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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들에게 '일기쓰기'란 무엇일까 

 

일기쓰기, 아이들 스스로 마음을 들여다 보고 하루를 되짚어보는 본디 영역에서 멀찌감치 벗어나 글쓰기 공부를 위한 교재로 화려하게 모습을 바꿨다. 여름방학을 맞아 서울시내 00초등학교에서 나눠준 [일기는 이렇게]라는 알림글에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쓸 수 있는 비법을 요모조모 일러준다.

 

요일마다 그림일기 편지일기 시사일기 영어일기 독서일기 환경일기 역사일기란 주제를 정하고, 쓰는 방법을 예시를 통해서 알려준다.

 

목요일, 영어일기 쓰는 법..."영어단어를 섞어쓰자"며"Today는 기분이 매우 Happy한 날이다"는 문장을 예로 들고 있다. 

 

아직은 한글단어에 담긴 뜻을 제대로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배우는 아이들이다. 낯선 영어단어로 하루 겪은 일들을 적확하고 여물게 짚어낼 지 걱정이다.

 

아이들의 솔직한 감정과 생각이 들어갈 자리는 더욱, 좁아보인다.

                      

"Today는 ...Happy한 날이다." 아이들 몸에 녹아들지 않고, 입에 달라붙지 않는 외국어 단어로 솔직한 자기마음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까. 가뜩이나 어렵고 흐리터분한 말이 판치는 세상이다. 깨끗하고 솔직해야 할 아이들 말조차 영어로 빼앗는다면, 아이들 오롯한 마음을 담아야 할 일기는 제 몫을 다할 수 없을 것이다.

 

요일별로 권장하는 일기쓰기 가운데 하나인 '독서일기'도 아이들에게는 짐이다. 서울시내 초등학교에서는 해마다 서울시교육청에서 나온 "책을 읽자! 미래를 열자!"란 독서학습록으로, 일주일에 세 편씩 독후감을 따로 쓰도록 하고 있다. 이러니 일기나 독서학습록 가운데 하나는 군더더기가 될 판이다.

 

환경오염에 관한 내용이나 환경에 관해 조사한 자료를 적어보는 '환경일기', 역사적 사건이나 역사적 인물에 대해 쓰는 '역사일기', 보고싶은 사람에게 편지를 써보는 '편지일기'... 하루에 일어난 마음을 담기보다는 인터넷에서 베끼거나 부모 도움을 받아 풀어야 할 숙제에 가깝다. 

 

아무리 학원으로만 맴돌고 공부에 매여 지내는 것이 요즈음 아이들의 하루라지만, 일기장에 넘쳐나야 할 아이들 꿈은 고사하고 소박하고 솔직한 감정조차 비집고 들어갈 곳이 마땅치 않으니...이거야 원, 어른들이 대신 써주는 일기장이란 티를 감출 수 없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빼앗아온 일기장, 이제는 돌려주자  

 

"일기 다썼어?" "어디봐?"... 검열을 멈추어야한다. 아이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자. 아이들도 어른과 다르지 않다. 내 생활 함부로 뒤적거리면 기분 나쁘기는 마찬가지. 일기검사, 어려서부터 아이들에게 차곡차곡 자기검열을 내면화시키는 일을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쓸데없는 노파심이면 좋으련만.

 

"너 이게 뭐야?" "나는~ 나는..똑같은 말을 몇번이냐 썼냐고?"... 문법을 따지지 말자. 아이들 마음을 살피는 일은 뒷전. 빨간펜 선생님처럼 이곳저곳 따지는 잔소리에 아이들은 일기쓰기가 고통이다. 일기라는 '글'은 아이들이 두서없이 감정을 고백하는 '말'처럼 받아줘야한다.

 

"야, 반 장은 채워야지! 달랑 석 줄이 뭐야?"... 분량에 목매지 말자. 할 말이 없을 때도 있다. 가끔가다 멍할 때도 있고 이것저것 백지장같이 생각나지 않는 하루도 있지 않는가. 분량에 매이다 보면 자신은 한 켠에 제켜놓고 남을 베끼고 따라하는 법이다. 제발~ 모른 척 넘어가주면 안돼?

 

"욕 써도 돼! 선생님한테 기분 나쁜 거 있으면 써!"... 솔직한 느낌 그대로! 보이기 위한 일기, 숙제를 위한 일기에서 벗어나면, 아이들은 자신의 내면과 마주보고 나눈 이야기를 일기장에 와르르 쏟아붓지 않겠는가. 자라는 데 피가 되고 살이 될 영양가 만점의 이야기를.

 

자신을 헤아리고 아픔을 다독이다 보면 몸도 마음도 커가고 어느새 글솜씨도 늘어나는 것이 일기이지, 글솜씨를 키우기 위해 억지로 일기를 쓸 일은 아니다.

 

어른들 '일기쓰기' 억지춘향이 노릇에 상처받고 힘들어 하는 이, 누구일까 톺아볼 때다.  


태그:#일기쓰기, #초등학생 숙제,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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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숲 그리고 조경일을 배웁니다. 1인가구 외로움 청소업체 '편지'를 준비 중이고요. 한 사람 삶을 기록하는 일과 청소노동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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