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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중학교 수업시간. 한문시간에 느닷없이 수학 선생님이 들어왔다. 학생들은 놀랐다. 그런데 선생님이 하는 말이, '이럴수가'!

 

"난 한문을 못해. 수학전공이니까. 그런데 수학과 한문을 맡게 됐어. 나도 한문을 모르고 너희도 한문을 모르니, 우리 같이 공부해 나가자. 함께 본문을 외우는 거야."

 

약간은 어이없는 이 사건은 한 소년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선생님과 '함께하는 공부'는 한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 교실에서 수학선생님에게 한문을 배운 학생은 현재 한자 학원을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10일 '자모 한자·중국어 학원' 이점수(43) 원장을 만났다.

 

퇴직 후 한자학원 운영

 

"선생님의 솔직한 모습에 반한 거죠. 그때부터 한자에 흥미를 느끼게 됐고, 이후 대학에서는 중문학을 전공했어요. 그런데, 공부를 할수록 한자에 대한 어떤 깊이나 맛을 못 느끼겠더라고요. 그래서 석·박사 과정에서 동양고전학과 한문을 공부하게 된 거죠."

 

20여 년 전, 이점수 원장은 앞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져 중국어에 대한 수요가 많아 질 것이란 사회 분위기 속에서 중어중문어과를 대학전공으로 선택했다. 물론 기본으로 한자에 대한 관심도 있었다.

 

IMF를 거치면서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는 상황에 놓이자, 이 원장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앞으로 내가 꾸준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했어요. 세상에 나의 족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학원운영은 우연치 않게 시작하게 됐지만, 한자를 가르친다는 것은 지금도 매우 보람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점수 원장은 결국 지난 2000년 7월 한자학원 문을 열었다.

 

입시경쟁교육 속, 한자 외면 받는다

 

현재 이점수 원장이 운영하는 한자학원은 대부분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주를 이룬다. 고등학생의 경우는 두 명 남짓. 학년이 올라갈수록 입시와 관련된 영어·수학 학원으로 학생들이 빠져나간다는 게 이 원장의 설명이다.

 

"중국어와 한자는 수능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잖아요. 학부모의 경우 자녀가 저학년일 때는 기본적으로 한자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공감해요. 그런데 학년이 올라가면 아무래도 입시와 성적과 연결이 되는 교육에 치중하죠. 그래서 중학교 2~3학년만 되면 대부분 한자학원을 그만두는 편이에요."

 

이점수 원장은 최근 들어 한자가 국가공인자격시험으로 인정을 받고, 또 초등학교에서도 재량수업 시간에 한자를 가르치는 등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 다행이지만, 사실상 한자가 더 기대를 받기는 어렵다고 내다봤다.

 

"입시경쟁뿐만 아니라 초고속화된 사회에 살다보니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효과만을 쫓는 경향이 있어요. '구시대적인 가치는 무언가 안 맞는다'라고 생각하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한자교육에 대한 관심도 점점 멀어지는 거죠."

 

"급수 위주의 한자교육, 진짜 교육 못돼"

 

물론, 최근에는 한자급수가 국가공인 자격으로 인정되면서, 조기한자교육이 '열풍'으로 포장될 만큼 많은 관심을 끌기도 한다. 이 원장 역시 급수를 원하는 학부모들이 많다며, 일부 학원은 아예 급수시험 맞춤형 한자교육만을 진행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한자 급수의 경우 내신이나 성적에 포함이 돼요. 그러다보니 학부모는 여기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죠. 실제로 많이 요구를 하세요. 물론 이런 현실적인 부분을 외면할 수 없어 저 역시 1년에 4번 급수 시험이 있을 때는 급수시험 대비를 하지만, 이게 한문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이점수 원장은 학원을 경영하는 입장에서는 1년 내내 급수대비반을 운영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지만, 이는 자신의 한자교육 철학과 맞지 않다고 말했다. 급수를 대비하는 한자공부는 단어 암기에 그치지만, 실제로 한자를 공부하는 것은 문장을 이해하고 그 속에 숨은 뜻까지 풀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학부모들의 요구 속에서 지금껏 고집을 안 꺾고 한자를 가르쳐 온 이점수 원장은 이런 이유로 때때로 '고뇌'에 빠진다며 웃어 보였다.

 

"누구에게나 장점은 있다…맞춤형 교육 필요"

 

입시경쟁 위주의 교육 속에서 외면 받는 한자를 가르치기 때문일까. 이점수 원장은 여느 학원과는 다른 교육관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성적 위주로 교육을 시켜서는 안된다는 원칙이다. 그래서 이 원장은 학생들의 성적보다는 인성교육과 예절에 신경쓰며, 특히 학생 개개인이 잘하는 부분에 맞춰 교육을 진행한다.

 

"아이들은 누구나 장단점이 있어요. 성적만 가지고 아이를 칭찬하게 되면, 공부를 못하는 아이도 분명 잘하는 게 있는데, 그걸 볼 수 없게 되는 거죠. 때문에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얘기를 나누고 교육을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룹수업을 진행하지 않는다는 이점수 원장은 개인별 맞춤 학습을 진행한다. 바로 같은 사자소학을 가르치더라도 아이들 특성에 맞게 공부방법을 달리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쓰기를 잘하는 학생의 경우에는 한자쓰기를 먼저 교육하고, 이어 말하기와 해석하기 등을 이어간다. 반대로 말하기를 잘하는 학생은 한자를 읽는 거에서부터 교육이 시작되고 이어 쓰기와 해석하기 등의 순으로 교육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점수 원장의 학원에서는 한 수업시간에 여러 학생이 모여 한명은 쓰기를 한명은 말하기를 한명은 해석하기를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한자공부는 나의 뿌리를 찾는 것…서당 운영해보고 싶다"

 

이처럼 이점수 원장은 한자교육의 '기본'을 중요시 한다. 외면 받는 학문이기는 하지만 그 중요성에 있어선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게 바로 한자라고 이점수 원장은 말한다.

 

"한자 공부는 바로 내 뿌리를 찾는 과정이에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가보가 있는데, 그게 바로 족보거든요. 예로부터 내려 온 족보를 보려면 한자를 알아야 하는데, 결국 한자를 모르면 바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죠."

 

더불어 경서에 녹아있는 옛 선인들의 가르침이나 생각 등을 배우기 위해서도 한자가 중요하다는 이점수 원장. 그는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바로 '한자 가르침'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학원의 경영은 처음 시작할 때부터 각오했던 부분이에요. 어렵더라도 제가 조금 아끼고 조금 감내하면 되는 부분이죠. 대신, 컴퓨터와 경시대회 위주의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기본 소양을 위해서라도 한자를 많이 배웠으면 좋겠어요."

 

언젠가는 꼭 서당을 운영해 학생들에게 무료로 한자를 가르치고 싶다는 이점수 원장은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질끈 동여맨 것처럼 말투와 표정에서도 내내 '꼿꼿함'이 묻어났다.

 

"진정한 선비는 배가 고픈 법"이라며 웃어 보인 그의 미소가 꽤나 오랫동안 잔상으로 남을 거 같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선샤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학자학원, #중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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