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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에 중독된 세상 한가운데 느림보 마을이 탄생하다
 

"씨앗이 자라는 속도를 넘어선 곳에는 공포만이 자랄 뿐 안심은 없다."

 

<슬로 라이프>의 저자, 쓰지 신이치는 인간이 지향해야 할 삶의 속도를 이렇게 표현한다. 초고속 인터넷에 중독된 이 시대에, 실시간 인기검색어가 주가처럼 올라가고 수없이 휴대 전화로 문자 보내기에 길들여진 이 세상에, 씨앗이 자라는 속도만큼, 농부가 씨앗을 뿌리며 걸어가는 속도만큼 살자고 외치는 한 시인이 있다. 최근 <느림보 마음>이라는 첫 산문집을 낸 문태준 시인이다.

 

'이 세상이 너무 신속합니다. 쉴 겨를과, 나란히 가는 옆과, 늦게 뒤따라온 뒤를 살려냈으면 합니다. 나의 것을 다른 데로 돌릴 줄 알았으면 합니다. 차마 다하지 못하는 말은 남겨두었으면 합니다. 세상의 마음이 한없이 가난해지지 않도록. 세상의 마음이 궁벽한 곳에 살지 않도록.'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국내 굵직한 문학상을 휩쓴 그는, 한국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시인으로 손꼽힌다. 그의 책, <느림보 마음>의 내용은 느림과, 너무 빨라서 차마 사람들이 못 본 것들의 풍경과 소달구지처럼 느릿느릿하고 정겨운 시골풍경들로 가득하다.

"영화 워낭 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았던 이유는 바로 주인인 노인의 시선이 소처럼 느렸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그렸기 때문에 감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노인의 시선과 같은 한없는 낮음과 느림을 마음 속으로 동경하고 있습니다."

 

소설가 김훈이 극찬한 느림의 아름다운 문장

 

느림의 풍경과 미학을 그토록 동경하고 갈망하면서도 느리게 갈 수 없는 것이 지금 현대인들의 실상이다. 불행이다. 성난 코뿔소처럼 모두가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들 머리를 들이밀고 가쁜 숨을 쉭쉭 몰아쉬고 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모든 언론이, 보도

뉴스가 달려가고 있고 우리는 그 대열에 끼어 있다. 조금만 느리게 가면 뒤에서 달려오는 코뿔소 대열의 발에 짓밟히고 만다. 어떻게 해야 이 떠밀림의 속도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시인 문태준은 마음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현대는 마음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모든 일에 너무 앞서서 가다 보니 자신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대로 안 되고, 마음에 안 맞고, 허전해서 더 빠른 것을 찾고 몸으로 말하고 몸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옛날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가끔씩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았다고 한다. 혹여 너무 빨리 달려서 자신의 영혼이 뒤따라오지 못할까봐서란다. 그처럼 자신이 달려온 뒤를 살피고 살려내는 마음이 필요하다.

 

살아오면서 내가 사랑했던 시간은 누군가의 말을 가만히 들을 때였습니다. 뒤로 물러설 때였습니다. 나도 작은 자연이 되어 자연의 속도로 천천히 걸어갈 때였습니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처럼 혼자 오도카니 앉아 있는 때였습니다. 잘못 살았다고 엎드려 눈물을 삼킬 때였습니다. 내가 나를 거울로 들여다볼 때였습니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노라고 용서를

빌 때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 세계가 한층 맑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뒤를 살려낸다는 것은 결국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살아온 나의 하루를 돌아보는 것, 들여다보는 것. 그는 그 시간을 일부러 만든다고 한다. 식구들이 잠든 새벽, 그는 깨어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내가 오늘 너무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는가, 목소리 높여 내 주장만 내세우지는 않았는가, 하는 마음의 반성을 한다.


그것은 시인 문태준만의 일이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자기를 들여다보는 시간, 묵상하는 시간을 하루에 10분씩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늦게 가는 방법 중 하나다. 늦게 간다는 것은 느리게 산다는 것이다. 또한 볼 것을 제대로 보고 만나며, 인간답게 사는 것이

다. 그의 첫 산문 <느림보 마음>은 느려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만난 이야기다. 속도의 시대에 비껴선 자리에서 그가 그려내는 풍경화는 마치 고요한 깨달음의 경구를 만나는 기분이다.

 

미문과 명문으로 잘 알려진 소설가 김훈은 그의 산문을 읽고 이렇게 말했다.

"느림을 말할 때 문태준의 문장은 너무도 아름답고 강력하다. 치열하고 평화롭다."

 

또한 김훈은 문태준의 글을 다음과 같이 생김새에 비교한다.

"문태준의 얼굴은 그가 태어나고 자라난, 경북 내륙 산간농촌의 인문지리적 조건과 지연지리적 환경의 산물이다. 이처럼 하나의 완연한 풍경을 완성하는 얼굴은 흔치 않다. 문태준의 글은 자연이나 인간세를 향하여 무리한 힘을 가하지 않는다."


문태준의 글은 주장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좋다. 평화롭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불교적인 관념과 사물에 대한 간절한 관찰과 오랜 사유가 문태준만의 오롯한 문장과 만나 독특한 서정을 완성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글은 읽는 맛이 있다.

 

느림보 시인의 마음그늘에 쉬어가다

 

 

시인 문태준은 농부의 아들이다. 경상북도 김천 시골마을에 장남으로 태어나 농사를 짓는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농민의 아들답게 시골의 풍경을 글로 많이 묘사한다.

 

폭염 속에서 옥수수대가 근엄한 장수처럼 굵어지고 있습니다. 폭염 속에서 풀들이 허공의 계단을 한 뼘씩 올라서고 있습니다. 나 스스로에 의지해서 마음이 퇴전하지 아니하고 어지러워지지 아니하고 깨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여름 햇살이 우리에게 소원하는 삶의 내용입니다. 그것이 풍성한 가을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이 여름을 멋지게 지내는 최고의 피서법입니다.
 
여름에는 햇살이 노동을 합니다. 여름 하늘에서 내려오는 몇 평의 햇살을 보세요. 풀들을 자라게 하고, 무더위를 더욱 무더위로 나아가게 합니다. 견고함을 더욱 견고하게 합니다. 불굴을 불굴이게 합니다. 햇살의 질주, 햇살의 포옹, 햇살의 근면이 여름입니다. 건강한 자연과 여름을 그려냄과 동시에 그가 표현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이야기는 슬프다 못해 눈물이 난다.

 

어렸을 적 나는 놀다가 눈에 검불이 자주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내 어머니는 바가지 물로 입을 헹구시고 당신의 가장 부드러운 살인 혀로 내 눈을 핥아주셨습니다. 찬비가 겨처럼 우수수 지던 겨울밤 쇠죽이 끓는 정지에서 게으른 아들의 종아리를 매질하던 모진 어머니의 모습도 남아 있습니다.


이제 어머니는 이 빠진 그릇처럼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보면 한 채의 앉은뱅이집을 보는 것 같습니다. 아귀 같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벼락도 맞고 늦눈보라도 맞아 이제 어머니는 별로 성성한 곳이 없습니다. 어머니의 품은 갈대의 품처럼 거칠고 삭막하기 그지없습니다. 다리는 사슴보다 야위었고, 살갗은 옻처럼 검어졌습니다. 어머니는 어느새 조백했습니다. 한 꿰미의 북어를 사 들고 기뻐 돌아오던 어머니의 환한 미소는 어디로 갔을까요. 감꽃 져내리던 날, 텅 빈 마루에 홀로 넋을 놓고 계시던 내 어머니의 젊은 시절도 떠나보낼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듯 시인의 어머니도 온몸으로 인생을 사셨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제 시인의 마음속에 앉은뱅이집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그가 자랐던 시골은 가난했지만 그래도 여유가 있었다. '시원하고 푸른 우물물 한 바가지 같은 휴식'이 있었고 '느리게 하늘을 걸어가는 구름'과 정지한 듯 겨울 하늘로 올라가는 굴뚝 연기가 있었다.


그렇게 조금 한갓지고 여유 있는 세상을 그는 만들어 보고 싶어 한다. 동물들은 먹잇감을 사냥하거나 사냥을 당할 때만 쏜살같이 달린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사냥하고 있는 것인가, 혹은 사냥당하고 있는 중인가. 이 쏜살같은 달려감을 멈추고 살아가자는 그의 <느림보 마음>은 '통통한 봄비'를 맞으며 느리게 걷는 이야기다. 그가 들려주는 '느림'의 사색은 평화롭고 고요하다. 서두르지 않고, 화려한 기교도 없이 느릿느릿 단아한 그의 문장은 속도의 시대에 놓여 있는 우리에게 잠시 쉬어가는 그늘처럼 소중한 존재다.


한 발짝 비켜서는 법, 입에 향기로운 말을 담는 법, 느릿느릿 걸어가는 법 등 그가 느릿한 언어로 그려낸 풍경들은 고혹적이다. 그의 글은 조미료와 향신료를 듬뿍 뿌린 듯 강하고 달콤한 요즘 문단에서 은근한 사람냄새, 자연 냄새를 풍겨 각별하다. 모두가 이름을 알리려 하고 보석방의 보석처럼 치장하고 반짝거리고 드러내려 하는 요즈음, 그는 자꾸 숨기려 하고 감추려 하고 스스로를 낮춘다. 문태준의 말투와 언어와 표정과 마음을 들여다보면 조선조 말기 쇠락해가는 불교의 중흥을 일으킨 경허 선사의 시가 생각난다.
 
識淺名高世危亂 안다는 것은 얕은 소견. 이름만 높아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구나.
不知何處可藏身 모를 일이여, 어느 곳에 가히 몸을 감출꼬.
漁村酒肆豈無處 어촌이나 술좌석이 어찌 처소가 없으리요만은,
但恐匿名名益新 이름을 감출수록 이름이 더욱 날까 그를 두려워하노라.

 

문태준 시인의 '깊은 강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를 읽어 보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시 '유명해진다함은'을 인용한 글이 나온다.

 

헛된 명망없이 살아야 하느니
미래의 부름에 귀 기울이고
우주 공간의 사랑과 하나가 되기 위해, 끝내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하찮은 것이라도 외면하지 마라.

 

그러나 문태준의 글은 이미 유명해졌다. '우리의 서정시를 위무의 성소(聖所)로 이끄는 언어의 축복'이라는 찬사와 함께 시인들이 뽑은 가장 좋은 시인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꾸 가리려 한다. 부끄러워한다. 뒤로 물러나려고 한다. 고개를 숙이려 한다. 그래서 그만이 보는 것이 있다. 그려내는 풍경이 있다. 그것이 바로 '느림보 마음'이다.

 



* 가끔 상점과도 같은 나의 마음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를 생각하곤 합니다. 나는 되도록 한구석을 비워 둡니다. 다 채우지 않습니다. 덜 채운 그 공간을 '적적한 곳'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적적해서 때로는 눈물을 혼자 흘리기도 합니다. 적적해서 어느 때는 멍하니 일없이 앉아 있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마음 한 구석을 비워 두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의 마음도 숨을 쉴 수 있습니다.
 
* 마음에도 소식(小食)이 필요합니다. 덜어내는 것이 가장 번창하는 일입니다. 말을 덜어내면 허물이 적어집니다.

* 나는 눈주름을 좋아합니다. 웃음을 끌어당긴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세월의 손때를 입은 주름은 항상 아름답게 반짝이는 것입니다.

* 모든 삶은 맨발의 삶입니다. 우리의 조건은 다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신발 없는 맨발로 뛰는 것입니다. 맨발은 수식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완전하고도 행복한 삶을 위하여 그 아름다운 맨발로 뛰고 뛰는 것입니다. 인생은 오늘의 연속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단 한 번뿐인 오늘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영원답게 살아야 합니다. 증기기관차의 화통 같은 열정이 우리의 내일을 가꿉니다. 있는 힘을 다하는 당신이라면 나는 당신의 맨발을 손수 씻어주고 싶습니다.
 
* 너무 참아도 병이 생긴다지만 너무 참지 못하는 것도 병입니다. 즉각적인 응수가 능사는 아닙니다. 욕설을 욕설로 되받아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당신이 욕설로 되받아치면 욕설의 오감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큰 응수는 침묵에 있습니다. 침묵은 깊이와 수량을 잴 수 없습니다. 우치한 몇 마디의 말보다는 침묵이 더 아름답습니다.
 
* 시간이 흐르는 게 어떤 정적에 가깝다는 걸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앉고 일어서는 일, 밥을 먹고 잠을 청하는 일, 걷고 멈추는 일. 이런 일들이 잔잔하고 소록소록한 물결처럼 스쳐가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것이 원래 시간의 진면목이요, 우주의 호흡인지 모를 일입니다. 숨이 들어왔다 나가는 한 호흡. 그 호흡 사이에 생명이 있습니다. 찰나찰나에 순간순간에 생명이 있습니다.
 
* 바깥에서 찾지 말고 신속히 내 마음에게로 돌아갈 일입니다. 깨끗하게 비질된 도량 마당에 가을의 소슬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상상해보면 어떨지요. 도량 가득 만월의 빛이 내리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어떨지요. 그곳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상상해보세요. 우리의 마음을 그곳에 살게끔 하면 어떨지요.
 
*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같은 구름이지만 구름이 저녁 햇빛과 만나면 노을이 되고, 잘 흐르던 시내가 벼랑을 만나면 폭포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의탁해야 할까요. 성성한 것에 의탁해야 합니다. 졸리고 게으른 것이 아니라 더욱 강렬한 의지에 의탁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름이 그늘과 휴식을 선물합니다.
 
* 눈은 자더라도 마음은 자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자기를 바로 보지 못하고 미몽에 헤맨다면 그것을 어찌 확고하다고 하겠습니까. 그것을 어찌 결연하다고 하겠습니까.
 
* 이제 강을 만나면 강의 속도로 걸어갈 줄 알게 되었습니다. 새를 만나면 새를 먼저 보낼 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뒤따라오며 나의 이름을 부르면 서서 기다릴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저곳서 걸어오시면 중간에 멈춰 서서 한참 살아가는 얘기를 서로 나누다 오른손을 흔들며 헤어질 것입니다. 당신과 헤어질 때 나는 웃으면서 이렇게 당부하겠지요. "자연의 보폭으로 걸어 돌아가세요."
 
*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르고, 나무에 꽃이 피고 잎이 돋는 줄도 모르고 살고 있으니, 마음에 '꽃으로 잎으로'가 들어앉을 리 만무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인지요. 마음에 한가함이 깃들도록 해야 합니다. 너무 움켜쥐려 하지 말고, 너무 코앞만 보려 하지 말고, 먼 산을 보듯 먼 길을 가듯 해야 우리는 우리의 삶을 주관하는 주인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 식물이 햇빛의 방향에 따라 순을 자라게 하고 꽃을 피우듯 마음은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자랍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잠깐 가장 느릿느릿한 풍경을 마음 속에 떠올리면 마음도 속도를 늦추는 완보를 하게 됩니다.
 
* 있는 힘을 다해 우리는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니 당신만 고통을 받고 있는 게 아닙니다. 모두 다 고통의 바다에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다 온전해지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비루함이라 말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우리는 사랑과 삶의 고통을 넘어서려 하고 있습니다.
 
* 나는 빈 그릇에 담긴 물이었으면 합니다. 물이 빈 그릇에 담기더라도 빈 그릇을 상처내지 않는 것처럼 그것은 고통이 생겨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오늘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마음이 하는 '둥근'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과 나는 한 몸으로 오직 움직이고 흘러갈 뿐.
 


느림보 마음 - 문태준 산문집

문태준 지음, 마음의숲(2018)


태그:#문태준, #시인, #도서, #신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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