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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웅 전 독립기념관장.
 김상웅 전 독립기념관장.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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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오랫동안 친일문제를 연구해온 재야 사학자이자, 대한매일(서울신문) 주필을 지낸 언론인이자, 성균관대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친 정치학자이다. 그에게 따라다니는 또 다른 호칭이 있다. 바로 '평전(評傳)의 대가'라는 칭호이다.

그는 사학자로서 <친일정치 100년사> 등 30권의 책을 냈는데 그중 9권이 평전이다. 박열, 백범 김구, 단재 신채호, 만해 한용운, 심산 김창숙, 녹두 전봉준, 약산 김원봉, 안중근, 장준하 등이 그가 쓴 평전 제목 앞에 나오는 사람들이다. 올해 가을에는 열 번째로 <죽산 조봉암 평전>을 낼 예정이다.

'평전의 대가'인 그가 또 하나의 평전을 상재(上梓)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실제로 그는 원고지에 펜으로 쓴다). 이번에는 살아 있는 인물의 평전이다. 그것도 한국 현대사에서 그만큼 호오(好惡)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정치인이 있을까 싶은 인물, 바로 후광 김대중에 대한 평전이다. 그래서 더 흥미진진하다. 6월에 나온 <장준하 평전>처럼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뒤에 이를 2권의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그는 '후광 김대중 평전'의 첫 장에서 김대중을 조선왕조 시대의 송시열에 비유했다. 김대중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그를 존경하는 측에서는 '송자'(宋子)라는 경칭으로 부르고, 반대하는 측에서는 '송자'(宋者)라는 별칭을 썼던 송시열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가 후자의 사례를 이렇게 제시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에 극단적인 보수·수구 인사들 사이에서는 술좌석에서 '박정희와 전두환이 다 잘하였는데 딱 한 가지 잘못한 일이 있다'라는 술안주깜 험담이 나돌았다고 한다. 그것은 '김대중이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란다. 김대중을 죽이지 않아서 정권을 빼앗기게 되고 자기들이 '찬밥' 신세가 되었다는 증오와 푸념이었다.

그만큼 김대중의 존재는 한국의 보수·수구세력에는 증오·멸살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정서'에서 숱한 투옥, 연금, 납치살해 기도, 사법살인 시도, 언론의 왜곡보도 등이 자행되었고, 그를 향한 '총구'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버텨냈고,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가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은 이런 것이다.

"김대중은 분단과 정부수립 반세기 만에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고, 북한 지도자와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평화체제를 선언하고,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식민통치를 조기에 종식시켰다. 정치적 민주주의, 권위주의 해체, 정보화강국, 국가인권위원회 설치, 여성권익 향상, 국민기초생활보장제 등이 업적으로 열거되기도 한다. 그리고 미국과의 종속관계의 저울추를 수평 쪽으로 '약간' 옮겨 놓은 일이나,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한국의 '국격'(國格)을 높였다는 평가도 따른다. '한류' 열풍도 그의 문화정책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지금도 김대중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다. 일찍이 강준만 교수(전북대 신문방송학)가 적어도 십수 년간 한국정치와 관련하여 가장 두드러진 음모는 바로 '김대중 죽이기'라면서 "집단적인 탐욕과 음모와 무지와 위선과 기만에 희생된, 앞으로도 희생이 될 수 있는 인물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김대중이다"고 썼지만 '김대중 죽이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것이 그가 '살아 있는 김대중 평전'을 쓰기로 한 배경이다.

"우리 속담에 '관에 못을 박기 전에는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는 말도 전한다. 그럼에도 김대중 평전을 시도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민주정부'의 동지이자 후임 대통령인 노무현의 '죽임당한 자결', 그리고 김대중이 이루고자 했던 꿈과 이룬 업적이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는 터에, 그의 인성과 생애, 정책과 실천과정, 국가적 아젠다와 비전, 그리고 그의 한계와 문제점 등을 점검하고 분석해 보고자 함이다."

현대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자, 그것도 현실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살아 있는 인물에 대한 평전을 쓰느라 붓을 벼르고 있는 그를 지난달 25일 자택에서 만났다.

"김대중 죽고 나면 그때야 정말로 큰 빚 지고 있다는 사실 깨닫게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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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이라는 살아 있는 인물에 대한 평전을 쓰기로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
"오래전부터 DJ에 대한 평전을 써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30년 전부터 자료를 수집해 왔다. 그러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진보개혁세력이 보수수구세력으로부터 부당하게 탄압당하고, 민주정부 10년 동안 추구해온 가치가 훼손되고, 거의 20년 전의 군부독재시절로 회귀 되는 시점에서 '행동하는 양심'을 촉구한 DJ 자택 주변에서 보수수구세력들이 규탄대회를 하고 보수수구언론이 나서 DJ를 음해하는 등 '김대중 죽이기'가 재연되는 것을 보면서 DJ의 살아온 과정과 추구해온 가치, 그리고 진면목을 국민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 보수언론의 DJ에 대한 비판이 특히 어떤 점에서 부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우리 헌법 전문을 보면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해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라고 평화적 통일을 추구하는 것이 대한민국 정체성으로 돼 있다. 더불어 헌법 66조 3항에는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고 명시돼 있고 69조에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을 대통령이 선서하도록 돼 있고 이명박 대통령도 그렇게 했다. 더불어 국회의원들도 당선 후 임기 초에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노력하며'라고 선서한다.

이처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은 대한민국 헌법이 추구하는 핵심가치이고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은 헌법 정신에 따라 남북화해협력을 통한 평화적 통일을 추구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 와서 이를 좌파로 모는 데 수구 족벌 신문들이 앞장서고 있는데, 그들은 엄격히 말해 김대중-노무현 정책에 대한 반대가 아니고 대한민국 헌법과 정체성에 대한 파괴이자 도전이다. 그래서 헌법 정신에 대한 그네들의 무지를 깨려고 하는 것이다."

- 그래도 김대중은 집권해 대통령까지 하지 않았나.
"한국 사회에서 개혁과 진보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대부분 타살되거나 자살을 했다. 신라의 장보고, 고려의 묘청과 정지상, 조선왕조의 조광조와 전봉준, 해방 이후 김구, 여운형, 조봉암, 장준하, 그리고 노무현에 이르기까지 보수의 '칼날'과 '총구' 앞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렸으나 그 바퀴에 깔리고 말았다. 그런데 DJ는 유일하게 살아남아서 정권교체까지 이뤘다. 그가 과연 투철한 개혁·진보주의자인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개혁 진보가 용납되지 않는 역사 풍토에서 살아남아 집권까지 한 것은 특이할 만한 현상이다."

- 그런 풍토에서 김대중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그런 의미에서 김대중은 한국정치 판에서는 특이한 존재이다. 그는 제6대 국회의원 때부터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아울러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현실정치에 접근하면서 이상주의와 실용주의의 가치관을 접목시키고 활용해 왔다. 이것이 그가 혹독한 권력의 탄압과 저주에 가까운 보수언론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철학이고 비결이었다."

- 어떤 방식으로 이상주의와 실용주의의 가치관을 접목시켰다는 것인가.
"역사적으로 진보 개혁주의자들은 이상주의적인 측면이 강했다. 이에 비해 김대중은 이상주의적 측면과 실용주의의 양면을 겸비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실용주의'를 들고 나오면서 이 용어의 의미가 크게 변질되었만, 여기서 말하는 실용주의는 미국의 고유한 사회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을 말한다.

DJ는  군사독재 시대에 극심한 탄압을 받으면서 비반미·비용공·비폭력 이른바 '삼비(三非) 정책'을 표방했다. DJ는 비반미적 민족자주, 비용공적 평화통일, 비폭력적 민주회복론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을 강조할 만큼, 그는 '비반미적 민족주의자'인 셈이다.

DJ는 또 70년대 초기부터 4대국보장론과 북한 유엔가입론 등 한반도 문제해결의 다원성을 제시하면서도, 도쿄 납치 당시 미국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노선이 '반미'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을 선고 받을 때에도 용공이나 폭력행사 등 어디에서도 '내란음모'의 빌미를 주지 않았는데, 이런 비용공, 비폭력주의도 살아남게 된 배경이다. DJ는 1973년 납치당하기 전 미국 망명시절에 교포인 최석남 예비역 장군 등이 미국에 '망명정부'를 수립하자는 주장을 단호히 배격하면서 '대한민국 수호 독재정권 반대'를 다짐했었다. 그는 교포 지도자들에게 '선민주화 후통일'의 원칙을 분명히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DJ가 추구해온 남북화해협력과 3단계 통일론, 70년대부터 추구한 4대국 보장론이 지금 6자회담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런 것들이 독재정권과 보수수구언론에 의해 상당히 왜곡돼 있다."

그러면서 그는 1963년부터 1984년까지 <뉴스위크> 동경특파원을 하면서 주은래·박정희·김일성·히로히토·전두환·김영삼·김대중 등 아시아 주요 지도자를 인터뷰했던 아시아문제 전문기자 버나드 크리셔(B. Krisher)의 다음과 같은 평가를 예로 들었다.

"김대중씨가 죽고 나면 한국인들은 그때 가서야 김대중씨에게 정말로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김대중, 그의 일관된 철학과 신조는 '행동하는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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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도 DJ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며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를 어떻게 보나.
"평전을 집필하면서 최근 DJ에게 인터뷰를 요청해 '대통령의 가치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랬더니 '행동하는 양심,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이렇게 얘기를 했다. 이명박 정권이 DJ의 발언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데 이처럼 과거 정치할 때부터 늘 해온 얘기이고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미국 망명 시절 낸 책 제목도 '행동하는 양심'이었고, 3.1민주구국 사건의 상고이유서 제목도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였다. 세계평화에 기여한 102인과 함께 중국 뤼순 평화공원에 세워진 김대중의 동상에는 '행동하는 양심으로'라는 그의 좌우명이 새겨졌다. 그의 일관된 철학과 신조는 '행동하는 양심'이다."

그는 그러나 "김대중은 '과격 이미지'와는 달리 대단히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다"고 강조했다. 그가 정의한 김대중의 인간형은 '대지소심형'(大志小心型)이다. 즉, 뜻이 크면서도 작은 일도 소홀히 하지 않는 완벽주의자라는 의미이다.

"본인도 어릴 때는 겁이 많아 변소(화장실)도 혼자서 못 가고, 학창 시절에도 누구를 한 번 때린 적도 없었고, 수차례 감옥을 갔지만 갈 때마다 두려워할 만큼 겁이 많고 소심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대의를 위해서는 항상 행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고, 이번에 노무현 서거 때도 500만 명이 조문을 했는데 그중의 10분의 1만 나섰으면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와 언론의 왜곡보도를 비판하고 시정했더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

그런데 기록을 보니 3.1 구국선언 사건 때도 법정에서 똑같은 말을 했더라. 3권분립의 우리나라 헌법을 박정희씨가 하루아침에 유신쿠데타로 짓밟고 1인 독재체제를 만들었는데 국민과 지식인들이 저항하고 바로잡았더라면 긴급조치나 탄압에 수많은 학생과 노동자들이 희생되는 이런 일이 없지 않겠는가라고. 이처럼 지식인의 현실참여와 주권자의 권리 주장에 대한 DJ의 확고한 인식과 철학은 일회용이 아니다."

그는 "하지만 그에게는 정치적ㆍ정책적ㆍ성격적인 독선ㆍ아집ㆍ오류도 적지 않았다"면서 그의 부정적인 면도 집중 조명할 것임을 강조했다.


- 김대중의 부정적인 유산으로는 무엇을 들 수 있나.

"그의 책임만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1987년 야권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군사정권 5년을 연장시킨 일이나, 잦은 정당의 창당과 제왕적 정당 운영에 대한 비판이 따른다. 그의 집권기에 민주주의를 짓밟고 인권을 유린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용공으로 몰아 고문하고, 전혀 반성하지 않는 전두환·노태우 등 '민주반역자'들과 부패공직자·기업인들을 용서와 화해의 명분으로 사면하고 묻어버린, '원칙 없는 온정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지도자의 '정치적 관용'이 반민족·반민주세력의 뿌리를 온존시킴으로써 이들이 다시 민족정기와 사회정의를 짓밟고, 정의와 진리의 가치를 전도시키게 한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사인의 관용정신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공인의 관용 특히 최고 지도자의 분별없는 관용은 자칫 역사와 현실의 진위·정사를 뒤바꾸게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군사독재에 참여한 인사들과 냉전주의자들을 정부 요직에 기용한 일이나, 미온적인 독재잔재청산, 현직 대통령으로서 독재자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맡은 것을 두고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고통받았던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이 따랐다. 또한 자신이 그토록 피해를 겪고 아픔을 느꼈으며 한국사회의 고질이 되다시피한 지역갈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별로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지적도 따른다.

또 아들들을 포함하여 친인척 관리에 엄격성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수많은 국민의 희생을 치른 터전 위에서 이루어진 수평적 정권교체의 가치를 훼손시킨 일 등은 김대중 자신과 '국민의 정부'의 도덕성에 심한 상처를 남긴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김대중의 '비폭력주의'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DJ는 박정희로부터 숱한 탄압을 받았지만 박정희 암살 당시 제일성이 '암살로 얻은 민주주의는 참된 민주주의가 아니다'였고 '항간에서는 김재규 부장이야말로 이 나라에 민주주의의 길을 다시 연 영웅이라고들 하는 데 당치 않는 말'이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요약하면,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가져오게 된 보수세력의 공격과,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추구해온 가치들이 도전받고 뿌리째 뽑혀가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보수세력과 수구언론으로부터 훼손된 DJ의 본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인물에 대한 평전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의 잘못에 대해서는 사정없이 날을 세울 것"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김대중 평전'을 쓰기위해 발굴한 미공개 자료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김대중 평전'을 쓰기위해 발굴한 미공개 자료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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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 있는 인물이다 보니 평전을 쓰는 동안 일정 부분 교감이 필요할 것 같은데 DJ와 사전 교감이나 반응이 있었나?
"그동안 제가 쓴 평전을 계속 드려왔는데 이번에는 본인의 평전을 2권으로 쓰겠다고 했더니 묵묵부답이더라. 물론 그분 입장에서 쓰라, 마라고 할 수도 없지만, 다만 본인이 지금 자서전을 준비 중인데 평전은 언제쯤 나오느냐고 묻더라. 그래서 제가 '자칫 팩트에 착오가 있을 것 같아서 원래는 대통령님 자서전이 나온 다음에 평전을 쓸 계획이었는데 97년에 나온 자서전도 있고 또 일본 NHK에 출연해 5시간 방영된 그런 자료도 있고 해서 지금 쓰기로 했다'고 말씀 드렸더니 별다른 말씀 없이 고개만 끄덕이더라."

- 살아 있는 인물의 평전을 쓰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나?
"특히 DJ처럼 이념과 지역에 따라서 호불호가 특히 확고한 사람은 다소 부담스럽지만, 외국에서는 살아 있는 인물에 대한 평전이 나온 게 꽤 있다. 또 우리나라도 이영희 선생에 대한 평전이 나온 게 있다. 평전이라는 것이 생과 사의 울타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얼마만큼 팩트를 정확히 제시하느냐가 관건이다. 또 전기와 달리 작가의 주관이 개입한 것이 평전이기에 내가 지켜본 인물과 철학을 토대로 사실대로 쓰면 되는 것이다. 그동안 9명에 대해 평전을 썼는데 내가 존경하는 장준하, 김구 선생 평전 쓰면서도 과오와 잘못된 노선에 대해서는 사정없이 비판했다."

- 그러면 유족들은 싫어할 것 같다.
"오늘 책으로 나온 <장준하 평전>도 오마이뉴스에 연재할 때 장준하 선생과 가까운 분들이 일부 싫은 소리를 했다, 예를 들어 장준하 선생이 육당 최남선이 돌아가셨을 때 육당을 기리는 데 앞장서고 <사상계>에 육당 특집을 만들고, 또 동인문학상을 제정한 것 등에 대해 잘못을 사실대로 기록했다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DJ에 대해서도 독재권력과 하수인들, 보수언론과 지식인들이 그를 왜곡한 것을 펴고 바로잡는 데는 주저하지 않겠지만 그의 잘못에 대해서는 사정없이 날을 세울 것이다."

- 요컨대 DJ는 언제 평전이 나오는지만 묻고 평전 쓰는 것에 대해서는 본인의 호오를 밝히지 않은 셈인데 세간에 논란이 된 '숨겨놓은 딸' 문제, 이런 것도 다루나.
"내가 인터뷰에서 몇 가지를 물었는데, 이른바 숨겨 놓은 딸 문제도 그중 하나다. 한때 숨겨 놓은 딸이 있다는 보도가 있었고 그에 대해 궁금해 하는 국민들이 많다, 그 부분에 대해 말씀 해달라고 해서 딸이 아니라는 답변과 근거자료 등을 입수했는데 그 내용은 <오마이뉴스>에 연재할 때 쓸 것이다."

- DJ는 뭐라고 하던가.
"그게 사실이라면 심지어 자신의 성씨까지 바꿔가며 발표하고 이용해 먹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폭로하지 않았겠냐고 하더라."

- 그러나 당시에는 '정치는 요정에서 이뤄진다'고 할 만큼 술집-요정정치가 성행했고 DJ도 현실 정치인으로서 요정 출입도 많이 했을 터인데 그런 부분도 들어가나?
"DJ는 사별한 전처인 차용해씨가 본인이 선거에서 네 번 떨어지고 생활고에 시달려 어려울 때 병사한 데 대한 큰 부채의식을 갖고 있다. 재혼한 이희호 여사와는 부부이면서도 신구 기독교인으로서 철학을 공유하고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 또 본인이 학벌이 없다 보니 바둑이나 골프 같은 잡기는 철저히 배격하고 집에서 책을 읽거나 화초를 가꾸고 시간이 나면 음악회나 영화관을 자주 다닐 만큼 가정적이었다.

당시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는 골프장 혹은 요정이나 술집에서 정치가 이뤄졌는데 DJ는 젊었을 때는 부인에 대한 부채의식과 미안함 때문에, 대통령 후보가 된 70년대 이후에는 중앙정보부 등 정보기관의 감시와 촉수 때문에 요정 출입을 안 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숨겨놓은 딸이 있었다면 도덕적으로 매장되었을 것이다. 그 부분은 오마이뉴스에 연재할 때 자세한 내용을 밝히겠다."

- 그와 관련된 미공개 자료들도 이번에 공개하나?
"그동안 DJ를 인간적으로 사상적으로 음해한 내용은 대부분 중앙정보부에서 만든 것들인데, 심지어 71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출생에서부터 친구, 후원자, 친인척, 처가 등 DJ의 모든 것을 밝힌 문건을 입수했고, 80년대 보안사에서 만든 문건도 입수했다. 또 본인도 모르는 본인 글도 찾아냈다. 50년대 DJ가 노동문제연구소 소장하면서 월간지에 기고한 글이 있는데 본인도 그것을 모르더라."

이 대목에서 그는 DJ 자신도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린 기록들을 일부 보여주었다. 그중에는 48년 제헌의회에서 초대 대통령을 선출할 당시 서재필 박사한테 보내는 대통령에 입후보 해달라는 청원서도 있다. 문건을 보면 서재필 박사더러 대통령에 입후보해달라는 요청서를 '민주독립당 김대중' 명의로 보낸 것인데, 정작 본인은 필체는 맞는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고 한다.

또 그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인파가 몰렸다는 71년 4월 장충단 공원에서 한 신민당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유세 연설문 원본을 보여주면서 "당시 DJ가 45세밖에 안되었는데 연설 기법이나 청중을 휘어잡는 것을 보면 대단한 면모와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다"고 평가했다.

- 아직 탈고를 한 것은 아니지만 DJ 평전을 쓰는 데는 어떤 어려움이 가장 크나
"제가 DJ와 사적인 또는 공적인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해왔기 때문에 편향된 시각으로 보지 않겠냐는 하는 선입견이 마음에 걸린다. 그러나 87년 야권분열로 인해 민주정부 수립을 5년 지연시킨 양김의 공동 책임, 민주화 동지로서 민주화를 함께 하겠다고 약속한 YS와의 적대관계와 그로 인한 영호남의 반목과 갈등, '제왕적 총재'였다는 지적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기술할 것이다. 물론 보수언론과 지식인들이 독재정권이 만들어놓은 시각에 따라서 DJ에게 용공과 좌경을 덧칠해 왜곡한 부분을 바로잡는 것도 소신과 용기를 갖고 할 것이다. DJ 본인도 공정한 언론으로부터 제대로 비판을 받아보았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얘기를 수차례 한 적이 있다."

- 김영삼과 김대중의 인간관계는 경쟁적 관계에서 적대적 관계로까지 변질된 느낌이다.
"지금은 그렇지만 DJ가 YS를 도와준 사례도 많았다. DJ가 70년대 당시 가택연금 상태였는데 (전당대회가 열린) 서울 을지로 아서원에 뚫고 들어가 '이철승의 중도통합론은 유신의 지원세력일 수밖에 없다'면서 YS 지지 연설을 해 YS가 신민당 총재가 되었고 이렇게 해서 나중에 부마사태, 10.26 등으로 독재정권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 정치인으로서 두 사람의 스타일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면 어떤 스타일인가.
"YS는 어려운 문제도 쉽게 처리하는데, DJ는 쉬운 문제도 어렵게 푸는 정치인이다. 그만큼 성격이나 사고의 차이가 대비적이다. YS는 독재와 싸우면서도 일정한 영역과 지분을 보장받았는데, DJ는 설 땅도 없을 만큼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이런 정치환경 때문에 YS는 양성적이면서도 활동적인데, DJ는 본인은 원래 상당히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인데 박정희-전두환으로부터 수난과 박해를 받는 가운데 저항하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다 보니 무거운 사람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사실 인간 김대중은 낙천적이고 유머러스하고 화초 가꾸기를 즐기는 부드러운 스타일이다."

- YS와 비교해 DJ의 장점은 무엇인가.
"DJ는 기본적으로 성실한 사람이다. 정치인이 아닌 실업가나 학자로서 입지를 세웠어도 대성을 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DJ가 외국에서 돌아와 고려대 강만길 교수하고 두 분이 <나의 길, 나의 사상>이라는 책으로 묶어 냈는데 대학노트 3권 분량으로 꼼꼼히 써와 강 교수가 놀라서 마산 출신인 그가 골수 DJ팬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DJ의 장점은 성실성이다. YS는 대충대충 하는 스타일이지만 DJ는 총재로서 자신이 발행인인 당보(黨報) 신문이 밤 12시에 나와도 직접 보고 인쇄를 넘길 만큼 만기를 친람하는 스타일이다."

- 정치인 노무현과 김대중은 어떤 스타일인가.
"두 분이 다 한국 정치 풍토에서는 특이한 분들이다. 전통적인 주류 사회에서는 이단아나 아웃사이더들이다. 둘 다 한국 정치에서는 비주류였다. 그러나 비주류이기 때문에 개혁성을 띠었고, 상대적으로 YS는 주류로 살다 보니 보수적인 인식과 사고가 굳어진 측면이 있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은 동질성이 있다. DJ도 지난 6월 11일 6.15 남북정상회담 9주년 기념강연에서 두 사람이 모두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상고를 졸업했고, 같이 국회의원을 하면서 반독재투쟁을 했고, 대통령 재임 중에 남북화해협력을 고민하는 등 닮은 점이 너무 많다면서 '전생에 무슨 형제간이냐'라고 했을 만큼 동질적인 측면이 많다."

"김대중을 한마디로 말하면? 유능한 민주적 실용주의자"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자택의 서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자택의 서가.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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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어떤 사람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유능한 민주적 실용주의자이다."

- '유능하다'는 것은 어디에 방점이 찍혀 있나.
"DJ는 일반 정치인들에 비해서 노력을 참 많이 한다. 원래 머리도 좋지만 10분 연설 위해 3~4시간 준비하고 어떤 대안이나 정책을 마련하려면 전문가들과의 토론뿐만 아니라 수많은 자료를 섭렵하고 전문가 자문을 받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노력과 성실성을 갖고 있다. 정치인들이 대부분 참모들이 써준 것을 발표하는데 DJ는 모든 것을 자신이 준비하고, 또 자신의 원칙은 지키면서도 방법은 실용주의를 택한다.

그는 또 민주적 지도자이다. 밖에서는 그가 독선적이라고 하지만 회의 진행이나 가족관계 등을 보면 참 민주적이다. 예를 들어 매주 월요일 아침에 한 아태평화재단 회의 때도 모든 사람에게 발언 기회를 주고 비판을 수렴하는 식으로 회의 운영이나 진행을 민주적 방법으로 결정했다. 그런 점에서 정치인으로서 철학과 실천성, 투쟁과 이론을 갖춘 보기 드문 지도자인데, 그만큼 한국의 정치 지도자로서 국제사회에서도 명성을 두루 갖춘 지도자가 다시 나오기는 우리가 예상하는 기간에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가 사는 남양주 와부읍에 자리 잡은 강변 아파트는 작은 도서관을 방불케 할 만큼 많은 책들로 가득 차 있다. 거실은 물론 아들방까지 가득 채워진 장서는 2만2천 권쯤. 주로 현대사 관련 서적이다. 그는 집이 온통 책으로 싸여 있다고 하자 "집 사람이 책 사는 것은 뭐라고 안 한다"고 한다.

그는 사진을 찍으며 웃는 포즈를 취해 달라고 하자 "나도 험한 세상을 살다 보니 웃을 일이 없어 얼굴이 굳어졌다"며 DJ처럼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김대중과 김삼웅, 71년부터 대통령 후보와 당보 취재부장으로 인연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김대중 평전 집필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김대중 평전 집필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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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첫 인연은 언제부터인가.
"DJ가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 취재부장으로 처음 만났다. 그때 DJ는 40대 중반이고 나는 30대 초반이었는데, 유세기간에 DJ의 정치철학과 4대국 보장론, 대중경제론, 박정희 실정 비판 등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 호감을 가졌다."

'민주전선'. 그 이름에서부터 독재와의 전면전을 상정한 야당 신민당의 기관지이다. 당시 기자는 4명뿐이었지만, <사상계> 70년 5월호에 처음 발표된 김지하의 담시 '오적'을 전재해 평지풍파를 일으킨 것도 바로 <민주전선>이었다. 민주전선은 80년 5.17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에 의해 그해 폐간되었다.

- 그다음에도 DJ와 계속 인연을 유지해왔나.
"그 이후에는 도쿄 납치사건 등 박정희의 탄압과 긴급조치시대의 도래로 DJ는 정치활동을 거의 못했다. 그러다가 87년 6월 항쟁 뒤에 평화민주당을 창당할 때 저를 <평민신문> 주간으로 불러 다시 DJ와 결합했다. 그 후 92년 대선에서 YS한테 패배해 정계를 은퇴한 DJ가 아태평화재단을 만들어 통일문제에 전념할 때 재단의 기획조정실장으로 보필했다."

<민주전선>의 전통을 이어받은 <평민신문> 역시 야성이 넘치는 당 기관지였다. 당시 그 밑에서 함께 일한 전병헌 편집국장과 김현미-안규백 기자는 나중에 17-18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아태평화재단 역시 나중에 김대중 정권의 산실이 되었다. 임동원 사무총장을 비롯해 남궁진 총무실장, 정동채 비서실장, 나종일 교수실장, 이강래 연구위원 등은 김대중 정부에서 각각 통일부장관, 문광부장관, 주일대사, 국정원 기조실장 등으로 기용되었다.

- 당시 아태평화재단 간부들이 대부분이 청와대 수석이나 정부의 장차관, 국영기업체 수장으로 갔는데 왜 정부에 들어가지 않았나?
"저는 체질적으로 공직이 안 맞아 언론개혁을 택해 신문사로 가서 당시 보수신문들의 작태를 비판하고 언론개혁을 위해서 4년간 노력했다. 그때 대통령을 뵙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 소유 언론사가 있다는 것은 이치나 상식으로 맞지 않다고 말씀드렸다. 그래서 <서울신문>에 가서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으로 개제하고 신문을 개혁해 정부가 1대 주주에서 손을 떼도록 해 정부 기관지 역할을 종식해 신문을 독립시켜 놓고 성균관대에 교수 자리가 나서 거기로 옮겼다."

- 그러니까 재야 야당시절에는 반독재 투쟁을 함께했지만 집권 뒤 김대중 정부에는 참여하지 않았는데 DJ와 떨어져 있던 기간에는 무슨 일을 했나?
"친일문제연구소를 만들어 소장을 하면서 친일문제를 천착하고. 주로 저술활동을 해 그동안 30권을 책을 냈다. 친일청산 문제와 곡필사, 한국 필화사, 금서, 위서 등 언론 개혁 관련 책을 주로 집필했고, 평전은 어제 나온 <장준하 평전>까지 9권을 냈다. 그리고 가을에 조봉암 평전이 나올 예정이다." 


태그:#김대중, #김삼웅, #김대중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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