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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 입구인 천외촌.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중천문까지 갑니다
 태산 입구인 천외촌.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중천문까지 갑니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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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이라면 머리부터 흔드는 제가 중국인들도 평생 한번 오르기가 쉽지 않다는 태산(泰山-해발1545m)에 오를 마음을 먹은 건 순전히 "태산위에 있는 좋은 호텔에서 잠을 자면 마치 신선이 되어 구름 위서 잠을 자는 기분일 거야"라는 남편의 달콤한 꼬드김 때문이었답니다.

화로 속처럼 더웠던 제남을 출발해 한 시간 정도를 달리니 태산의 입구인 천외촌에 당도합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거대한 돌기둥으로 유명한 태산의 입구 천외촌. 처음부터 걸어서 태산에 오를 생각은 하지도 않았던 터라 케이블카를 탈 수 있는 중천문까지는 버스를 이용합니다.

버스를 타고 설악의 미시령을 닮은 꼬불꼬불한 길을 돌고 돌아 중천문에 이르니 끝이 보이지 않는 태산 정상을 향해 수직으로 오르는 케이블카가 기다리고 있겠지요.

"이거 왠지 장난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걸. 무서운 건 아니지?"
"무섭긴. 스키장 리프트랑 비슷해. 하나도 안 무서워."

그러나…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는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깎아지른 절벽을 내려다보는 것도 가슴이 시려 죽겠는데 휭~ 하고 바람 한 자락이 지나가자 케이블카가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겠어요.  

"아이구야. 케이블카가 흔들리네. 어떻게 해. 어지러워 죽겠어. 멀미가 날 것 같아."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태산 천가의 모습이 신비롭게 드러나고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태산 천가의 모습이 신비롭게 드러나고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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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팔에 매달려 눈도 뜨지 못 한 채 얼마를 갔을까요.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케이블카 문이 열리고 다시 땅을 밟으니 여기가 천국이구나 싶겠지요.

"여기가 태산이야. 여기서부터 30분쯤 정상을 향해 걸으면 우리가 묵을 호텔이 나올 거야."

험난하고 가파르기로 유명하다는 걸어서 오르는 길에 비하면 케이블카에서 내려서 걷는 태산 정상의 길은 신기하리 만큼 평평합니다. 완만한 경사를 따라 조금 걷다보니 아래부터 걸어서 올라온 사람들과 만나게 되는 남천문이 보입니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계단을 4시간 넘게 걸어서 올라온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마라톤을 완주한 선수들처럼 남천문 앞에서 승리의 기쁨 가득한 얼굴로 사진을 찍습니다. 먼저 도착해 사진을 찍어 주는 사람들, 뒤따라 오르는 사람에게 격려의 박수를 쳐주는 사람들. 저도 저들과 함께 계단을 올랐더라면 저런 가슴 벅찬 희열을 느낄 수 있었겠지요.

남천문을 향해 악명높은 18반을 오르는 사람들
 남천문을 향해 악명높은 18반을 오르는 사람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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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천문에서 남천문에 이르는 1700여 개의 계단은 경사가 심하고 가팔라 '악명 높은 18반'이라고 부른답니다.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길을 사다리를 오르다시피 기어 올라온 많은 사람들 중에 유독 저의 눈길을 사로잡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커다란 흰 천을 머리 위로부터 내려쓰고 그 위로 커다란 자루를 짊어지고 올라오는 그는  태산 위 도로공사에 쓰일 시멘트나 모래를 지고 오르는 인부인 듯 보였습니다. 그의 등에서 그가 지고 있는 짐의 무게보다 훨씬 더 무거워 보이는 삶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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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숨을 몰아쉬며 계단을 오르는 그에게서 고행을 하던 예수나 석가의 모습을 본 것은 저의 착각이었을까요. 잠깐 스쳐간 인상이지만 저에겐 충격적이었던지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장면으로 남아 있답니다.

남천문을 지나 우리가 묵을 숙소인 신식빙관에 이르려면 도교사원과 하늘거리라는 천가를 지나야 합니다. 주로 상점과 호텔로 이루어진 천가는 태산에 오른 등산객들을 상대로 기념품을 팔거나 태산의 명물이라는 산동전병을 만들어 팔기도 합니다.

도교사원과 천가 상점들을 기웃거리다 다시 태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 높이 솟아있는 바위마다에 쓰여진 웅장한 글씨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어찌보면 환경파괴의 현장을 보는 듯도 하지만 멀리는 진시황제부터 강희제, 건륭제, 당현종을 비롯해 근대의 모택동과 주은래의 부인인 등영초까지 역사에 남을 영웅호걸들의 감탄과 찬양이 담은 글들이라니 시대를 거슬러 그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 느낌까지 들겠지요.

태산의 명물. 영웅호걸들의 글이 새겨진 바위들
 태산의 명물. 영웅호걸들의 글이 새겨진 바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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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영웅호걸들과 시간을 뛰어 넘는 대화를 하며 정상을 향해 오르다보니 태산 최고봉이라는 옥황정 바로아래 우리가 하룻밤 묵어가게 될 호텔 신식빙관이 보입니다.

태산 최고의 호텔이라 값도 엄청 비싸고 예약도 쉽지 않다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그다지 '최고'라고 극찬할 만한 시설은 아닙니다. 아마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일출을 관망하기에 좋다는 것 때문에 비싼 방값을 치르고도 이곳에 묵은 것이 아닌가 싶었답니다.

걸어서 오르진 않았지만 한 시간여 태산 정상 주변을 돌아보느라 고단했던지, 정말 구름위에서 자는 듯한 평안함 때문이었는지 금방 잠이 들어버린 우리는 새벽 4시 15분 모닝콜이 울리는 바람에 잠이 깼습니다. 지난밤 종업원이 주고 간 안내장을 보니 오늘의 해뜨는 시간은 4시 45분. 서둘러 일어나 옷장 속에 비치된 겨울 파카를 꺼내 입고 밖으로 나가 봅니다.

아직은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간.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자욱한 운무가 태산을 감싸고 있습니다. 해돋이를 보기 위해 운무를 뚫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다보니 보이지 않던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일출을 보기 위해 태산에 오른 사람들이 태산을 상징하는 오악독존 바위앞에서 사진을 찍기위해 장사진을 이루고
 일출을 보기 위해 태산에 오른 사람들이 태산을 상징하는 오악독존 바위앞에서 사진을 찍기위해 장사진을 이루고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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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닥에 누워 자고 있는 사람들, 계단에 쓰러져 졸고 있는 학생들, 향과 지전을 잔뜩 들고와 바위 밑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 어디서 나타났는지 어제 저녁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이들은 전날 천외촌을 출발해 밤을 꼴딱 세워가며 그 악명 높은 계단을 오른 사람들이랍니다. 저들에게 태산의 일출이 무엇이기에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고행에 가까운 산행을 하는 것일까요.             

집에서라면 생각도 하지 못했을 4시 15분 기상을 해가며 일출을 기다렸지만 태산을 둘러싼 운무는 쉽게 사라져 주지 않고 비구름이 내려앉은 듯 머리와 옷을 적시기까지 합니다.

"이거 비 오는 거 아냐? 태산에서 비를 맞으면 대통령이 될 징조라는데. 허허허"

남편은 예전 국민회의 총재 시절 DJ가 태산에 올라 비를 맞아서 대통령이 되었다는 소문이 있다면서 일출은 못 보았지만 대신 비를 맞았으니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거라며 은근히 좋아라합니다.

저들의 간절한 바람이 하늘에 닿아 이루어 지길
 저들의 간절한 바람이 하늘에 닿아 이루어 지길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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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 후에도 한국의 몇몇 정치인들이 태산에 올라 비를 맞기를 원했다는 말도 있으니 실없이 좋아라하는 남편을 탓 할 일도 아니지 싶었답니다.

해가 뜰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운무는 걷히지 않았고 해를 기다리던 수많은 사람들은 아쉬움을 접고 천천히 도교 사원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손에 쥐고 있는 향을 사르고 소원을 빌기 위해서 랍니다.

그런 사람들 중 유난히 눈에 띄는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남루한 차림의 그들은 모두 여섯명으로 할머니 한분과 부부로 보이는 두 남녀, 여동생과 여자 아이 둘이었습니다.

여자 아이는 둘 다 금색 색종이로 접은 지전이 가득 든 커다란 비닐봉지를 어깨 메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종이라지만 제 몸 크기 만한 봉지를 지고 올라왔을 것을 생각하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아빠 역시 어깨에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그 가방에도 역시 황금색 지전 뭉치가 가득합니다. 어른 몸길이보다 더 큰 향도 들고 있습니다.

부모를 따라 금색 지전을 지고 올라온 아이들
 부모를 따라 금색 지전을 지고 올라온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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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가져온 지전뭉치와 향을 도교사원에 마련된 지장고라는 곳에 태우며 간절히 기도를 합니다. 얼마나 간절한 바람이 있기에 저 무거운 짐을 지고 온 가족이 이 높은 곳까지 올라왔을까요. 생면부지 외국인인 저마저도 저들의 바람이 하늘에 닿아 이루어지기를 함께 기도하게 되는 장면이었답니다.

태산에 오르기 전에는 태산은 무조건 높은 산이라 생각했고 태산에 올라보니 말처럼 높은 산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태산에 오른 사람들을 보니 태산이 태산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짐작하게 됩니다. 중국인들의 삶 속에서 그들의 신앙 속에서, 깊은 역사 속에서 태산은 산이 아닌 성지로 하늘과 가장 가깝게 높고 큰 산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아 보인다고 했다는 공자님. 이제 태산구경도 다 했으니 공자님을 만나러 곡부로 갑니다.

다음 편은 곡부로 이어집니다. 


태그:#태산, #산동성, #오악독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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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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