인 뒤, 비를 머금고 쿵쿵거리며 몰려오는 먹구름을 올려다보니 참 못난 정치판을 보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강희맹 선생처럼 땅과 농업의 가치를 알고, 공명정대하게 일하며 공부하는 그런 괜찮은 정치인이나 공직사회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 되묻게 되더군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뉴스와 블로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강희맹, #시흥시, #연꽃, #농학자,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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