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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MBC 간판 예능프로그램인 <무한도전>에서 방송한 <올림픽대로 듀엣가요제>라는 앨범이 녹음을 거쳐 정식으로 발매되면서 대중음악 시장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몇 년간 치밀한 기획 속에서 제작된 음반이 아닌, 프로그램 기획상 꽤 짧은 시일안에 즉흥적으로 만들어졌음에도 음반 판매량만 벌써 3만여 장을 상회하고 있으며, 특히 온라인 음원매출 부문에서는 1위부터 10위까지 이 음반에 실린 곡들이 거의 독식하다시피 하고 있다.

 

이러한 특이점은, 참여한 뮤지션 면면을 보더라도 상당히 화려하게 구성되어 저작권 등록 후 음원이 판매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과거 단순하게 짧은 감각으로써 이슈가 되었던 음원들의 인기몰이 케이스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렇다면 미증유의 이 특이한 음악적 성공 성황을 우리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언젠가부터 말했지만 작금의 우리나라 대중음악계는 그 지긋지긋한 MP3로 인해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5만 장 이상 음반을 팔기엔 무리였던 문화 빈민국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대중음악은 과연 '음악' 그 자체로 존재하는가?

 

 

그러나 알다시피 사실 기계적 진보는 현재의 한국 대중음악계의 침체만을 야기한 불가항력적인 시련으로서 존재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온라인 음원시장이라는 또 다른 보편적 시장이 생성되었고, 메이저뿐 아니라 인디씬이나 팝. 혹은 기술적인 발전으로 인한 수용자들의 다양한 청취의 기회와 넓은 스펙트럼의 구성은, 과거 대중들이 가지는 음악의 회의적 관심보다는 자발적 관심으로 결합되어 집단들 사이에서 전이되고 있다. 결국 '대중성'이라는 개념은 다양화된 시장 아래에서 '개인의 취향'의 개념으로 변화하기 시작하며, 주관적인 기준의 측면에서 그 대중성은 각자 재단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소위 말하는 대중친화적인 음악들은 다양하게 분절됨으로 그 형태를 잊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결국 대중음악에 있어서 대중성과 아울러 가장 보편적인 본질의 하나인 그 '산업성'의 고민을 어떠한 방식으로 풀어나가느냐 하는 일종의 방법론의 문제로도 귀결되는데, 그것의 좋은 예가 바로 오늘 얘기할 <무한도전>의 <올림픽대로 듀엣가요제>다. 다시 말해 현재의 대중음악은, 음악 그 자체로 대중들에게 평가 받지 않는 시대다. 넓어진 음악산업과 분절된 대중성은 더 이상 CD 한 장으로서 대중들에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 이것은 눈으로 들었다던 MTV 시절과는 또 다른 진화적 형태의 변화다.

 

따라서 음악의 성공은 귓속에서 각인되는 유려한 멜로디 라인과 수반되는 화려한 코드진행, 세션들의 놀라운 연주 실력에 감탄하는 애호가들의 내적인 음악 대신, 수용자들의 감각적인 각인을 유도하는 획기적인 산업가들의 외적인 음악이 득세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즉 음악은 대중들에게 더 이상 음악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그 산업성의 시류를 읽는 것이 성공의 가장 중요한 화두가 돼버린 것이다.

 

매체와의 결합, 그 생각지 못한 파급력

 

 

물론 그러한 산업성에 대한 이해를 음반관계자들이나 뮤지션들이 모를 리 없다. 사실 그들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다만 문제는, 그 이해가 정체되지 아니하고 음악시장 환경과 같은 변화나, 창조와 수용 매체의 진보 혹은 퇴보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한다는 것이다. 과거 유명 영화배우를 끌어들이고 해외 올 로케를 감행하여 그것을 마케팅 형식으로 이끌던 대작 뮤직비디오의 제작 방식은 이미 올드패션으로 취급받는 시대가 바로 지금이 아니던가. 결국 이러한 측면에서 현재의 <올림픽대로 듀엣가요제>와 같은 일종의 프로젝트를  단순히 일회성의 성공적 이벤트로 그저 목도할 문제는 아니다.

 

그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지겹지만 결국 미디어다. 특히 TV가 가지는 그 놀라운 파급력과 대중을 하나로 묶어내는 통합성은, '바보상자'라 불리는 그 자신의 악명을 드높이는 데 현대에도 전혀 무리가 없음을 증명한다. 아니, 외려 인터넷과 같은 또 다른 뉴미디어와 결합해 자신의 몸집과 크기를 불리고 있다.

 

이것은 TV 매체를 비판하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이제는 모두가 능동적이고 영리한 참여적 수용자가 되어, 고정된 대중성은 사라지고 분절된 대중성만이 남은 그들을 단시간에 끌어들이는 그 엄청난 흡입력에 감탄하여 하는 이야기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음악은 이제 TV, 그 중에서도 대중적인 보편성을 가지는 프로그램들과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음악 산업성의 성공 시류가 변화되고 있음이 포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예능프로그램을 통한 신인들의 얼굴 알리기나 음악 프로그램에서 가수들의 노래들과 퍼포먼스의 큰 의미 없는 나열, 혹은 마니아를 위한 품격 높은 라이브 프로그램과도 확연히 구분되는 분명한 새로운 산업적 시류다. 아울러 이러한 '대중적 보편성'과 같은 기본적인 가치는, 개인적인 주관적 가치들이 난립할 때 더욱 크게 발현된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올림픽대로 듀엣가요제>의 성공 이유는 꽤 명백해 진다. 그들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던 이 갈라진 틈을 제대로 찔렀던 것이다.

 

아울러 분명 어느 정도의 요행수가 존재했다고 해도 그것을 완성시키기 위한 전제조건은 분명히 필요하다. 첫 번째는 말할 것도 없이 일정 수준이 유지되는 음악성이고 또 하나는 그 프로그램이 가지는 완성된 참여층,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다른 미디어가 수용자들에게 전해주는 재생산의 화제성이다. 이 세 가지는 사실 그 조건으로서도 상당히 까다롭기에, 이제 이 감지된 시류를 통해 어떠한 방법으로 또 다시 이 성황을 재현시킬 것인가는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난제로 남지만, 반대로 <올림픽대로 듀엣가요제>는 음악과 매체의 성공적인 결합사례로서 꽤나 오랫동안 회자될 것이다. 

 

그러나 변치않을 음악의 본질적 가치

 

 

이처럼 시대는 변화했다. 이제 음악을 노래하는 것보다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중요해졌으며, 그 전달과정에 따라 수용자의 취향마저도 몰입시킬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간편함과 즐거움을 따르는 대중들을 비난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적 시류의 한 단면이라면 고개 돌려 부정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산업성의 변화이지, 음악 본질의 변화는 결코 아니란 점을 전제하자. <무한도전>을 통해 느꼈던 음악적 즐거움을 클럽이나 공연장, 혹은 <무한도전>의 7명의 출연진이 제외된 각각의 뮤지션들의 개별적인 음반의 구입과 장르의 관심까지 이어질 여지는 적지만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결국 음악이 가지는 본질적인 가치는 시대를 초월하여 동일하다는 대전제 덕분이다.

 

물론 그 대전제를 일반화하기엔 너무나 이상적인 변명이 뒤따라야 하기에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점도 잊지 않지만, 그 변명의 힘이라도 나는 그 가치를 아직도 조금 믿고 싶다. 이유는 모르지만, 담배를 막 피웠을 때 느껴지는 혀 뒷쪽의 약간 씁쓸한 기운을 억지로 삼키면서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http://kells.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무한도전, #대중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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