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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불법이니 아니니 하며 학교 안팎이 시끄러웠는데, 인문계 고등학교의 '야자'는 언제부턴가 일과 수업처럼 빼놓을 수 없는 정규교육과정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중3 학생들도 내년부터는 밤 10시가 넘어야 하교할 수 있다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심지어 전문계고에 진학하게 될 학생들조차도 비슷한 처지가 되고 있습니다.

밤늦도록 불이 환하게 켜진 고등학교 건물은 웬만한 도시들의 일반적인 야경이 되었고, 자정이 가까운 그 시간에 교문마다 심야 학원과 독서실로 실어다 줄 버스가 줄지어 선 모습조차 이젠 더 이상 낯설지도, 놀랍지도 않습니다. 비록 자녀가 자정이 넘어 파김치가 돼 집에 돌아와도, '인내는 달고 열매는 달다'며 축 처진 아이의 어깨를 다독이는 것이 이 시대 학부모의 보편적인 모습이 되었습니다.

버스 안에서 만난 제자

요 며칠 전 퇴근길 버스 안에서 이태 전에 졸업한 제자를 만났습니다. 책가방을 멘 채 교복을 입고 있었으니 당연히 하굣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 인사하는 그 아이를 향해 불쑥 튀어나온 말이 "너 어디 아픈 거니?"였습니다. 곧, 조퇴하는 이유를 물었던 겁니다. 해가 아직 중천인 그때는 당연히 보충수업을 마치고 '야자'를 준비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전 야자 안 하거든요. 중학교 다닐 때부터 요리를 배웠잖아요. 요리를 배우다 보니 영어가 필요할 것 같아 지금 회화 학원 가는 길이에요."

순간 떠올리진 못했지만, 그가 중3 때 한식과 일식 요리사 자격을 땄던 걸 어렴풋이 기억해 냈습니다. 일찌감치 진로를 결정한 그였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인문계고로 진학해야만 했고, 입학하자마자부터 고등학교 생활이 자신의 꿈을 이뤄가는 데에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모든 선생님들로부터 일단 인문계고로 진학한 이상 예외가 없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심야자율학습을 하고 있는 학생.
 심야자율학습을 하고 있는 학생.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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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를 빼달라고 말했다가 한 명의 '특이한 케이스' 때문에 학급의 분위기가 흐트러질 수 있으니 절대 허락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고, 얼마 뒤에는 부모님조차 이 일로 인해 선생님으로부터 핀잔을 들어야 했답니다. 끝내 야자 면제라는 '쓰디쓴 열매'를 얻어냈지만, 졸지에 '문제아'가 되어 학교와 학급의 아웃사이더로 남았습니다.

적어도 인문계고의 경우, 내신을 챙기고 수능을 준비하며 대학에 진학하는 것, 그 일련의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모두 '예외'이자 '일탈'로 규정합니다. 절대 다수의 학생들이 아침 8시까지 등교해 밤 10시, 11시가 넘도록 딱딱한 의자에 앉아 졸린 눈 비벼 가며 전쟁 같은 공부를 하는 것이 '정상'이 되고, 요리사가 되겠다며 야자를 거부한 학생을 따돌리는 게 지금의 인문계고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그 또래의 무궁무진한 호기심과 포부도 물으려 하지 않고, 아무런 비전도 없이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이른바 '대세'를 따라가야 안전하다는 생각이 아이들의 미래를 온통 잿빛으로 물들게 합니다. 명색이 '스승'으로 존경받고자 하는 교사가 미래의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고작 '밑줄 쫙, 별표 땡'하며 족집게 문제 풀이나 해주고 수용소의 간수마냥 야자 감독으로만 머물고 있을 때 우리 교육은 절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고등학생에게 가장 필요한 건 '시간'인 것 같아요. 요리경연대회에 참가해 보고 싶고, 요리를 만들어 복지시설 같은 데 보내주고 싶고, 도서관에 하루종일 틀어박혀 세계 여러 나라의 요리 관련 책들을 다 읽어보고도 싶어요. 또, 부모님이 '투자'만 해주신다면 다른 나라에 직접 가서 요리를 배워보고도 싶고요. 그런데, 학교를 벗어난 곳에서 하는 공부라면 다 쓸데없는 짓으로 여기거나, 나중에 어른이 돼서 맘껏 하라는 식이에요."

진정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에게 필요한 건 '교육'이 아니라 '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지역사회와 연계된 활동을 교외 활동을 하며, 스스로 독서와 사색, 여행을 즐기는 아이들의 모습을 두고 '언감생심'이라는 반응을 하는 건 순전히 '교육'을 학교가 독점하고 있는 현실 때문입니다.

적어도 우리의 교육 현실에서 요리사를 꿈꾸며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그가 바라는 일상은 아직 요원합니다. 인문계고의 정규교육과정이 된 '야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사람은 지금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도 토론이고 타협이라고, 학원 교습 시간이 11시냐, 12시냐를 가지고 싸우다가 자율로 하자며 박수치는 현실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사교육 없는 학교'가 만든 함정

더욱이 얼마 안 있어 중학교에서도 '야자'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사교육 없는 학교'가 시범 운영을 거쳐 전국적으로 도입될 것이 확실시되기 때문입니다. 학원을 향하는 발길을 학교 교실로 돌려놓겠다는 취지인데, 세금 지원을 통해 학부모들의 체감 사교육비를 줄인다는 고육지책입니다.

학교 시설을 개방해 방과 후에 또 다른 일과가 이어지는 것이니, 말하자면 '야간 학교'가 운영되는 셈입니다. 입시라는 틀을 손보지 않은 상태에서 '야간 학교'는 철저하게 국, 영, 수 등 입시 과목에 치중될 수밖에 없고, 학원식 족집게 수업으로 진행될 것이 불 보듯 뻔합니다. 한편, 전국 단위의 일제고사 등을 통해 이곳에도 무한 경쟁의 불똥이 튀게 될 것이고, 어김없이 모든 '야간 학교'에서는 앞 다퉈 '야자'가 생겨날 겁니다. 현행 '야자'가 그러했듯이.

학부모들은 학교 안의 학원(곧, 사교육 없는 학교)과 학교 밖의 학원의 품질과 경쟁력을 비교하게 될 테지만, 지금껏 그래 왔듯, 승자독식의 현실과 사교육이 퍼뜨린 불안감에 철저히 길들여진 까닭에 두 쪽을 넘나들며 '줄타기'를 할지언정 아이들의 '잔혹사'가 누그러질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현 정부 최고 '브레인'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백년지대계가 고작 이 따윈가 싶어 서글플 따름입니다.

외려 학교와 선생님들에게 적잖이 실망했을 그 아이가 던진 말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건 차라리 이 땅의 고민하는 교사들에게 보내는 미래 세대의 '격려'였습니다.

"요리사 되겠다고 했을 때, 고생길 가려하느냐며 지청구를 들었고, 야자 안한다고 했을 때, '튄다'며 된통 혼이 났습니다. 그런데, 부모님과 선생님을 원망한 적은 없어요. 요리사는 천직(賤職)이고,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건 그 분들이 겪고 살아온 그 시대의 공통된 정서일 테니까요. 그걸 깨기가 어디 쉽겠어요.

비록 제 선택을 두고 부딪칠 수밖에 없었지만, 묵묵히 혼날 뿐 따지거나 이해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어요. 반드시 꿈을 이루어 제 선택이 옳았다는 걸, 적어도 어리석지는 않았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거든요. 적어도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 분들의 고정관념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지지 않겠어요?

그러자면 단 한 순간도 대충 흘려보내서는 안 되겠죠. 저 지금 중학교 때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하고 또 바쁘게 생활하고 있어요. 그 싫어했던 영어도 이제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미리 제 사인 하나 해 드릴까요? 나중에 제가 유명한 요리사가 되면 어려울 테니까요."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태그:#야자, #사교육 없는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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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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