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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걷는 길'이, 아니 '길을 걷는 것'이 '선풍적인 인기'다. '선풍적(旋風的)'이란 "회오리바람처럼 돌발적으로 발생하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거나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한 (것)"을 말한다. 말 그대로 '회오리바람'처럼 걷는 열풍이 전국을 휘감고 있다.

이 열풍을 선도한 것은 2년 전부터 시작된 '지리산길'과 '제주올레'다. 그 중에서도 '제주올레'의 파장은 가히 폭발적이다. '올레폐인(olleholic)'이란 신조어까지 등장할 정도로 열광적인 호응을 받고 있으며, 올레꾼들로 특수를 누리고 있는 관광업체들도 생겨나고 있다. 코스가 하나씩 개장될 때마다 제주지역의 시장을 비롯한 고위공무원들이 총출동하는 야단법석마저 보여주기까지 한다.

'Slow Tourism'이나 'Eco Tourism'이 제주관광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10여 년 전부터 얘기해도 마이동풍이었던 그들이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제주올레'는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를 보고 느끼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지 보여준 획기적 사건이며, 한국 관광 패러다임의 변화 가능성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극명한 사례이다.

산수국길
 산수국길
ⓒ 이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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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와 더불어 또 하나의 길이 제주에 만들어지고 있다. 이른바 '한라산숲길'이 그것이다. 올레가 제주해안을 한바퀴 도는 '해안길(물론 최근에는 중산간 지역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지만)'이라면, 한라산숲길은 말 그대로 한라산을 한바퀴 도는 '산길'이다. 이 길은 자연공원법의 적용을 받는 한라산국립공원 경계 밖 인근 해발 600미터에서 800미터 고지에 입지하고 있으며, 일제시대에 구축된 병참로(兵站路)인 하치마키도로와 표고재배장길, 임도 등을 주로 연결한 것이다.

민간차원에서는 지역신문인 한라일보사와 제주산악연맹이 이 길을 개척하고 있으며, 정부차원에서는 현재 산림청의 발주로 '(사)나를 만나는 숲'이 전국 7개 권역의 '전국산림문화체험숲길 조성 기본계획 수립연구'를 진행 중인데, 제주 한라산 권역의 숲길 조사 연구는 사)지역희망디자인센터 부설 '세계유산연구소'가 맡고 있다. 올해 하반기 이 기본계획이 완료되면 제주 한라산과 중산간 경계에 또 하나의 환형(環形) 트레일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동시에 '세계유산연구소'에서는 이 산과 바다의 두 환형길을 연결하는 '중산간 숲길'을 만들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최대 12개의 라인을 연결시키되 우선 올해는 2개의 노선만 선보일 예정이다. 단언컨대 이 길은 육지부에서는 전혀 체험할 수 없는 제주만의 명품 숲길이 될 것이다.

하나의 라인은, '한라산 숲길'에서 여러 시종점 중 하나로 설정하고 있는 '절물자연휴양림'에서 시작하여 북촌바다(너븐숭이 4.3기념관)까지 연결시키는 노선이다. 큰 포인트만 얘기하면 절물자연휴양림 ~ 교래자연휴양림 ~ 거문오름 세계유산지구 ~ 선흘 동백동산 ~ 북촌 노선이 된다. 이 노선은 제주인의 생명수 지하수 함양지대이자 제주 생태계의 허파인 곶자왈 숲을 경이롭게 체험할 수 있는 숲길로서 '(가칭)생명의 곶자왈길'로 명명했다.

다른 하나는 거문오름에서 지선으로 뻗어나와 거문오름 ~ 아부오름 ~ 동거미오름 ~ 용눈이오름 ~ 은월봉 ~ 말미오름까지 이어지는 노선이다. 제주 신화의 신들의 고향이자 제주섬 사람들의 삶의 숨결이 진하게 배어 있는 곳, 평화(平和)와 제주 선(線)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오름의 왕국'을 관통하는 노선으로 '(가칭)평화의 오름길'로 정했다.

말머리가 길었다. 지금부터 곶자왈 숲길 노선 시점(始點)인 절물 '장생의 숲길'을 맨 처음 소개하려 한다.

절물휴양림은 굳이 소개하지 않아도 제주도민은 물론 관광객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삼나무 숲이다. 제주시 봉개동 소재 절물오름 기슭에 1997년 7월 23일 개장한 제주 절물자연휴양림은 산림청 소관 국유림으로 총 300ha의 면적에 40 ~ 45년생 삼나무가 수림의 90% 이상을 차지하여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이른바 제주에서는 최상의 피톤치드(phytoncide) 체험 산림욕장으로 소문난 곳.

그런데 이곳에 최근 또 다른 명소가 생겼다. 절물자연휴양림은 최근 총 25억을 투입해 시설보완 사업을 완료하고 방문객을 맞을 채비를 마쳤다. 산림문화휴양관을 신축해 숙박동을 마련하고 '물 흐르는 산책로', 자연 그대로의 삼나무데크 산책로를 매표소에서부터 약수터까지 확충한 것. 또한 자연림과 삼나무 등 휴양림의 속살 속으로 산책하며 정신적 피로와 신체적 건강을 치유할 수 있는 왕복 8㎞ '장생의 숲길'도 조성했다.

숲길에 조성된 쉼터
 숲길에 조성된 쉼터
ⓒ 이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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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물 장생의 숲에 있는 양치식물
 절물 장생의 숲에 있는 양치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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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소개하려는 또 다른 명소는 바로 이 '장생의 숲길'이다. 지난 5월 중순 한라산숲길 시종점 연결 노선 조사차 절물오름을 찾았다 우연히 발견한 길이다. 그런데 이 숲길이름은 신중하게 정했으면 좋겠다. 공모를 통해 정하든지... 정신적 육체적 치유에 초점을 두어 '장생(長生)'의 숲이라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딘가 어색하다는 느낌이다. 단지 오래 살기 위해 이 숲을 찾는다면 오히려 우습지 않겠는가.

사실 삼나무숲 자체만을 보면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다. 삼나무 숲이 제주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절물자연휴양림 내에 이미 삼나무 숲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길이 새롭고 경이로운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이 길이 다른 숲길과는 달리 '최상의 쿠션(?)'을 자랑한다는 점이다. 사실 목재데크만 깔려 있어도 걷기에 좋은 길이다. 그런데 여기는 그냥 흙길이다. 흙길인데 딱딱한 반응대신 쿠션이 느껴진다. 오랫동안 쌓인 부엽토(腐葉土)가 오름 특유의 송이(스코리아)와 어우러져 이렇게 좋고 부드러운 쿠션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 그래서 전혀 다리관절이나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디스크 환자에겐 강추할 만 하다). 이런 길이 수km 이어지고 있으니... 결코 흔하지 않은 길인 셈이다.

벌써 알음알음 소문이 났는지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그 중에는 아예 신발을 벗고 맨발로 다니는 이들도 보인다. 이들처럼 이곳은 아예 신발을 벗고 다니는 것이 좋을 듯하다. 걷는 길 시종점에 발을 씻을 수 있는 시설만 해 준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싶다. 맨발로 걷는 숲길은 편안함을 선사한다.

후문 쪽에는 또 다른 볼거리가 있다. '산수국길'이 그것이다. "꽃이 아니라 '그리움' 그 자체"라고 불리우는 산수국. 이제는 모두 지고 말았을지도 모르지만(지난주까지는 괜찮았다) 보통 제주에서는 6월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꽃으로도 유명하다. '산수국'의 쪽색자태가 걷는 이들을 반겨준다. 원예용 수국이 지나치게 화사하다면 제주 들판의 산수국은 헛꽃(무성화 : 꽃 주변에서 꽃가루 수정을 위하여 곤충을 유인하는 가짜 꽃)이 그다지 많은 꽃잎을 피우지 않아 오히려 소박함 속에 청초함을 보여준다. 

산수국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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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국
 산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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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국
 산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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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초 조사차 방문한 이 길에서 우리는 또 다른 황홀감을 맛보았다. 때죽나무꽃 융단길이 그것이다. 숲길 몇 몇 구간이 하얀 꽃융단으로 덮여 있었다.

때죽나무라는 이름은 열매의 모양이 마치 스님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때가중(중대가리)나무'라고 부르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에서부터, 열매껍질에 독성이 있어 이를 빻아 물고기를 잡는 데 사용해 떼로 죽이는 나무여서 때죽나무가 되었다는 설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영어이름이 snowbell(雪鐘)로 꽃의 형태를 보면 정말 제대로 지었다는 생각이다. 순백의 꽃들이 종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모습에서 유래된 듯. 옛날 제주에는 물이 귀해 빗물을 받아 식수로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샘물은 길어다 오래 두면 썩고 마는데 때죽나무를 통해 받은 물은 석달 이상만 되면 샘물 이상으로 맑고 깨끗했고 물맛도 좋았다고 전해진다.

김소월은 한 시(진달래길)에서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라"고 했다지만 도저히 그냥 밟고 지나칠 수가 없다.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겠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는 절절한 역설 때문이기도 하지만 금방 떨어진 꽃잎의 자태가 너무 이뻐서...

때죽나무꽃 융단길
 때죽나무꽃 융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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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죽나무 꽃잎
 때죽나무 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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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죽나무꽃잎
 때죽나무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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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죽나무
 때죽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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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죽나무 꽃잎이 깔려있는 장생의 숲길
 때죽나무 꽃잎이 깔려있는 장생의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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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명의 길'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만날 수 있다. 이 평화로운 숲 속에서 삼나무 숲에서 치열하게 생존싸움을 벌이고 있는 소나무들("소나무 니들이 고생이 많다")과, 노루와 까마귀, 양치식물 등... 그리고 수많은 돌무더기들도. 

높이 1m 정도 장축 1m 정도의 돌무더기가 마치 방사탑이나 돌무덤처럼 곳곳에 쌓여 있는데 이게 궁금하다. 제주에서는 밭을 일구면서 나온 돌들로 담을 쌓고 남은 돌들은 한쪽에 돌무덤처럼 쌓아놓는데, 이것을 '머들'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이것도 머들일까? 우리 선조들이 이 오름 끝자락까지 올라와 힘들게 밭을 일구어야 했단 말인가? 이 돌무더기는 지금 이 숲길의 경계를 획정하는데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허나 그 자체가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사료되는 바 전문가들의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숲길에서 만난 노루
 숲길에서 만난 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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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니들이 고생이 많다
 소나무 니들이 고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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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에서 만난 돌무더기
 숲길에서 만난 돌무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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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점이라 한다면 숲길 폭이 조금 넓다는 점이다. 넓은 구간은 폭이 3m나 되는 곳도 있는데 가장 이상적인 트레일(Trail)은 1m 이내의 폭이다. 숲길이나 트레일을 조성하면서 아무런 개념없이 편의적으로 길을 개설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기왕이면 넓은 게 좋다는 식으로 가능하면 넓게 길을 만들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폭이 좁을수록 트레일로서의 가치는 빛난다. 종종 길을 찾기 어려울 때 소나 말, 혹은 야생 동물이 다니던 길을 찾으면 된다. 사실 인간 또한 숲 속에 존재하는 동물 중 하나로 생각한다면 전혀 그 폭이 넓을 필요는 없다. 걷기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폭이면 충분하다.

각설하자. "길이 있어 길을 간다" 했는가, 제주의 숲길은 그 길의 감촉과 숲에서 내뿜는 향기가 너무 황홀하다. (계속)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지역희망디자인센터(hopedesign.or.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숲길, #제주숲길, #절물휴양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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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부탄과 코스타리카를 다녀 온 후 행복(국민총행복)과 행복한 나라 공부에 푹 빠져 살고 있는 행복연구가. 현재 사)국민총행복전환포럼 부설 국민총행복정책연구소장(전 상임이사)을 맡고 있으며, 서울시 시민행복위원회 공동위원장, 행복실현지방정부협의회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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