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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 백주년기념예배당...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총신 백주년기념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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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 총신신학대학원 탐방

서울여행의 첫 목적지로 양지 서울 신학대학원으로 잡았다. 남편이 3년 동안 다녔던 양지 캠퍼스...내가 한번은 꼭 가보고 싶어 했던 곳 중의 하나가 양지에 있는 신대원이었으니 말이다. 남편은 가끔 신대원에서 가까운 마을에서 동기생들과 자주 먹었다며 맛있는 순두부집도 꼭 한번 데리고 가겠노라고 말해 오던 터라 기대가 된다.

멀기도 하여라. 비행기로 간다면 한 두 시간쯤 걸릴까. 우리 차로 낯선 서울 곳곳을 돌아  다니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오전 11시 30분, 양산 IC를 벗어나 언양휴게소에서 잠시 휴식,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경주, 청도, 건천을 지나 경산, 대구, 구미, 김천, 김천휴게소에서 휴식 후 다시 출발, 추풍령휴게소를 지나 옥천, 대전, 청원, 죽암휴게소를 지나자 어느새 오후 4시 15분이다.

남이분기점에서 경부고속도로를 빠져나와서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간다. 청주 거쳐서 진천, 음성, 일죽, 이천시...휴~서울 한번 가는 길 힘들기도 하다. 씽씽 쌩쌩 신나게 달리건만 아직도 고속도로 위에 있다. 멀기도 멀다. 거의 하루 온종일을 고속도로 위에 있다.

호법 분기점, 용인으로 가다가 덕평 지나서 양지IC를 통과 하자 오후 5시 30분이다. 양지IC를 지나 좌회전해서 총신대원으로 간다. 오후 5시 40분이 되어서야 양지면 제일리 산 41-11에 위치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도착했다. 꼭 한번은 오고 싶었던 곳이다.

남편은 3년 동안 다녔던 이곳 신학대학원에 나와 함께 온 것이 뿌듯하고 좋은지 내 손을 꼭 잡아 이끌며 건물들을 소개했다.

소래교회...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내... 소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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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가 본 곳은 신대원 내에 있는 소래교회(모형)이다. 마당에는 최권능 목사(최봉석 목사)기념비와 서상륜 장로기념비가 서 있다. 서상륜 장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세운 분이다.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이 땅에 들어오기 훨씬 전, 한국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세웠다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

순수한 우리 조상들에 의해 이 강산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요 한국교회의 뿌리가 되는 소래교회는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가 세운 것으로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소래마을)에 최초로 세워졌다. 1883년 5월 16일 초가집 예배당이었으나 1895년 7월 8일 8칸 기와집 예배당으로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래교회 옆 마당에 세워진 종탑...
▲ 소래교회 소래교회 옆 마당에 세워진 종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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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륜은 1848년 평안도 의주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외교의 문이 굳게 닫혀 서양문화의 접근이 불가능한 때였으며 나라 안은 가난과 온갖 전염병에 시달리며 문화와 문명의 세계를 모른채 살아가는 백성들이 많은 때였다.

그때, 의주에서 고려문을 드나들며 홍삼장사를 하던 서상륜이 1878년 만주에서 활동하던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를 만나 그들에게 조선말 가르쳐주는 일을 하다가 성경을 읽고 감동, 로스의 전도로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는 1882년 로스선교사와 함께 최초로 누가복음서를 한글로 번역해 발간하였고 그 후 자신이 번역한 누가복음서를 가지고 고향인 의주로 잠입하여 황해도 장연 소래에서 전도활동을 하다가 1883년 소래교회를 세웠다.

마침내 한국최초 자생교회를 세우는 업적을 남긴 것이다. 그는 1887년 새문안교회가 세워질 때에도 큰 공을 세웠고 또한 관서, 관북지방의 권서로서 복음사역에도 크게 기여하다가 1926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최초로 신약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이수정 비도 있다.

...마음껏 기도하게 만들어 놓은 기도처들...
▲ 학교 산 속 기도실들... ...마음껏 기도하게 만들어 놓은 기도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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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은 1843년 전라도 옥과에서 출생하였다. 1882년 민비를 임오군란의 위기에서 구출한 공로로 그해 9월 2차 신사유람단의 비수행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였고, 일본의 농학자 쓰다를 만나 예수를 영접하고, 1883년 야스가와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불붙은 열정으로 암흑의 땅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미국에 두 번이나 요청해 '한국의 마게도니아인'의 역할을 하였다. 또 1884년 12월, 일본에서 최초로 '마가복음서'를 한글로 번역하고 출간하였다.

1885년 4월, 첫 한국선교사로 입국하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그 '마가복음서'를 가지고 인천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한국기독교 역사 가운데 매우 뜻 깊은 일이다. 미국교회들을 향해 '와서 도우라'고 외쳤던 이수정, 그 후 많은 선교사들이 이 땅을 찾아와 복음을 전했다.

아담하고 조용한 소래교회를 둘러본 뒤 남편이 있었던 기숙사와 식당, 도서관, 숲 속에 있는 기도실, 본관 등 곳곳마다 둘러보았다. 이곳 신대원 도서관에는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다. 밤새도록 불을 밝혀놓고 책을 읽고, 공부하는 신학도들이 여기 있다.

마루바닥이 시원했다...
▲ 소래교회 내부... 마루바닥이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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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맛있다는 해물 순두부, 가는 날이 장날

정숙한 분위기 속에서 책 읽으며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서 아직 한국교회는 희망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학교를 한번 둘러보고 나서 다시 학교를 나와 그 맛있다는 순두부집을 찾아간다. 학교에서 마을까지 나오는 길은 꽤 길게 느껴진다. 걸어서 나오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남편은 동기들과 함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말하자면 개강할 때나 종강할 때, 혹은 동기생들 중에 교회에서 사례금을 받았을 때, 이 길을 걸어서 마을까지 순두부를 먹으러 가곤 했다고 한다. 마을을 돌아보며 추억의 장소를 찾다가 드디어 풍년보리밥집을 찾아냈다.

어떡하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내부공사중'이라고 적혀 있지 않은가. 눈치도 없이, 신랑이랑 나랑 함께 멀고 먼 길을 돌아 이곳까지 왔건만 야속도 하다. 하는 수 없이 주변을 돌아보다 적당한 집에서 저녁식사를 해결한다. 음식 맛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설렁탕 맛이 아주 좋았다.

...총신백주년기념예배당 앞에서...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총신백주년기념예배당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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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지면서 소래교회 안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싶어 발길을 돌린다. 소래교회 마당으로 접어들자 우렁찬 기도소리가 들려온다. 뜨겁게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학생들의 기도소리는 숲을 뒤흔들고 있다. 몇몇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는 소래교회 안으로 들어가 엎드려 기도하고 있노라니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기도소리는 뜨겁고 열정적이고 깊어져 갔다.

밤이 깊어갈수록 불 밝힌 도서관은 더욱 밝아서 도서관에서 책만 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좋다. 소래교회 안에서, 기도실에서 울려 퍼지는 기도소리 깊고 높아 기도가 살아있어 위로가 되었다. 위기에 처한 한국기독교를 이따금 실감하지만 밤이 새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도서관에서는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다.

소래교회와 곳곳의 기도처에서는 기도소리 높아 감사하다. 기도로 깨어있는 학생들과 신학을 연구하고 배우는 학도들이 도서관의 불을 밝히고 있는 곳엔 희망이 있다. 기도하는 백성이 있는 한 결코 망하지 않는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에워싼 송전탑이 웬말이냐

총신 백주년기념예배당과 본관...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총신 백주년기념예배당과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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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잔디 밭에서...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이른 아침...잔디 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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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고요한 신대원 뜰을 거닐다 문득 올려다 본 산, 그 산 꼭대기에 높이 솟은 송전탑이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고요한 숲 속에 위치해 있는 학교를 둘러보며 이곳에 지성과 영성을 갈고 닦는 신학도들이 있음과 세상의 소요와 적당히 떨어져 있어 참 좋다 생각하며 둘러보는데 학교 건물 뒤 산 위에 쐐기를 박듯 높이 솟은 이질적인 송전탑이 학교를 에워싸고 있다.

얼마 전 떠들썩하게 기독신문에 난 기사를 읽었던 적이 있다. 신대원 주변 경관을 헤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곳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송전탑은 흉물스럽고 이질적인 모양으로 우뚝 솟아 있다. 총신신대원 학생들 9명이 병원으로 실려 가는 등 사고가 발생한 것이 얼마 전의 일이다. 

한국전력측에서 지난 6월 2일 새벽 3시50분부터 기습공사를 강행해 학생 100여명과 한국전력 측에서 고용한 사설 용역업체 직원 100여명과 대치 상태가 되던 중 일어난 사태였다.

숲 속 깊은 곳에 위치한 학교는 고요한 풍경 속에서 영성과 지성을 갈고 닦는 1,800여명의 교직원과 학생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거의 1년 내내 1800여명의 교직원과 학생들이 생활하며, 기숙사도 1400여 명을 수용하는 규모라 24시간 학교생활이 이루어지는 이곳에 765,000볼트의 송전탑이 가로지르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중의 하나다...학교 미관을 헤칠 뿐 아니라 1천 8백여 명이 있는 학교에 수만 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송전탑이라니...
▲ 학교 뒤에 높이 솟은 송전탑... 중의 하나다...학교 미관을 헤칠 뿐 아니라 1천 8백여 명이 있는 학교에 수만 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송전탑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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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신대원 양지캠퍼스 송전탑 사태가 발생한 것도 어느새 1년 6개월이 지났다고 한다. 학교 측에서는 원래 설계대로 하지 않고 학교 너머 산지의 지주의 땅 중앙을 지나도록 되어 있었으나 이를 불법적으로 설계를 변경해 결국 학교측에 피해를 가중시켰다는 것이다.

1년 6개월이 넘도록 90여 차례 총신대학교와 한국전력이 접촉하며 해결점을 찾으려 했지만 되지 않았고 한국전력측에서 용역업체를 동원해가며 송전탑 건설을 밀어붙여 결국 우려했던 사태가 발생, 송전탑 공사 현장에서 폭력사태까지 발생하고 말았던 것이다. 송전탑문제가 사회이슈로 확산되면서 국회차원에서 진상조사단이 구성돼 해결책을 강구하고 나선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아무쪼록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학교에도 피해가 없이 잘 해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울러 한국전력 측에도 여러가지 문제점을 생각해 학교 미관과 학생들에게 무리없이 문제를 잘 풀어서 상호간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학교 내 기도실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새벽 일찍 일어나 학교 한바퀴 돌아본 뒤 새벽예배에 참석했다. 새벽예배는 총신백주년기념예배당에서 조직신학교수인 이상원 교수님의 설교로 종강새벽예배를 드렸다. 우린 한 학기를 마치는 종강새벽예배에 학생들과 함께 참석했던 것이다. 새벽예배를 마친 뒤 학교 구내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한국기독교 순교자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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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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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 양지면을 벗어나기 전, 신대원 바로 근처에 있는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을 잠시 들렸다. 오전 8시 5분, 너무 일찍 찾아온 것일까. 이른 아침이라 아직 개장을 안 한 상태라 건물 안에는 들어갈 수가 없어 뜰만 밟았다. 개장시간은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이며 주일은 휴무이다.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으로 올라가는 넓고 한갓진 길옆에 세워진 많은 기념비들에 새겨진 이름들...그것은 이 땅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신앙을 위해 순교한 사람들이었다. 아는 이름이 있을까 자세히 들여다보았지만 거의가 모르는 이름들이었다. 피로 세운 한국교회임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이름없이 빛도 없이 이 땅에 순교의 피를 뿌린 사람들을 추모하는 비...
▲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이름없이 빛도 없이 이 땅에 순교의 피를 뿌린 사람들을 추모하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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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이 땅에 복음이 전해진 이래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숨진 순교자는 주기철 목사를 비롯 2,6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이 중 600여 명의 순교자명단이 순교자기념관에 헌정되어 있다고 한다. 뜰 앞에는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인 '고난의 명상'이 기념비에 새겨져 있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을 어찌하고 왔느냐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다시 돌아 나오는 길, 기념관 안에는 비록 들어 가보지 못했지만 고요한 뜰과 고요한 숲 속 길을 올라오는 길 양쪽에 놓인 기념비들만 보아도 절로 마음이 숙연해지고도 남았다.


태그:#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양지, #송전탑, #소래교회, #순교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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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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