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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지만 행복하다는 가정. 가족들의 표정도 밝았다
 가난하지만 행복하다는 가정. 가족들의 표정도 밝았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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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열 명이나 되네요, 가족들이 모두 모인 겁니까?"
"아니오, 아이들 둘과 남편이 빠졌어요, 모두 13명이에요"

보홀 섬에서 안경원숭이와 로복강 구경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날 아침 호텔 근처 마을을 찾았다. 막탄 섬 주민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처 마을 풍경은 숲속 마을과 바닷가 마을이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호텔 문을 나서 잠깐 걷자 길가 숲을 배경으로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은 너저분한 가운데 빈터를 중심으로 나무와 판자로 얼기설기 지어진 집들이 빙 둘러 이어져 있었다. 그 마을 한 집에 들어서니 어설픈 마루에 10여 명의 사람들이 낯선 이방인을 빙긋 웃는 미소로 맞아준다.

필리핀 사람들은 모두 영어를 잘한다고요?

그들 중에서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안고 있는 아기가 참 귀여운 얼굴이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예쁘다고 하자 가족들이 모두 활짝 웃는다. 내가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라고 말하자 "꼬레아?"하고 받아 줄뿐 말을 이해하는 표정이 아니다.

그래도 필리핀인들은 대부분 영어를 잘 한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툰 영어로 가족이 몇이나 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들이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침 그때 여행사 현지 가이드가 나타났다. 근처를 지나다가 내가 현지 주민들과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하고 들어온 것이다.

빈터를 중심으로 빙 둘러 이어져 있는 가난한 마을 풍경
 빈터를 중심으로 빙 둘러 이어져 있는 가난한 마을 풍경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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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마을 건축 공사장 풍경
 바닷가 마을 건축 공사장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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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내가 묻고 싶은 말을 통역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가이드도 영어만 잘 할뿐 현지어는 할 줄 몰라서 말이 통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말이 통하지 않아 어쭙잖은 손짓 발짓이 벌어지고 있을 때 오토바이를 몰고 외국 관광객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현지인 청년 하나가 나타났다. 다행이 그는 영어를 매우 잘했다.

그 청년을 통해 가난한 마을 사람들과 대화가 이루어졌다. 아주머니의 가족은 13명이라고 했다. 시부모와 아주머니 부부. 그리고 자녀들이 9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남편과 아주머니는 일정한 직업이 없었다. 근처 숲에서 기르는 염소 두 마리와 닭 몇 마리가 있을 뿐 농사지을 땅도 없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어디 갔느냐고 물으니 길 건너 건축공사장을 손으로 가리킨다. 요즘 며칠째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공사장 일이 그리 많지 않아서 한 달에 겨우 며칠 씩 밖에 일이 없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한 수준이라고 했다. 아이들도 숫자가 적은 집이 7~8명, 많은 집엔 13명이나 되는 가정도 있다는 것이었다. 필리핀 사람들은 모두 영어를 잘 하는 줄 알았다고 하자 오토바이 청년이 아니라고 한다.

아이를 많이 낳는 필리핀 가정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

영어를 잘 하는 사람들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고 이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처럼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영어를 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 집에선 아이가 9명이나 되지만 거의 학교에 보내지 못하기 때문에 모두 영어를 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빈터에서 염소와 고양이가 함께 어울린 숲속의 어느 가옥 풍경
 빈터에서 염소와 고양이가 함께 어울린 숲속의 어느 가옥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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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나이 44세라는 아주머니에게 아이들이 아홉 명이나 되어서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아주머니의 대답은 전혀 달랐다. 아주머니는 아이들이 많아서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사는 것은 가난해도 아이들이 많아서 행복하다는 것이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대책 없이 아이들을 너무 많이 낳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육도 시키지 못하고, 그러니 더욱 가난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아주머니의 말을 통역해준 오토바이 청년이 심각한 표정으로 하는 말이었다. 오토바이 청년은 자신이 세부에 있는 대학을 나왔다고 소개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필리핀은 14세 미만의 인구가 전체인구의 50%라고 했다. 그리고 전체인구의 평균연령이 19세라고 한다. 출산율이 높아 아이들은 많은데 반대로 고령인구가 적고 평균수명도 그만큼 짧다는 것이었다. 아이들과 청년층이 많으니 교육과 일자리만 만들어내면 희망은 있는 나라라고 자평한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 암담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들과 이야기를 끝낸 다음 가이드와 헤어져 마을을 잠깐 둘러보았다. 마을 뒤쪽엔 숲속에 작은 집 한 채가 서있었다. 처마 밑에 낡은 옷가지 빨래 몇 개가 널려있는 이 집도 허술하고 가난한 모습은 마찬가지였다. 공터에는 풀을 뜯고 있는 염소 옆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낯선 이방인을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바닷가 마을의 어느 부유층 가옥
 바닷가 마을의 어느 부유층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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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닭인 수탉 두 마리와 암탉
 싸움닭인 수탉 두 마리와 암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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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는 맞은편 바닷가에 있는 몇 집은 아주 부유한 모습이었다. 도로변에 높은 담장이 있는 한 집은 크고 높은 대문을 굳게 닫아걸고 보안시설까지 갖춰져 있어 들어가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옆에 있는 집은 마침 대문이 열려 있어서 대문을 지나 정원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정원에는 몇 마리의 닭이 강아지처럼 기다란 줄에 발목이 묶여 있는 것이 아닌가. 신기한 모습에 잠깐 그 닭들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있을 때였다. 안쪽에서 고운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돌아다보니 정말 귀엽게 생긴 꼬마 아가씨다. 5~6세쯤이나 될까?

갑자기 나타난 꼬마의 모습에 어리둥절 바라보고 있자 꼬마가 다시 한 번 묻는다. "Why here?" 아주 유창한 영어발음이었다. 꼬마 아가씨가 불청객인 내게 왜 왔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었다. 깜찍하고 귀여운 모습이었다. 닭과 집을 가리키며 구경 왔다고 대답하자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그때 안쪽에서 노동자 차림의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그러자 꼬마 아가씨는 내 얼굴을 한 번 빤히 쳐다보곤 빙긋 미소를 지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남자는 내게 대뜸 닭싸움에 관심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의 영어는 꼬마아가씨에 비해 서툴고 투박했다. 정원 나무 그늘엔 몇 마리의 암탉과 두 마리의 수탉이 묶여 있었다.

먹음직스럽게 탐스러운 애플망고
 먹음직스럽게 탐스러운 애플망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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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질문에 내가 잠시 멈칫거리자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닭싸움을 구경하라며 당장 닭싸움을 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어렸을 때 몇 번인가 보았던 닭싸움 장면이 생각났다. 서로 쪼고 할퀴어 피투성이가 되었던 수탉들의 싸움, 내가 두 손을 저으며 강력하게 싫다고 사양하자 그는 매우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섰다.

끔찍한 피투성이 닭싸움을 당장 구경하라는 중년 남자

그에게 이집 주인이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한다. 조금 전에 나타났던 아이의 아버지가 집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집주인은 세부시내에서 사업을 하는 부자라는 것이었다. 자신은 이곳 집과 정원, 그리고 닭을 관리해주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택이며 정원, 그리고 바닷가에 만들어 놓은 선착장까지 갖춘 대단한 휴양지 별장 겸 저택이었다. 잔디가 곱게 다듬어진 정원 한쪽에 서있는 망고나무에는 탐스럽게 익은 애플망고(레드망고)들이 주렁주렁 먹음직스러운 모습이었다.

좁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는 숲속의 가난한 마을 사람들과 바닷가 부자들이 사는 모습은 너무나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관광일정을 시작할 시간이 가까워 곧 호텔로 돌아가 일행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다음 일정에 올랐다.

5명의 자녀를 둔 32세 청년 론리
 5명의 자녀를 둔 32세 청년 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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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는 첫날부터 건장한 현지인 청년 한 사람이 도우미로 동행하고 있었다. 청년은 올해 32세로 '론리'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에게 결혼했느냐고 물으니 결혼했을 뿐만 아니라 아이가 다섯이라고 한다. 나이 32세에 자녀가 다섯이라니 놀라웠다.

필리핀 사람들의 출산율이 높은 이유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가까운 친척 중엔 아이가 15명이나 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아이들이 많으면 생활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무엇보다 아이들 교육이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필리핀 사람들은 83%가 가톨릭교도이기 때문에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임신중절이나 피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집집마다 아이들이 많고 가난한 집에서는 자녀교육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버스가 지나는 길가 마을의 공터나 안길, 빤히 들여다보이는 가정의 방마다 아이들이 많았다. 시골에서 아이들 만나기가 매우 어려운 우리나라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고, 조금은 부러운 풍경이었다.

저녁 무렵 호텔로 돌아오는 도로변 어느 마을 공터에서는 청년들이 웃통을 벗어부치고 2인조 배구가 한창이었다. 주변에 둘러앉아서 응원을 하거나 구경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1970년대 우리 농촌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잠깐 둘러본 시장풍경도 그 시절 우리네 농촌 시장풍경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퀴퀴하고 비릿한 시장 특유의 냄새와 왁자지껄한 소음도 비슷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생선과 닭고기. 그리고 과일이 풍성한 반면에 야채가 매우 적은 것이었다.

2인조 배구경기가 한창인 마을 빈터
 2인조 배구경기가 한창인 마을 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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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 시장풍경
 초저녁 시장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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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간단했다. 필리핀 사람들이 구운 닭고기와 육류, 그리고 생선을 즐겨먹는 대신 야채는 별로 많이 먹지 않기 때문이었다. 연중 평균 기온이 너무 높아 야채재배가 어려운 지역 특성상 야채가 귀해 전통적으로 야채를 즐겨 먹지 않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

"필리핀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짧은 것은 야채섭취량이 너무 적어서 그렇다는 분석도 있다고 합니다."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실제로 필리핀을 여행하는 동안 먹어본 다양한 음식들도 대부분 야채가 귀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음식상에 과일들이 푸짐한 것도 아니어서 가이드의 말을 뒷받침 해주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출산율, #아이들, #가난한 마을, #부자 마을,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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