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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소기업'이란 희망제작소(이사장 김창국) 소기업발전소에서 발굴하여 경영 지원 협약을 맺은 소기업으로 지역 자원을 활용하여 지역 발전에 기여하는 비즈니스를 하고, 사회적 목적을 위해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소기업들을 말합니다. 희망제작소에서는 이들 희망소기업을 직접 방문 인터뷰하여 그 생생한 스토리를 <오마이뉴스>와 희망제작소 홈페이지에 기획 연재하고 있습니다. - 필자 주
 

 

연해주 지역의 땅은 때묻지 않은 자연 그 자체를 간직하고 있다. 농약이나 비료를 쓰지 않아 땅의 기운이 그대로 살아 있는 곳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한반도와 하나의 산맥으로 연결돼 있어 한반도의 기운이 서려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 땅에서 자라나는 민들레나 도라지, 고사리 등을 그곳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연해주는 또 사람의 손길이 많이 묻지 않은 곳을 간직하고 있다. 대지가 워낙 넓다 보니(한반도 면적의 약 75%) 연해주 전체 경작 가능 면적의 10%인 30만ha에서만 농사를 지을 정도로 아직 개간되지 않은 곳이 많다. 이에 따라 이 넓은 농토에서 잡초를 뽑는 일도 만만치 않은 일. 그저 잡초와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건강한 것들만 수확한다.

 

아, 연해주여

 

북한 함경북도와 맞닿아 있는 연해주에는 4만여 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 그들 대부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한 이들이다. 반세기 전 17만여 명의 고려인들은 6000㎞ 거리의 낯선 땅으로 내쫓겼지만, 연해주에는 다시 고려인들이 모이고 있다.

 

자신들이 선택한 땅, 그 땅은 그들을 배반하지 않았다. 노력한 만큼, 땅에 애정을 부은 만큼, 땅은 그들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주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 편이 아니었다.

 

연해주에 고려인들이 모여 살게 된 것은 1860년대 조선에 큰 기근이 들면서 함경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집단 이주한 것이 계기가 됐다. 황무지에 가까운 땅을 우리 민족 특유의 억척스러움으로 옥토로 바꾸었다.

 

 

그러나 충격과 슬픔, 배반은 하루 아침에 그들에게 다가왔다. 1937년, 스탈린 정부는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일본인들과 구분하기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살아 생전 고향땅을 다시 볼 수 없으리란 절망 속에 중앙아시아로 가는 열차에 몸을 구겨 실었다. 노인과 어린이, 절반 가까이가 기차 안에서 죽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흘렀고,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는 또 다른 시련을 몰고 왔다.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국가들은 러시아 언어의 사용을 금지했다. 중앙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말을 모르는 고려인들은 생활 기반이 위태로워졌다. 그동안 힘들게 일궈온 삶의 기반이 또 다시 송두리째 무너진 것이다. 그들은 돌아가야 했다.

 

청국장 익어가는 연해주

 

90년대 들어 중앙아시아 지역 고려인들은 연해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게 어려웠던 면도 있었지만, 죽어서라도 고향땅에 묻히고 싶은 연해주 1세대들의 강력한 의지 때문이기도 했다. 동북아평화연대(이사장 강영석) 등 한국의 시민단체들도 이들의 이주와 정착을 돕기 위해 지원에 나서며, 고려인들의 연해주 이주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북조선에서 넘어갔단 말이요. 그리고 그 다음 1937년에 우리 가족 모두 우즈벡으로 갔어. 그리고 나가서 카자흐스탄까지 갔단 말이요. 우리 민족 싹 쓸어서… 나는 우리 아버지가 카자흐스탄에서 났어. 연해주로 온 것은 말이요, 92년 1월이요. 고생한 것 말하자면, 눈물 나서 못하갔어. 그냥 짐보따리 매고 연해주로 왔어."

 

 

최근 동북아평화연대 초청으로 한국 땅을 밟은 김이나 블라지미로브나(65) 할머니 역시 연해주 정착이 쉽지 않았다. 카자흐스탄에서 수학 선생님이었던 그녀는 카자흐스탄 독립 1년 만에 연해주 태생의 아버지와 함께 연해주에 왔다. 하지만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나라에서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중국 물건을 러시아인들에게 팔아 근근이 생활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지난해부터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지난해 말 한국 기업이 운영하는 청국장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살림살이가 많이 나아진 것이다. 김 할머니처럼 청국장 공장에서 일을 하는 고려인들은 50여명이다. 사회적 기업 바리의꿈(대표이사 황광석)은 연해주 지역에서 이들과 함께 청국장을 만들며, 고려인들의 정착을 돕고 있다.

 

'바리의꿈'은 이들의 정착을 돕기 위해 지난 2005년에 설립된 회사로 동북아평화연대의 연해주 고려인 농업정착 지원 사업이 계기가 됐다. 동북아평화연대는 지난 2003년부터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하는 고려인들에게 살 곳과 일할 곳을 지원해주는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들의 실질적 자립을 돕기 위해 아예 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고려인들의 연해주 정착을 돕고자

 

"동북아평화연대에서 고려인들의 연해주 정착 및 자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2004년부터 한국에 청국장 바람이 불더라고요. 이거다 싶었죠. 왜냐하면 청국장 제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원재료인 콩인데, 콩의 원산지가 바로 연해주 지역이기 때문이에요. 오염되지 않은 연해주에서 고려인들과 함께 재배한 콩으로 청국장을 만들자는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당시 동북아평화연대 사무국장이었던 바리의꿈 황광석 대표이사의 말이다. 동북아평화연대는 본격적인 사업 추진을 위해 회원들이 십시일반 출자를 해 회사를 설립했다. 사명은 '바리의꿈'으로 지었는데, 역경과 고난 속에서 아버지의 생명을 구해낸 바리공주 신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연해주 고려인들이 현대판 바리공주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1년여의 준비 끝에 마침내 바리의꿈 청국장이 세상에 나왔다. 연해주 벌판에서 자란 건강한 콩과 러시아 특산물인 차가버섯 진액을 가미해 만든 차가버섯 청국장이다. 이제 한국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일만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 외로 판매는 극히 부진했다. 유기농, 친환경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터라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판매 부진의 이유는 유통망을 확보하지 못한 데 있었다. 바로 수입산이라는 점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바리의꿈 청국장이 친환경 제품이고 특히 우리의 핏줄인 고려인들이 만든 청국장이었지만, 수입산이라는 굴레는 벗어날 수 없었다. 국내 친환경 단체나 생협 등은 내규상 국산 제품만 판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의꿈 차가버섯 청국장에게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는 듯 했다.

 

한 통의 편지가 몰고 온 기적

 

그렇게 사업 초기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자본금은 갈수록 줄어들었고, 고려인들의 연해주 정착을 돕기에는 턱 없는 매출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주문량이 폭증한 것이다. 2007년 10월, 200만명의 독자를 확보한 '고도원의 아침 편지'에 고려인들의 사연이 소개됐는데, 이를 본 독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청국장을 주문했다.

 

황대표와 바리의꿈은 밀려드는 주문에 기뻐할 새도 없이 고민에 빠졌다. 한번도 이만한 규모의 청국장을 생산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납기를 맞추기 위해서는 모든 고려인들이 24시간 매달려야 가능한 양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아온 고려인들은 잔업이나 철야에 익숙한 우리와는 달랐다. 그들이 일을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였다.

 

"우리 인력으로 볼 때 주야3교대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그들을 설득했어요. 조심스럽게 말씀 드렸는데, 우려와는 달리 고려인들도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셨어요. 12월31일이 납기일이었는데, 그날 마지막 납품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해 겨울 처음으로 월 매출 1억 원을 넘길 수 있었다. 정부로부터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으면서 사업도 탄력을 받게 됐다. 덕분에 연해주에서도 바리의꿈과 고려인들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면적에 비해 인구(2백만여 명)가 턱없이 적은 터라 고려인들의 연해주 이주를 반기고 있기 때문이다. 바리의꿈이 연해주 지역 경제 발전의 성공 모델이 된 것이다.

 

청국장 사업이 안정되면서 바리의꿈은 매출 증대를 통한 고려인 지원 확대를 위해 새로운 제품 개발에 나서고 있다. 청국장에 이어 우리 음식에 꼭 필요한 메주를 생산해 한국에 들여올 계획이다. 또 민들레 엑기스와 도라지 꿀청 제품도 개발을 마친 상태다.

 

바리의꿈은 국민참여 나눔농장으로 재탄생할 것

 

"바리의꿈은 고려인 자활을 돕는 사회적 기업이자, 한국 청년들과 고려인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민족 기업입니다. 이제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고자 합니다. 바리의꿈은 현재 연해주에 약 500만평 규모의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 농장을 함께 일궈갈 분들을 구하고 있어요. 물론 꼭 연해주에 오실 필요는 없어요. 우리 회사의 주주로 참여하시면 됩니다."

 

바리의꿈은 고려인들의 연해주 정착과 자활을 위한 인프라 조성을 위해 투자를 확대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많은 국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국민주주 모집 방식을 택했다. 조성할 기금은 총 10억원이며, 1만명 이상의 국민주주를 모집하는 게 목표다. 또 이와는 별도로 동북아평화연대 중심으로 후원회원을 모집할 계획이다.

 

조성된 기금으로는 우선 농장 시설 현대화에 투자할 계획이다. 농기계를 정비하고, 농업 인프라를 구축하는 게 생산성 증대로 이어진다는 판단에서다. 또 부가가치 증대를 위해 농산물 가공 시설을 추가로 확보하려고 한다. 고려인들을 추가 고용할 수 있는 시설 기반 확보가 궁극적인 목표이다. 수익금 중 일부는 어렵게 살고 있는 고려인들과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사용할 예정이다.

 

바리의꿈은 한걸음 더 나아가 한반도의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데 바리의꿈과 고려인들이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아직도 식량문제로 고통 받는 북한과 식량자급률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는 남한을 위한 식량기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언젠가 한반도에 식량위기가 도래했을 때 한 핏줄인 고려인들이 큰 몫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바리공주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지만, 나중에는 결국 아버지를 살려요. 어찌 보면 우리 고려인들이 바리공주와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나라는 식량이 부족하고, 언제 식량위기가 올지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려인들과 연해주 지역이 한반도의 식량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되리라 생각해요. 마치 바리공주가 아버지를 살린 것처럼요."

 

고려인들과 김 할머니도 앞으로 달라질 바리의꿈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연해주에 많은 고려인들이 이주해오고 있는데, 그 중에서 고려인 청년들이 마땅히 일 할 게 없는 것이 안타까워서다. 그들 모두의 희망이 되는 바리의꿈이 되기를 그녀는 바라고 있다.

 

"우수리스크에서는 현재 대부분의 고려인들이 고본질(고려인들은 임차농을 이렇게 표현한다)을 해서 농사를 짓는단 말이요. 이러니 젊은 사람들 일자리 많이 없지 말이지. 바리의꿈이 자연 농법으로 농사 짓는 거 가르치고 있는데, 그런 일자리가 많이 생겼으면 좋갔어. 농장이나 공동작업장 더 커져서 젊은 사람들 그쪽에 일했으면 좋갔어."

덧붙이는 글 | 노준형은 전공이 뭐냐고 물어볼 때가 제일 난감하다. 그럴 때마다 전자공학과 글쓰기의 상관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회로설계(Circuit Design)와 글쓰기의 원리는 동일하다고 종종 주장한다. 사람 냄새나는 글을 쓰고 싶어 엔지니어의 길을 접고 기자의 길을 선택했다. <코리아포커스>와 <아시아경제 브이에스뉴스>를 거쳐 현재 IR 대행사에서 일하고 있다. 

이 기사는 희망제작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바리의꿈, #청국장, #연해주, #동북아평화연대, #희망소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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