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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정부는 메트로 마닐라(Metro Manila)에 위치한 키아포(Quiapo)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쟁 직후 벼룩시장으로 세워졌다. 이곳에서는 대부분 필리핀 전통 수공예품을 취급한다. 싼 가격으로 물품을 구입할 수 있으나 물건을 사기 전 물품 체크를 확실히 하는 것이 좋다"

- 필리핀 여행안내(필리핀 관광청)

 

하지만 마닐라에 뿌리를 내리고 산지 10여 년이 다 되어가는 한인들과, 몇 몇 필리피노 친구들은 내게 이렇게 충고한다.

 

"웬만한 필리핀 사람도 가면 앞뒤좌우 신경쓰며 걸어다닐 정도로 그리 달갑지 않은 곳이야. 무슬림이 많이 살고, 근처에 차이나 타운도 있고. 너한테 가라고 권해주고 싶진 않은데…."

 

그들의 충고는 항상 내게 감사한 진리들이지만, 필리핀 사람들보다 더 까무잡잡한 피부와 중국 사람 비슷한 외모(?)를 가진 나는 별 생각없이 키아포를 두어 번 왔다갔다 했다.

 

필리핀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장소, 키아포

 

키아포를 처음 찾는 이라면 길거리에서 '1)키아포 교회'이나 '2)미란다 광장'을 보고 이 곳이 키아포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화려한 마천루와 쇼핑센터를 자랑하는 마카티(Makati), 하늘을 수놓는 저녁노을과 바다음식이 기다리는 마닐라 만처럼 키아포는 필리핀의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장소이다.

 

 

미란다 광장을 통해 키야포 교회 앞에 처음 발길을 내딛으면 주변에 수많은 점쟁이들을 볼 수 있다. 국민의 80% 이상이 가톨릭을 믿는 국가에서 점쟁이의 존재는 말 그대로 '색다름'이었다. 가끔 마닐라에 사는 필리피노들의 생활공간이라 일컬어지는 대형 쇼핑몰에서도 점쟁이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이들에게 다양한 미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식민지 시대를 통해 다양한 서구의 생활방식을 받아들였지만, 기존에 이들이 지니고 있던 문화가 위와 같은 형태로 필리핀 내에선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들은 100페소(우리나라 돈으로 약 2700원 정도) 정도를 지불하면 당신이 원하는 어떠한 정보든 당신에게 답해준다.

 

환영받지 못하는 무슬림, 그리고 그들의 터전 키아포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유일한 카톨릭 국가이다… 카톨릭 교인은 2000년 현재 81.04%에 달하고 있다. 필리핀 사람들의 종교적 열정은 대단하여, 교황방문시 400만명이 운집했을 정도이다… 그 외의 종교로는 민다나오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5.06%)과 개신교(2.82%)…

- 필리핀 사회복지와 NGO(이영환 저) -

 

필리피노조차 '키아포'라는 이름을 들을 때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유중 하나는 바로 '무슬림'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필리핀 내에서도 자치나 독립 등을 요구하며 '폭탄테러'와 연결되는 이들이 바로 무슬림이고, 일상 생활 내에서도 그들의 생활방식과는 다른 보통의 필리피노들과 융화되지 못하는 탓이다.

 

키아포에는 꽤 많은 무슬림들이 살아가고 있다. 1976년 세워진 이슬람 사원 '골든 모스크(Golden Mosque)'도 다름아닌 키아포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불법 복제물(CD 혹은 DVD)과 이른바 '짝퉁' 상품이 있고, 어딘가 모르게 허름하게 보이는 키아포의 분위기에 무슬림이라는 단어가 더해져서 사람들의 반감은 더 심해진 듯하다.

 

"내가 옷이 예뻐서 사려고 천을 한 번 만져봤거든. 그랬더니 무슬림인 장사꾼이 내게 갑자기 성질을 내면서 당장 이 옷을 사라고 하는 거야. 내가 당황해서 아무 대꾸도 못하고 있으니까 무조건 만지면 사야된다고 하는 통에 멍하니 서있다가 거기를 겨우 빠져나왔다니까."

 

"키아포에 전자제품도 많이 팔거든. 가격이 싸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나본데, 품질이라는게 믿을 게 못돼. 특히 무슬림이 파는 건 하나부터 열까지 꼭 확인해보고 사야 된다니까. 너도 조심해."

 

내가 키아포가 어떤 곳이냐고 물어봤을 때 답하는 필리피노들의 반응이었다. 그들의 말이 무조건 틀리진 않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괴리감은 심한 편이며, 1970년대 후반 마닐라의 중심지 중에 하나로 각광 받던 키아포는 오래된 거리 중 하나로 인식되며, 어둡고 음산한 거리로 점점 바뀌어가고 있다.

 

내가 만난 한 무슬림 상인

 

키아포를 걷다보면 삼파귀타(Sampaguita, 필리핀 국화로 말리꽃과 생김새가 비슷하다)로 목걸이를 만들어 팔러다니는 거리의 아이들, 각종 약초를 파는 손수레 장사꾼들이 내 옆으로 무수히 지나간다. 키아포 교회 탓인지 묵주나 성모마리아상을 파는 이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고, 색색의 초에 소망이 적힌 의미를 읊으며 촛불을 키워 파는 노파도 방문하는 이와 함께 있다.

 

어지러운 듯 보이는 시장은 흡사 우리의 재래시장 같은 풍경을 펼치되, 어딘지 모르게 사람들의 눈매가 날카로운 것 같고, 위험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인지 경계하게 되는 내 모습이 나중엔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사람들이 운집한 곳을 지나서 한 수공예품을 파는 상점에 방문했다. 그는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물어본 뒤, 뜬금없이 자신은 무슬림이라 답했다. 무슬림이라 밝혀봐야 좋을 것이 없을 터인데, 이곳에서 융화되지 못하는 이방인이 또다른 이방인을 맞는 방식인냥 그는 넉살좋게 내게 운을 뗐다.

 

큰바위 얼굴을 한 독특한 사람이 창을 들고 있는 나무 조각상, 마음에 들어 얼마냐고 상인에게 물었다.

 

"120페소(한국돈으로 약 3500원 정도)."

"장난하냐, 너무 비싸다. 60페소에 하자."

"안돼. 10페소 빼줄게."

"에이. 나 영어는 잘 못해도 여기 산 지 좀 됐어. 그러지 말고 최종가격 말해봐."

"100페소. 더는 안돼."

"그래 여기 90페소. 10페소 빼주는거지?"

 

이래저래 흥정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는 나 같은 한국사람은 처음 봤다면서 너털웃음을 지으며 90페소를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면서 다른 곳에 가서 산 것 보다 세 배는 싸게 샀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내가 그럴리 있냐고 반문했지만, 그는 난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이라며 믿으라 말했다(실제로 대형 쇼핑몰 기념품 판매장에서는 270페소 정도에 그 나무조각을 팔고 있었다).

 

허름한 집엔 다양한 수공예품들이 있었다. 카메라를 보며 반가워하는 그의 모습, 사진 한 장 찍자며 농을 건네지만 그러면 뭐하랴. 내 카메라의 배터리가 이미 다 된 것을 어떡하랴. 다음에 돈 많이 들고 와서 이것저것 사갈 거라고 너스레를 떨며 그 가게를 빠져나왔다.

 

신문지에 둘둘 싸준 나무조각을 바라보며,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은데…'라는 생각만이 머리를 계속 때렸다.

 

 

내가 사는 퀘존에서 키아포까지 가는 길은 험난하다. 택시 한 번을 타고 왔다갔다 하더라도 지긋지긋한 교통체증 덕택에 왕복 2시간을 생각해야 하고, 지프니를 타던, 버스를 타던, 지상철(LRT, Light Rail Transit)을 타던 만만치 않은 결심(?)을 하고 집에서 나서야 한다. 그래도 난 다시 키아포를 찾는다.

 

싼 가격에 독특한 수공예품을 하나 건질 생각을 하기도 하고, 필리피노가 보지 못하는 모습을 이방인인 내가 보는 재미에 가기도 하고, 필리핀의 규정되지 않는 정체성을 제멋대로 그리며 다니기도 한다.

 

그 재미가 제법 쏠쏠하기에 앞으로도 몇 번은 키아포에 발길을 내딛을 것이다.

 

1) 키아포 교회 : 1582년 스페인 인들이 세운 키아포 교회, 1933년 불에의해 파괴된 구조물을 복원했다. 이 교회은 특히 '검은 예수상(Black Nazarene)'으로 유명하다. 검은 예수상은 1606년 멕시코에서 가져온 것으로 사람들의 병을 치유하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믿음이 퍼져 많은 이들이 기도 후 교회 안에 위치한 상을 한 번씩 만지기에 여념이 없다. 매년 1월 9일, 검은 예수상을 기리는 행렬에는 많은 이들이 참가하고 있으며 2006년에는 10여 명의 사상자가 나기도 했다.

2) 미란다 광장 : 키야포 교회 앞에 위치한 광장, 정치적 집회나 모임에 가장 대중적인 장소 중 하나로서 미인대회나 여러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1971년 마르코스 계엄령 당시 파괴된 광장은 이후 로마식 광장으로 재탄생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casto와 푸타파타의 세상바라보기(http://blog.daum.net/casto)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키아포, #키아포 교회, #메트로 마닐라, #무슬림,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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