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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그리고 맑음...다시 흐리고 비...하 수상한 6월의 지리산 날씨 속에서 종주산행하다...비온 뒤 맑아진 하늘과 산빛...
▲ 지리산 종주산행 비...그리고 맑음...다시 흐리고 비...하 수상한 6월의 지리산 날씨 속에서 종주산행하다...비온 뒤 맑아진 하늘과 산빛...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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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그대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꽃이 피어나기를
앞서간 발길들이 그대의 걸음걸음에 복이 되기를
그대 심령의 날씨가 정말 중요한 날씨가 되기를
그대의 모든 목적이 하나님 마음속에 둥지를 틀기를
그대의 기도가 다른 순례자들을 위해 뒤덮인 꽃과 같기를
그대의 마음이 뜻밖의 사건들 속에서 의미를 찾기를
그대를 위해 기도하는 친구들이 내내 그대를 안고 가기를
그대를 위해 기도하는 친구들이 그대 마음속에 안겨 가기를
삶의 동심원이 길 가는 내내 그대를 에워싸기를
깨어진 세상이 그대의 어깨 위에 목말을 타기를
그대 영혼의 배낭에 그대의 기쁨과 슬픔을 지고 가기를
그대가 온 세상 모든 기도의 고리들을 기억하기를'
-'산티아고 가는길, 느긋하게 걸어라'에서-

다른 사람들은 결혼기념일을 어떻게 보낼까. 이번에 다가온 결혼기념일을 지리산종주산행으로 특별한 추억을 남기기로 했다. 애초엔 성삼재에서부터 대원사까지를 생각했지만 도중에 계획을 수정하여 성삼재에서 천왕봉까지 종주하고 중산리로 내려가기로 결정하였다. 작년 8월, 처음으로 지리산종주산행을 해본 이후 두 번째 지리산종주산행이라 기대가 된다.

첫째 날(6월 30일), 노고단대피소에서의 하룻밤

전라북도 남원시와 전라남도 구례군, 경상남도 산청군, 하동군, 함양군에 걸쳐 있는 지리산, 신라 5악의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하여 지리산이라 불렀다 하고, 또 멀리 백두대간이 흘러왔다하여 두류산, 옛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으로도 알려져 있다.

높이 1915m이다. 서쪽 끝의 노고단(1507m), 서쪽 중앙의 반야봉(1751m) 등 3봉을 중심으로 하여 100여 리의 거대한 산악군을 형상하고 있는 지리산. 험한 지리산에 사람들은 왜 가는 것일까. 누가 왜 거기 가냐고 묻는다면 나 또한 어떤 이의 말처럼 산이 거기 있어 간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우린 모두 순례의 길을 가고 있다.

출발하기도 전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저께 하루온종일 비가 왔고, 어제 아침까지 비가 퍼붓는가 싶더니 낮부터 오늘 아침까지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던 비는 다시 대지를 적시기 시작했다. 차에 기름을 만땅으로 채운 뒤에 출발, 오전 11시 30분이다.

비가 와서 우의를 덧입고 가는 길...배낭무게는 엄청나다...
▲ 성삼재에서 노고단 가는 길... 비가 와서 우의를 덧입고 가는 길...배낭무게는 엄청나다...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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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오늘은 비가 올 것이라는 기상예보를 들었던 터라 천천히 출발해 느긋하게 구례에서 성삼재까지 버스를 타고 내려 노고단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묵고 난 뒤 다음날 본격적인 종주산행을 하기로 했다. 남양산IC(11:30)를 벗어나 대동IC를 거쳐 진영휴게소에서 잠시 휴식, 짐주쯤 지나자 빗줄기가 더 강해지면서 갈수록 비가 더 많이 쏟아진다.

얼마쯤 달렸을까. 전라도 순천이 가까워지자 엄청나게 많은 비가 쏟아져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폭우에 가깝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장대비는 금세 고속도로를 물바다로 만들고 앞 유리, 옆 유리창 모두 빗물로 넘쳐 시야가 보이지 않을 정도다. 순천을 벗어나면서 쏟아지던 빗줄기가 점점 약해진다. 서순천IC(2:05)를 빠져나가 17번 국도를 타고 구례방향으로 간다.

...!!!
▲ 노고단에서 아침을... ...!!!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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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을 옆에 끼고 가는 길, 비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문척, 구례갈림길 앞에서 구례 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구례읍에 도착하자 오후 2시 40분이다. 차를 가까운 주차장에 주차해놓고 버스터미널 구내에서 성삼재행 버스를 기다린다. 등산차림을 한 사람들이 몇몇 보인다. 성삼재행 버스는 오후 3시 40분에 있단다. 한참동안 기다리고 앉아 있으니 버스가 도착하고, 우린 무거운 배낭을 들고 버스에 오른다.

3시 40분에 버스는 출발해 3시 50분, 화엄사입구를 거쳐서 잘 닦여진 길을 따라 마을을 끼고 빗길을 계속 달린다. 점점 경사가 높아지면서 천은사 입구에서 잠시 정차, 1인당 1,600원씩 준비하라고 기사는 말한다. 천은사 입장료라나?! 작년 8월에도 똑같은 일을 당했지만, 참으로 황당한 일이다.

천은사에 발을 디뎌보지도 않았고 딛을 생각도 없는데, 단지 이곳 옆을 지나간다는 이유로 입장료를 내라니, 날 강도가 따로 없다. 어이없고 황당해 하면서도 모두 아무 말도 없이 돈을 지불한다. 길은 갈수록 급커브 길에 경사는 점점 높아지고 급커브길 위험표시는 곳곳마다 표시되어 잇는 경사로를 따라 꼬불꼬불 길을 출렁이며 올라간다.

아슬아슬한 위험한 길이다. 버스 안에는 총 8명이 있다. 우리부부와 또 다른 부부팀, 친구사이로 보이는 두 남자, 각자 따로 올라가는 남자 둘, 이렇게 총 8명이 함께 구례에서 성삼재로 올라가고 있다. 더 높이 올라갈수록 급커브 길의 연속이다. 4시 10분, 성삼재에 도착, 빗방울 여전히 성글게 흩뿌리고 날씨는 쌀쌀해 여벌옷을 꺼내 입는다.

잠시 휴식 후 우의를 덧입고 걸어서 노고단대피소까지 간다. 5시 20분, 노고단대피소에 도착, 노고단대피소 취사장에서 저녁을 지어 먹는다. 함께 버스에 올랐던 사람들도 이미 당도해 있는 사람들도 취사장에 모여들었다. 노고단대피소는 비 오는 날이라 한산한 풍경이다.

남편과 함께 취사장 내 나무탁자를 마주하고 앉아서 밥을 짓고 있는데 뒤에 앉았던 한 남자가 다가와 '좀 있다가 신세 좀 질까요?'하고 물었다. 무슨 말일까. 신세 질 일이 뭐가 있다고?! 의아한 표정을 본 그가 하는 말, '같이 저녁을 먹자구요!'한다. 그냥 싫든 좋든 '아~예!'하고 대답한다.

일면식이 전혀 없는 남자의 적극적인 친근함의 표시가 거북하고 경계하게 만들어 괜시리 마음이 쓰이지만 알고 보니 산에 많이 다녀 본 사람인 것 같았다. 살구 두 개를 얻은 우리는 첫날이라 고기를 구웠고 구운 고기를 좀 주었다. 우리와 함께 버스에 올랐던 부부팀의 여자는 스스럼 없이 처음 만난 듯 한 남자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결국 한 식탁에서 밥을 먹고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너무 낯을 가리는 걸까. 젊은 남자는 높은 배낭에서 가스버너 두 개를 꺼내고 압력밥솥을 꺼내더니 두 개의 버너에 시퍼렇게 불을 붙이고 그 위에 압력솥을 올려놓았다. 잠깐 사이 압렵밥솥에서 밥이 끓는 소리 쉭쉭, 찌게 냄비가 수증기를 피워 올렸다. 금방 밥을 만들고 고기와 밥으로 식탁을 차린 그는 우리 식탁위에도 고기를 주었다.

그의 하는 행동을 지켜보기만 해도 신기하고 재미있어 모두들 시선이 그쪽으로 갔다. 버스에 올랐던 두 남자와 부부팀, 젊은 남자, 또 혼자 온 남자는 식사 후에도 밤늦게까지 소주잔을 기울이며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우린 저녁 식사 후 조용한 대피소 안으로 들어와 비 소리 들으며 대피소에 비치된 산행관련 책과 시집 몇 권을 뒤적인다.

대피소 지붕을 두드리는 비 소리가 듣기 좋은 저녁, 오늘따라 시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 시가 내 마음 속에 닻을 내린다. 한산한 노고단대피소 안에 편히 기대앉아 비 소리 들으며 시와 만난다. 그리운 이들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저녁이다.

'조그만 사랑노래' -황동규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늘 그대 뒤를 따르던/길 문득 사라지고/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여기저기서 어린 날/우리와 놀아주던 별들이/얼굴을 가리고 박혀있다/사랑한다 사랑한다/추위와 환한 저녁 하늘에/찬란히 깨어진 그들이 보인다/성긴 눈 날린다/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눈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몇 송이 눈.'

후드득... 지붕 위를 두드리는 비 소리,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시가 마음에 닿는다. 닻을 내린다. 비 소리 들으며 시집을 읽다가 가져온 성경을 펴서 읽고 밤 9시가 되어 자리에 눕는다.

둘째 날(7월 1일), 노고단에서 연하천까지

비온 뒤 맑게 갠 하늘...푸르른 산빛들...
▲ 노고단에서 아침을... 비온 뒤 맑게 갠 하늘...푸르른 산빛들...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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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일찍 잠을 털고 일어난다. 새벽 4시 40분, 깨어 일어나 무릎 꿇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새벽 5시 30분, 산책에 나선다. 산산이 멀리멀리 펼쳐져 있다. 끊어질 듯 길게, 겹겹이 겹치지 않으면서 펼쳐진 산 능선이 푸르스름한 빛을 던지고 있다. 그 위로 구름이 내려앉았다.

비는 그쳤고 하늘 한 귀퉁이가 호수처럼 푸르게 열린다. 운해에 가려진 먼 산 빛이 기묘한 모양을 펼쳐놓고 있어 시선을 잡아끈다. 어제와는 달리 이른 아침부터 많은 등산객들이 노고단대피소로 올라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새벽 첫차가 새벽 4시 40분에 구례에서 출발하니 아마 새벽 첫차로 온 사람들인 듯 하다. 사람들이 노고단대피소 안팎에 찬다.

오전 8시 정각, 노고단대피소를 뒤로하고 길 위에 선다. 하늘은 맑아지고 어제 비에 흠씬 젖은 숲은 더욱 싱그럽다. 8시 10분, 노고단 고개에 도착, 노고단 정상은 오전 10시부터 개방하는 까닭에 올라가보지 못하고 눈앞에서 일별하고 노고단고개를 넘는다. 여기서 천왕봉까지는 약 25.5Km이다. 노고단고개에서 종주 길에 드는 나무문 앞에서 사진 한 장 찍고 종주길에 선다.

좁은 숲길엔 나무들이 햇볕을 가려주어 서늘한 그늘 길이다. 종주길엔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마주 오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전혀 힘든 기색 없이 여유 있는 걸음, 이른 아침의 숲처럼 청신한 얼굴, 여유 있는 걸음이다. 과연 젊음이다. 지리산에서 보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더욱 멋져 보인다.

바윗길 걷다가 흙길, 이젠 먹구름이 완전히 사라지고 흰 구름이 눈이 시리도록 하얗게 푸른  하늘에 둥실둥실 떠 있어 더욱 맑은 날임을 실감케 한다. 숲은 청신하고 싱그럽다. 무슨 대학교에서 왔다던가?! 교수와 함께 온 대여섯 명의 청년들, 크고 긴 등산가방을 등에 짊어지고 어엿하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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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주길에서 ... ...!!!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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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리 맑은 숲길 따라 긴 종주 길을 걷는다. 이제 시작한 종주길 발걸음 속엔 종주길 끝나는 지점인 천왕봉에 마음 걸음이 벌써 닿아있다. 기대하며 인내하며 또는 즐겁게 걷는 산행길이다. 노고단, 피아골, 천왕봉을 가르는 피아골삼거리(1336m)이다. 오전 9시 30분이다. 9시 40분, 임걸령에 도착한다. 많은 산꾼들이 예서 쉬어간다.

임걸령 샘에서 시원한 물을 마시고, 참외 하나씩 먹고 쉰다. 산새소리 여전히 맑아라. 임걸령에서 계속되는 오르막길은 꽤 힘들다. 얼마동안 오르막길 이어지다가 완만한 흙길, 경사로 조금이어지다가 다시 경사 높은 오르막길에 몸은 땀으로 흠씬 젖는다. 노루목(1498m, 10:35)에 도착해 땀을 식히며 몸을 추스린다.

젊은이들이 키만큼이나 높은 배낭을 매고 늠름하게 걷고...우리도 뒤따른다...
▲ 지리산 종주길... 젊은이들이 키만큼이나 높은 배낭을 매고 늠름하게 걷고...우리도 뒤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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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주길인 만큼 남편의 배낭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짐이 무거워 짐도 줄이고 영양도 보충할 겸 참외와 자두를 먹는다. 온 길을 돌아보니 저기 노고단 정상이 맑은 이마를 드러낸다. 노고단에서 세석대피소까지는 그늘 진 숲길 따라 걷는 종주길이라면 세석에서 장터목, 천왕봉까지의 길은 햇별 길이다. 하지만 툭 트인 조망 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1시 25분, 삼도봉에 도착,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던 사람들과 간격이 많이 벌어졌나보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고요하다. 삼도봉에 올라앉아 휴식한다. 노고단이 역시 맑은 얼굴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앞쪽엔 칠불암계곡이 깊게 내려다보인다. 경남과 전라 남북도를 가르는 삼도봉에서 휴식하여 점심을 먹는다.

작년의 경험으로 봐서는 앞으로 이어질 화개재, 명심봉을 지나 연하천까지는 고난도의 오르막길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과연 지리산 종주는 체력전이다. 12시 10분, 이제 다시 출발한다. 바위투성이 좁은 길이 미끄럽다. 화개재로 가는 길이 240m, 폭 1.5m의 나무계단 내리막길을 한참동안 걷는다.

이 목재계단은 600개라고 했던가. 이 힘든 계단 길을 누가 세어보았을까. 대단도 하다. 내리막길이지만 반대로 이 계단을 걸어 올라온다면 헉헉대며 오를 것이다. 12시 30분, 화개재에 도착, 고요한 풍경 속에 풀벌레 소리, 맑은 새소리, 피어 지천인 들꽃들이 연두 빛 풀밭에 흐드러져 피었다. 오늘은 연하천대피소까지 간다. 연하천대피소까지는 여기서 4.2km나 아직 남아 있다.

멀기도 하여라. 이제 가장 힘든 코스가 남았다. 걸어오는 길에 삼도봉에서 일별했던 두 청년,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가 다시 쉬어가는 길에 만나 자연히 인사를 주고받는다. 많이 지쳐있는 그들에게 어디까지 가는지 물었더니 벽소령까지 간단다. 밤 기차를 타고 왔는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지쳐서 걷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험한 산길 이어진다...
▲ 끝없는 바윗길... 험한 산길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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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앞서 가다가 마음에 걸려 앉아 쉬며 청년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소시지 2개와 자두를 주었더니 고마워했다. 가다가 또 만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길, 그래도 힘없는 모습들이다. 다시 앉아 쉬다가 오이 하나를 주었다. 얼마쯤 가다가 그들의 모습을 보니 눈에 불을 켠 듯 환하게 밝아져 있어 우리 마음마저 환하게 밝아졌다.

기력이 좀 회복된 것 같다. 주는 기쁨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힘들게 지리산까지 가지고 온 두 개의 오이, 아직 입에 대지도 않는 나를 향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던 남편은 '오이 언제 먹어?!' 몇 번이고 하소연하듯 말하곤 했는데, 여기서 주는 기쁨과 짐을 하나 줄이는 기쁨을 얻으니 좋지 아니한가.

다시 완만한 흙길, 날은 어느새 흐려진다. 안부에서 잠시 휴식한다. 이젠 연하천까지 오르막길이다. 오르고 또 오르는 가파른 경사길 이어진다. 날은 완전 흐림. 어제 비온 뒤 젖은 길, 흙길은 질척이고 바윗길은 미끄럽다. 뒤에 오던 두 청년과 앉아 쉴 때마다 맞닥뜨리면서 옆에 누가 있는 듯 없는 듯 간격을 두고 걷는 종주길이다.

연하천대피소...즐거운 대피소 에피소드도 많다...제자들을 위해 부침개를 부치고 있는 모습...
▲ 지리산 종주... 연하천대피소...즐거운 대피소 에피소드도 많다...제자들을 위해 부침개를 부치고 있는 모습...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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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에서 첫 대피소인 연하천대피소까지의 대피소 간격이 가장 긴 것 같다. 멀기도 하여라. 오르막 한참 이어지다가 완만한 길, 또 오르막 계속된다. 지난 해 8월의 힘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작년만큼 그렇게 힘들어서 가는 도중에 주저앉아 버렸던 것처럼 힘들진 않지만 높은 경사 바윗길을 인내하며 힘들게 오른다.

오르막 바윗길 이어지다가 나무계단 가파른 길, 다시 돌계단 이런 식이다. 흙길이다. 다 왔을까 싶은데 또 다시 고개 하나 넘어 또 하나 넘는다. 거의 사투에 가까운 종주길이다. 토끼봉에서 내리막, 평지길, 오르막, 평지길, 오르막, 평지길, 다시 오르막길... 아으~비명이 터져나올 정도다. 체력전이고 사투에 가까운 지리산 종주길, 장난이 아니다.

한 마디로 난타전이다. 인내력을 시험하는 코스다. 몇 번이고 쉬고 다시 걷는다. 작년에 한 번 와 본 길인데도 처음인 듯 길은 난해하다. 또 다시 이어지는 오르막길에 입이 떡 벌어진다. 잠시 앉아 쉬는 동안 뒤따르던 청년들이 우릴 앞서간다. "가도 가도 끝도 없네요" 한 마디 던지고 머리를 흔들며 간다. 이 청년들도 지리산에 몇 번 왔다는데 처음인 듯 힘들어한다.

연하천대피소에 도착하니 오후 3시 20분이다. 몇몇 사람들이 대피소에서 쉬고 있다. 너무 이른 시간인 것 같기도 하지만 이번 지리산 종주는 느긋하게 잡았기에 여기서 남은 오후 시간을 보내려 한다. 힘들게 온 길이라 오자마자 휴식을 취한 뒤 이른 저녁밥을 지어서 먹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연하천대피소에 모여들더니 저녁 무렵이 되자 왁자해진다.

노고단에서 연하천대피소까지 7시간 20분(15.5km) 걸었던 하루였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25.5km이니까 천왕봉까지는 10km남짓 남았다. 이제 해가 진다. 연하천대피소 마당에 놓인 나무탁자 앞에 앉아서 라면을 끓여먹고 있는데 도착해서 보이지 않던 두 청년이 다가와 깍듯하게 인사하며 벽소령대피소까지 간다고 말한다.

많이 지쳤을 텐데, 함께 식사라도 하자고 했더니 기어코 사양하며 내쳐 간다. 잘 갔는지, 거기까지의 길도 만만치 않을 텐데 마음이 쓰인다. 학교 등산팀에서 왔다는 대여섯 명의 청년들과 선생님은 바로 옆 식탁에서 식사준비를 하고 있었다. 없는 것 빼고 다 가지고 온 등산 짐들이 눈길을 끈다.

식용유병, 후라이팬, 식칼, 부침가루... 한 살림 가득 지고 왔나보다. 식사하면서 옆 식탁들에게 오이냉국도 나눠주고 선생님이 제자들을 위해 직접 만든 국적불명의 부침개도 제자들의 입에 떠 넣어주고 나서 옆 식탁에도 돌려서 덕분에 맛있게 먹었다. 즐거운 식사장면이다.

구례에서 함께 차를 타고 왔던 두 남자도 우리 먼저 와서 밥을 다 먹고 쉬고 있다가 라면을 끓이는 우리 식탁에 날계란을 주어 더 맛있는 라면을 먹는 즐거움을 누렸다. 어떻게 지리산까지 날 계단을 다 가져올 생각을 했을까. 여하튼 별것 다 가져와서 요리를 하고 보는 사람들의 눈과 입을 즐겁게 하는 사람들로 인해 대피소에서의 시간은 즐겁다.

요즘같이 발달한 정보화시대에 지리산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무턱대로 올라온 두 아가씨, 컵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있는 것을 본 학생들을 대동하고 온 선생이 보고 한마디 한다. '밥을 안 먹고 컵라면을 먹고 있어요?' 하면서 제자들에게 '야, 밥 좀 더해!'하고 소리친다. '다이어트 하나 보죠 뭐!'하던 청년도 결국 밥을 더 하는 모양이다.

아가씨들한테도 부침개도 갖다 주고 나중에는 대피소 안에서 아가씨들이 쉬고 있는 것을 불러내 밥을 먹이곤 했다. 즐겁고 인정이 오가는 흥미진진한 대피소 풍경이다. 뚱뚱이와 홀쭉이의 컵라면팀, 후라이팬 팀, 압력밥솥팀, 나홀로 팀, 무더기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대피소, 여기저기서 대피소에 모여들었다. 밤 9시가 되자 소등한다.

연하천대피소에는 소등하고나면 작은 알전구 하나 없어서 거의 깜깜함 그 자체다. 소등은 되었지만 한참동안 부스럭거리는 소리, 전화소리. 소요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페트병을 베개 삼아 자는 바람에 빈 페트병이 내는 소리가 신경을 긁고, 어떤 이는 잠이 안온다고 옆 사람과 군시렁군시렁,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이리저리 돌아 눕는 소리,

어떤 이는 화음을 맞춰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아 깜깜한 어둠 속에서 불협화음을 이룬 소란스러운 오케스트라에 잠 못 이루는 밤. 한참을 뒤척이다가 설핏 잠이 들었나보다. 새벽 1시, 화장실 가기 위해 일어나 2층 침실에서 계단을 내려와 어림짐작으로 맨 끄트머리에 보이는 머리통을 만졌다.

남편에게 화장실 가자는 신호였다. "누구시죠?!" 아니 이건 남편의 목소리가 아니다. 어둠 속에서 당황해 하며 말도 못하고 있는데, 다시 목소리가 들려온다. "죄송합니다"하고 말한다. 남편 아닌 남편 옆에 누운 사람이었다. 어찌 할꼬 이 일을, 남편 머리통은 어디 있었던 거지? 분명 맨 끝에 있는 머리였는데, 무안하여라.

남편이 부스럭거리며 일어났다. 잔뜩 움츠리고 잠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화장실 가기 위해 더듬거리며 살며시 밖으로 나온 나는 방금 있었던 '사고'에 대해 얘기해 주었더니 남편도 우스운 모양이다. 어찌할까 이 큰 실수를... 민망해도 보통 민망한 게 아니다. 2층에 자는 내가 랜턴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건데, 남편한테서 거의 빼앗다시피 랜턴을 손에 쥐고 조심스럽게 실내로 들어섰다.

자는 사람들 방해될까봐 랜턴도 켜지 않고 더듬거리며 어둠 속에서 2층으로 올라가 다시 누웠다. 아침에 일어나서 남편 옆에 누운 사람 얼굴 어떻게 볼까. 이튿날 아침, 대피소 밖에 앉아 있다가 막 세수하고 올라오는 그 아저씨를 보고 어젠 정말 죄송하다고 했더니, '별 말씀을요!'하며 도리어  미안해 했다.

셋째 날(7월 2일), 연하천에서 세석까지

길은 험하고...갈수록 난해한 길...
▲ 지리산 종주... 길은 험하고...갈수록 난해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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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 연하천대피소에서 이제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쾌적한 아침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출발했고 우린 남아있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길 위에 선다. 차가운 아침공기가 상쾌하다. 연하천대피소에서 벽소령대피소까지의 거리는 3.6km, 벽소령에서 세석대피소까지는 6.3km, 총 9.9km를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하는 거리이다.

평지길 조금 이어지다가 봉우리 나타나고 오르막길 낑낑대며 걷다가 다시 내리막 바윗길을 걷는다. 조망바위(8:50)에 올라 앉아 휴식한다. 작년 8월에도 여기서 쉬었던 기억이 새롭다. 고개 넘고 또 넘어 바윗길의 연속이다. 오르막 바윗길이 꽤 힘들다.

종주길이 마치 처음인 듯 오르막 내리막 체력을 금방 소진시키는 난코스의 연속 가운데 우리는 이런 길이 있었던가 하며 의아해 하기도 한다. 형제봉 바로 위에 있는 조망바위에 잠시 휴식, 천왕봉, 벽소령대피소가 멀리 조망된다. 연하천대피소에서 잠들 때 옆 짝지로 있었던 나 홀로 산행을 감행한 대구 아가씨, 우리보다 앞서 출발했는데 여기서 맞닥뜨린다.

반색을 하며 인사하는 아가씨, 참 맑다. 3년 전에 처음으로 지리산을 올랐고, 나이가 더 들면 혼자서 지리산을 못 올 것 같아 미친 척하고 올라왔다고 했던 아가씨, 오는 길에 동행했다는 젊은 남자와 중년남자, 셋이서 조망바위에 와 있다. 그들이 먼저 출발한 뒤, 우리도 이어서 출발한다. 바윗길은 험하고 미끄러워 반쯤 기다시피 더듬거리며 간다.

새삼스럽게 험준한 지리산을 실감한다. 오전 9시 30분, 형제봉 도착, 시원 상쾌한 바람이 높은 형제봉 바위 양 틈으로 드나든다. 여기서 노고단까지는 12.6km, 벽소령대피소 1.5km, 세석대피소 7.8km, 장터목대피소 11.2km의 거리이다. 오르락 내리락, 바윗길 미끄러운 길을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바윗길이라 도무지 속력이 나지 않는 길을 겸허한 마음으로 기도하듯 한발 한발 내딛는다. 발목이라도 삐기라도 하면 정말 힘들어질 것이 뻔하다. 조망바위에 높이 올라앉아 있으니 사람 모습 보이지 않고 앞에서 뒤에서 도란도란 얘기소리만이 사람들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서울서 왔다는 어르신들...저 멀리 천왕봉 위치를 살피고...
▲ 지리산 종주... 서울서 왔다는 어르신들...저 멀리 천왕봉 위치를 살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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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 35분, 벽소령대피소에 도착, 우리가 도착하자 이미 쉬었던 사람들 출발하고 몇 사람 앉아 있다가 그들마저 가 버린 뒤, 한산한 벽소령에 앉아 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커피까지 챙겨 마시고 있으니 갑자기 하늘이 수상하다. 먹구름이 몰려와 맑은 하늘을 뒤덮기 시작한다. 서둘러야 한다. 11시 30분, 몰려오는 안개가 곧 빗방울이 떨어질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는 듯하다.

급해지는 걸음. 좁은 평지 길을 가볍고도 재빠르게 속력을 낸다. 평지길 이어지다가 오르막길 계속된다. 우리보다 먼저 간 사람들을 따라잡는다. '벌써 왔어요?'하고 놀라는 사람들, 벌떡 일어나 앞서 간 뒤 우린 잠시 휴식한다. 안부에 잠시 쉬고 있으니 햇살이 슬쩍 나왔다가 다시 먹구름이 덮는다. 얼마나 빨리 걸었을까, 이번에는 속력을 좀 낸 것 같다.

선비샘에 도착하니 12시 25분, 앞에 간 사람들을 여기서 만난다. 세석대피소까지는 3.9km가 아직 남아있다. 여전히 바윗길 이어지고 푹 내려갔다가 다시 높았다가 하는 경사 높은 길이 이어진다. 땀에 젖은 몸, 바위에 앉아 쉬다 가다 한다. 아직도 먼 길이다. 지나가는 젊은 아가씨들 중 한 명이 독백처럼 쏟아내는 말, "내가 미쳤지, 왜 왔을까. 미쳤지 미쳤어!"하고 간다.

절벽타기에 가까운 바윗길들이 연속해서 이어진다. 손으로 짚고 가다가 로프 타고 올라가다가... 지친다 지쳐, 너무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다. 조망바위에 도착, 1시 25분이다. 서울서 왔다는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이 뒤에서 앞에서 함께 걷다가 조망바위에서 함께 쉰다.

천왕봉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구름이 슬며시 걷히고 조망이 드러나자 어르신들은 일제히 천왕봉을 향해 서서 바라본다. 그 중 한 분은 '멀고 멀다. 집으로 갈란다'고 한다. '집에 가는 길이 더 멀어요'하고 말했더니, 옆에 분이 '무조건 가야 돼' 하고 말하고, 이어서 거드는 남편, '돌격, 앞으로!'하고 말한다.

그 어르신 껄껄 웃으며 '이런 걸 바로 진퇴양난이라고 한다'며 일행들 뒤에 따라 간다. 친구들끼리 온 듯 하다. 대단하다 그 나이에도 종주를 다 하시고. 계속해서 어르신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다. 오르락 내리락 정말 힘든 길이다. 험한 지리산 종주길. 작년에는 처음으로 종주했던 터라 정신없이 걸어 이런 걸 제대로 실감 못했나 보다.

어린 아이들과 체력이 별로 없는 사람들에겐 정말 무리한 산행길이 아닐 수 없다. 영신봉으로 올라가는 길에서부터 비가 많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영신봉 정상에 오르자 쏟아지는 소낙비, 가방에서 우의를 꺼내 입고 걷는다. 먼 하늘에서 뇌성이 운다. 우의를 입었건만 쏟아지는 비에 무릎 위에까지 바지가 다 젖고 신발도 신발 속 양말도 다 젖는다.

비에 젖는 세석대피소...
▲ 지리산 종주... 비에 젖는 세석대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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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석대피소에 도착, 오후 3시 정각이다. 날씨가 정말 수상하다. 세석대피소에 도착하자 소나기가 갑자기 그친다.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비는 잠시 후 폭우로 쏟아진다. 뒤에 오던 어르신들은 잠시 비를 피해 서 있다가 장터목까지 내쳐 걷는다. 모두들 우의를 입었건만 한 분은 준비를 안 해온 듯 우의 없이 빗속을 걸어간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빗속을 가는 사람들도 있다. 장터목까지 예약하지 않고 이번엔 세석에 예약했는데 잘 한 것 같다. 장터목대피소에 예약해 놓았던 사람들도 더러는 여기서 머문다. 조금 있으니 천둥이 우르르 꽝~ 하늘을 흔들고 번개가 번쩍~또다시 우르르 꽝! 소리에 나는 그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비는 계속 쏟아진다. 6시 15분, 갑자기 쏟아지던 비가 멈추고 하늘이 맑게, 아주 맑게 열린다.

햇빛이 쨍하고 빛나고 흰 구름이 푸른 하늘에 눈부시게 뜬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시침 뚝 떼고 맑게 갠 얼굴을 하고서. 젖은 숲길을 산책하고 다시 안에 들어와 잡지를 읽다가 맨 마지막엔 성경 몇 장 읽고 난 뒤 잠이 든다.

넷째 날(7월 3일), 세석에서 천왕봉을 거쳐 중산리까지

촛대봉에서 내려다 본 세석평전...세석대피소...
▲ 지리산... 촛대봉에서 내려다 본 세석평전...세석대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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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일컬어 서산대사 휴정은 "웅장하나 수려함은 떨어진다"고 평했다 했던가. 그러나 지리산은 수려하진 않아도 '반역조차도 기꺼이 끌어안는 한없는 모성을 가졌다'고 혹자는 말했다. 지난 해 처음으로 지리산을 종주산행하고 다시 종주하면서 새삼스레 느끼는 것은 지리산이 험준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어느 한 곳도 쉬운 길이 없는 지리산 종주길, 한 번 와본 까닭에 그동안에 단련된 체력이나 걸음에 쉬운 것도 있겠으나, 보지 못했던 지리산의 면면을 다시 보았던 이번 종주산행이었다 해야 할 것이다. 지리산... 둘레만 자그마치 8백리에 달하는 이 크고도 큰 산은 해발 1400m가 넘는 봉우리만도 20여 개를 넘게 거느리고 있는 산이다.

촛대봉에서 저 멀리 영신봉을 뒤로하고...
▲ 지리산 종주... 촛대봉에서 저 멀리 영신봉을 뒤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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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일찍 일어나 기도와 말씀 읽으며 하루를 연다. 맑게 갠 아침, 오전 7시 30분, 세석대피소를 뒤로하고 세석평전 길을 오른다. 새벽이슬을 맞은 것일까. 젖은 풀잎이 싱그럽다. 세석대피소에서 촛대봉까지 가는 길도 몸이 지쳐 있어서인지 꽤 힘든 오르막길이다.

촛대봉에 도착하니 오전 7시 55분, 맑게 갠 아침의 세석평전과 대피소 풍경은 고요하고 깨끗하다. 촛대봉 위에 올라 상쾌한 아침 공기 속에 앉았다. 촛대봉(1703m)에서 세석대피소까지는 0.7km, 천왕봉까지는 4.4km가 남아있다. 장터목대피소까지는 2.7km이다.

정말이지 지리산 종주 길은 멀고도 먼 데다 험하구나. 또 걸어야지, 왜 이렇게 걷고 있는 것일까. 며칠동안 나는 산에 있다. 걷고 또 걷는 지리산 능선 길, 천왕봉이 가까이 있는 듯 앞에 조망되고 천왕봉을 앞에 보며 걷는다. 오르락내리락 바윗길 계속이어지고 금방 뱃속이 허전해진다.

맑게 갠 하늘 아래 지리산 종주길...
▲ 지리산 종주... 맑게 갠 하늘 아래 지리산 종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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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오르막 경사로를 올랐다 내렸다 하다보면 체력은 금방 소진된다. 걸음걸음마다 쉬운 길이 없는 난코스의 연속, 8시 5분, 암봉 위에 올라앉아 쉰다. 곧 연하봉에 도착(1730m), 9시 10분이다. 장터목대피소까지는 800m 남았다. 꽤 많이 왔나보다.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하니 오전 9시 25분, 어젯밤에는 많은 이들이 여기서 묵어갔겠지.

장터목대피소에 잠시 휴식하는 동안 수상한 날씨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직원에게 물어본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날씨일 것이라 한다. 어제 갑작스럽게 쏟아졌던 비... 마음이 바빠진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힘들게 종주했던 남편은 지쳐서 좀더 쉬어가고 싶어 했지만 내가 재촉해 출발한다. 그 많던 양식도 거의 다 동이 나고 참외 한 개 남은 것과 소시지 2개를 마저 먹은 뒤, 쵸코파이 2개를 대피소에서 구매해 먹고 출발한다. 오전 9시 50분이다.

장터목에서 제석봉으로 올라가는 높은 바위 경사로는 한걸음 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먹구름이 뒤덮고 안개에 가려진 제석봉 오르막길... 첫날에 버스에서부터 동행했던 두 남자 여기서 잠시 일별하고 간다. 숨 가쁘게 그러나 걸음에 탄력이 붙지 않아 힘들게 바윗길 따라 오른다. 10시 10분, 제석봉이다.

화면지움... 안개에 가려 바로 앞의 산도 보이지 않는다. 고요한 가운데 짙은 안개에 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을 다시 걷는다. 험한 바윗길 투성이다. 10시 35분, 통천문 통과, 여전히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이다. 10시 55분, 천왕봉 정상, 흐린 날씨 탓에 아무것도 조망되지 않는다.

천왕봉 정상에서...날은 이미 흐려졌고 주변 경관은 보이지 않는다...
▲ 지리산 종주... 천왕봉 정상에서...날은 이미 흐려졌고 주변 경관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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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맑아지는 듯 하더니 다시 흐리고, 안개에 가려니 천왕봉 정상에서 잠시 휴식, 몸이 많이 지쳐있다. 잠시 후 한 사람 또 한 사람 천왕봉 정상에 올라오는 사람들, 중산리에서부터 오는 사람들이다. 나이가 좀 많아 보이는 남자분이 천왕봉 정상에 혼자 올라오더니 정상에 발을 딛자마자 "반갑다 천왕봉아! 반갑다, 정말 반갑다!"고 소리친다.

지리산은 한 500번은 족히 올라왔는데 한동안 뜸했더니 지리산이 다시 보고 싶어서 달려온 길이라 한다. 묻지도 않았는데 지리산 칠선계곡이 정말 좋다고 '너무너무'좋다고 힘주어서 말하더니 꼭 한 번 가보라고 권한 뒤 장터목쪽으로 내려간다.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보이는 모습이다. 11시 5분, 하산한다.

순두류로 하산하는 길...계곡에서...
▲ 지리산... 순두류로 하산하는 길...계곡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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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한 귀퉁이 창이 열리나 싶더니 먹구름이 다시 뒤덮고 천왕봉에서 바로 밑, 가파른 바윗길을 따라 하산한다. 바위 경사길 한참 더듬더듬 내려가다가 바윗길, 철 계단, 나무난간... 비탈길 따라 걷는다. 끝없는 바윗길이다. 점점 하늘이 다시 맑아지고, 개선문 앞에 이르자 하늘은 완전 맑은, 하 수상한 지리산의 6월이여.

개선문(11:40)에 도착, 잠시 휴식 후 출발한다. 반짝하고 맑아졌던 하늘은 하산 길에 다시 구름으로 뒤덮고 우린 안개에 싸여 숲길을 걷는다. 가끔, 아주 가끔 나타나는 짧은 흙길은 참으로 반갑다. 하산 길에서 천왕봉을 향해 등산에 오른 많은 사람들과 맞닥뜨린다. 안개 속을 걷고 걸어 힘들게 도착한 로타리대피소, 12시 30분이다.

계곡 물소리가 환하다. 로터리대피소에서 1시간 남짓 계곡 길을 따라 내려가면 법계사 셔틀버스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두 시간은 더 걸릴 중산리로 내려가는 길 대신 한 번도 가지 않은 길로 내려가기로 한다. 몰랐던 길이다. 로터리 대피소 바깥뜰에 앉아서 힘들게 걸어와서 먹는 지리산에서의 마지막 점심, 라면은 꿀보다 더 달다.

여러 명의 아줌마들이 우르르 계곡에서 올라와 자리를 차지하고 곧 도시락을 펼쳐놓고 두런두런 얘기 나누며 점심을 먹는가 싶더니 우리가 하산 하는 계곡 길로 한 두 사람씩 내려 걷기 시작했다. 로터리대피소까지가 그들의 목적지인 셈이었다. 이제 꿀맛보다 더 달게 라면을 끓여먹고 커피까지 마신 뒤 하산한다. 낮 1시 20분이다.

로터리대피소 바로 아래 계곡 길을 따라 걷는다. 낯설음은 약간의 경계와 긴장을 가져온다. 어떻게 진행되는 길인지 궁금하다. 비온 뒤 미끄러운 바윗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린 것일까. 맨들맨들 바위들이 지천인 너덜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걷는 길 따라 점점 환해지는 계곡 물 흐르는 소리, 갈수록 크고 우렁차게 들려온다.

잠시 앉아 휴식, 로터리대피소에서 700m를 걸어온 거리쯤이다. 순두류까지는 2.1km이다. 끊임없이 흐르는 계곡 물소리에 지친 걸음이 힘을 얻는다. 숲을 뒤흔드는 계곡 물소리 옆에 끼고 걷는 하산 길, 어느 지점에서는 폭포가 되어 떨어지기도 해 하산길이 흥겹다.

한참 이어지는 하산 길, 물줄기 줄어드는가싶더니 조릿대길 한동안 이어지다가 다시 힘찬 계곡 물소리와 만난다. 바로 옆에서 흘러내리는 계곡 물을 끼고 출렁다리 세 개를 건너고 조릿대길, 흙길 있어 편한 길에선 마음도 포근해진다. 세 번째 출렁다리 건넌 후 조금 더 걸어가다 보니 낙엽 쌓인 푹신한 넓은 숲길이 나온다.

산머루가 열리고 어름나무가 있는 길이다. 길이 끊기며 시멘트 길 도로 앞에 법계사 셔틀버스가 서 있다. 차는 금방 출발하지 않고 한 차 가득 사람이 탈 때까지 기다린다. 방금 내려오면서 보았던 119차와 국립공원 차를 보며 사고가 난 것을 예감하고 국립공원 직원에게 물었다. 누군가 하산하다가 다쳤다 한다.

좀 있으니 로터리대피소에서 만났던 아줌마들이 한꺼번에 내려온다. 그들 일행 중 한 사람이 바위에 미끄러져 넘어졌는데 일어나지를 못했다 한다. 한 차 가득 태운 셔틀버스는 출발, 꼬불꼬불 경사 길을 한참동안 내려가니 중산리탐방지원센터 앞에 도착한다. 우린 다시 걸어서 중산리 버스정류장까지 내려와 진주행 버스에 올랐다.

오후 3시 45분, 곧 버스에 승차, 진주로 간다. 진주에서 하동, 하동에서 구례... 거기 우리 차가 있다. 기나긴 여정이다. 진주까지 1시간 10분, 5시 도착, 5시 30분발 하동행 버스를 타고 진교 거쳐 하동, 6시 45분 하동버스터미널 도착, 7시 30분에 출발하는 구례행 버스를 타고 구례에 도착하니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다.

에필로그

'저마다의 인생 여정은 그 핵심을 보면 순례다. 보이지 않는 성지를 지나는 사이에 우리의 영혼은 넓어지고 부요해진다. - 존 호도너 휴 -

이번 지리산 종주 길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과 잠시 일별하거나 지리산 종주 길에서 가끔 혹은 자주 맞닥뜨리며 걸었다. 맨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사람들은 연하천대피소에서 만났던 '나 홀로' 산행을 감행하고 올라온 대구아가씨와 두 남자였는데, 진주에서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구례 버스정류장에서 노고단까지의 인연이 있는가 하면 구례에서 장터목대피소까지의 인연도 있고 연하천대피소에서 중산리, 그리고 진주까지 무심한 듯,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오며가며 보면서 동행한 사람도 있고, 연하천에서 만났다가 연하천에서 헤어진 사람들도 있다. 삼도봉에서 연하천대피소까지의 만남도 있고... 참으로 다양한 만남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그들 중 어떤 이들과 가까워진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아닌 담담하게, 조금은 무신경하게, 각자의 종주 길에 방해되지 않게 종주길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많이 와 보진 않았지만 몇 번이고 올라왔던 지리산 등반길에서 예전에 지리산에서 만났던 사람들 중 그 어떤 사람도 다시 만나는 일은 아직까지 없었다.

이 나이쯤 되면 낯선 사람도 어디선가 한 번쯤은 본 듯 해 보이나보다. 처음 보는 얼굴들도 어디선가 한번은 본 듯해 보이니 말이다. 이번 산행에선 종주 길에서 혹은 대피소에서마다 에피소드가 많았던 산행이었던 것 같다. 나홀로 산행팀, 컵라면팀, 후라이팬팀, 압력밥솥님, 가볍게 짠돌이 산행팀... 돌아와 생각해보아도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즐거운 에피소드가 많았던 지리산 종주산행이었다.

아울러, 우리나라 국립공원 중 가장 큰 지리산의 등산로의 험준함, 지리산의 웅장함을 새롭게 절감했던 종주산행이었던 것 같다. 우연히 이번 종주산행이 결혼기념일이 끼어 결혼기념일 특별 지리산 종주산행이라고 이름 하였다. 특별한 날, 특별한 추억으로 남을 우리들의 이야기가 있는 지리산 종주산행. 감사하게도 무사히, 아무 사고 없이  마칠 수 있었다.

산행수첩
첫째 날, 2009년 6월 30일(화), 비, 산행시간 45분
성삼재(오후 4시 35분)-노고단 대피소(5:20)
1. 교통:남양산 IC(11:30)-서순천IC(2:05)-구례읍(2:40)
2. 특징:①노고단대피소:(1박 7,000원), 저녁 9시 소등, 쓰레기통 있음. ②성삼재 탐방지원센터 1110m, 노고단 대피소 1380m, 노고단 산책로-전망대 있음

둘째 날, 2009년 7월 1일(수)맑은 뒤 흐림:7시간 20분
진행:노고단대피소(8:00)-노고단고개(8:10)-피아골삼거리(1336m,9:30)-임걸령(1320m,9:40)-노루목(1498m,10:35)-삼도봉(11:25, 1550m)-점심식사후 출발(12:10)-화개재(12:30)-연하천대피소(3:20)

셋째 날, 2009년 7월 2일:맑은 뒤 소낙비, 천둥번개: 7시간
진행: 연하천대피소(8:00)-형제봉 위 조망바위(천왕봉, 벽소령대피소 조망)-형제봉(9:30)-벼고령대피소(1340m, 10:35)-식사 후 출발(11:30)-선비샘(12:25)-영신봉-세석대피소(3:00)

넷째 날, 2009년 7월 3일, 맑은 뒤 흐림, 안개: 7시간 50분
진행: 세석대피소(7:30)-촛대봉(7:55, 1703m)-연하봉(1730m, 9:10)-장터목대피소(9:25)-장터목대피소 출발(9:50)-제석봉(1808m, 10:10)-통천문(10:35)-천왕봉(1915m, 10:55)-하산(11:05)-개선문(11:40)-로타리대피소(12:30)-점심식사 후 하산(1:20)-광덕사교(1:50)-순두류(2:40)-중산리탐방지원센터(3:20)

중산리 버스 정류장(3:50)-진주(5:00): 5,100원
진주(5:30)-하동(6:45): 4,500원
하동(7:30)-구례(8:10): 3,600원



태그:#지리산, #종주산행, #노고단 성삼재 , #장터목 세석 , #천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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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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